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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21화 (22/208)

21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사시사철 푸르고 따스한 봄국 전경이 눈에 담겼다.

에즈히나 강 수면 위로 햇살이 찬란히 부서졌다.

그 아름다운 강변에서 조정 선수로 참가한 남주들이 상반신을 드러낸 채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아리나는 양산을 살살 돌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좋아.”

시에나도 그 옆에서 제 장갑을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일찍 온 보람이 있어요. 명당이네요.”

기다란 테이블에 앉은 5명의 영애들이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절경을 즐기고 있었다.

꽃이 만개한 들판과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

그 풍경 속에 건강미 넘치는 선수들이 자리했다.

나도 모르게 감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너무 좋네요.”

아리나가 움찔하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어머? 빨리 왔네요!”

“그러게요? 적어도 30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영애들이 그제야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나는 채도 높은 눈동자들을 응시하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에른은 웬만하면 제 말을 잘 들어주거든요.”

너무 잘 들어줘서 문제지.

보증을 서 달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서 줄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입안이 썼다.

그나저나 비에른은 어디에 있지? 비에른도 조정 경기 관람하러 온다고 했는데.

강변을 두리번거리다 트롤리를 몰고 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색 장발을 높이 묶은 남자가 우리 테이블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감돌았다.

“주문하신 애프터눈 티 세트 나왔습니다.”

우리는 장인이 도화지에 첫 붓을 놀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숨을 죽인 채 그의 서빙을 지켜보았다.

알바생 남주의 섬세한 손길을 따라 삼단 디저트 트레이와 진한 에스프레소 향을 풍기는 커피 잔이 정갈히 배치됐다.

남주는 각 맞춰 세팅을 끝낸 뒤 짧게 고개를 숙였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레이디.”

미소 한 점 없는 딱딱한 인사였지만, 2N년 인생 동안 본 서빙 중 가장 서비스 정신 풍만한 서빙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기분이 이렇게 말랑해질 리가 없다.

우리는 사라지는 알바생 남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인가 봐요. 사장 영애가 슬롯에 추가했다는 알바생.”

“딱 봐도 남주네요. 이거 #역키잡이 아니라 그냥 지금 바로 잡아드셔야 할 거 같은데. 미성년자도 아니잖아요? 봄국은 미성년자 일하는 거 불법이니까.”

“사장 영애, 전부터 느꼈지만 크게 될 사람 같아요. 어떻게 참고 있을까.”

그런데 홀로 돌아가던 알바생 남주가 사장 영애를 보고는 바로 걸음을 멈췄다.

대목이라 그런지 사장 영애가 분주하게 접시를 옮기고 있었다.

알바생 남주는 위태롭게 접시를 들고 있던 사장 영애에게서 접시를 빼앗아 들었다.

“제가 할게요. 사장님은 쉬세요.”

알바생 남주는 우리에겐 보여 주지 않던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접시를 챙겨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들의 달달한 업무 환경을 보다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주인가? 부럽다.”

“그러게요. 우리 사장 영애가 악착같이 돈 벌 만하네.”

“얼굴도 예쁜데 다정하기까지 하면 유죄예요. 경비대 불러요.”

영애들은 그 예쁜 커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능력녀X키링남 조합은 로코의 정석. 힐링하기 딱 좋은 소재였다. 잠시 저 커플을 마주했을 뿐인데 가슴에서 당분이 퍼졌다.

나는 사장 영애의 열정을 이해하곤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마들렌을 집던 아리나가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 맞아. 데이지 영애. 빨리 황태자 얘기 좀 해 봐요.”

“우으(네에)?”

“……다 먹고 얘기해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나는 한 입 베어 물던 케이크를 전부 입에 욱여넣어 침묵할 시간을 벌었다.

그날은 캐시에 미쳐 정신없이 삼각관계 에피를 쌓았는데, 하루가 지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더 빨리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미 한껏 미친 사람처럼 굴어 댄 뒤라 수습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엘런과 알렉스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다행이라면 앞으로 그들과 만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알렉스는 가을국으로 돌아갔고, 엘런도 곧 겨울국으로 떠난다. 그들이 열심히 마왕을 토벌하는 동안 나는 #힐링물 남주를 선택하고 [결]을 쳐야지.

구국 영웅들이 열일하는 동안 나는 그들이 지킨 평화 속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소시민 1로 남을 거다.

마음이 차분해진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전하께서 갑자기 찾아오신 거라 저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알렉스 그놈은 내가 흑막이라 믿고 있지만, 나는 겨울국과 마족의 기록을 필사한 기억이 없다.

알렉스의 오해일지, 나도 모르는 내 서사일지 확실하지 않으니 아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아리나가 또 질문할까 봐 얼른 머핀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짜 내가 흑막이면 어쩌지?

상상만 해도 목이 탄다.

나는 다시 커피나 마실 생각으로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익숙한 커피 맛에 눈이 가늘어지는데 띠링, 알람음이 들렸다.

[중세 유럽의 커피 맛을 로그아웃 후에도 간편히 즐기세요.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은 카페, 카X.]

“요즘 광고 물량 대박이네요. 저 오늘만 다섯 편 본 거 같아요.”

내 눈에만 보인 게 아닌지 아리나가 화색이 돈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 두었다.

“12월이잖아요. 원래 연말에는 기업들이 마케팅 비용 남은 거 털려고 광고 많이 태워요.”

붉은 머리의 영애가 피식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아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애, 우리 현생으로 치면 8시간도 안 지났어요. 자꾸 게임이랑 현생을 헷갈리지 말아요.”

“아, 이게 자꾸 헷갈리게 되네요.”

“근데 광고주 의뢰에 따라 광고 노출 빈도도 달라진다고 했는데, 베타 테스트에 광고를 하는 기업도 있어요?”

“이거 진짜 광고 아닐걸요? 베타 테스트 하는 김에 유저들의 광고 스트레스 임계점을 확인하는 거 같아요. 시간당 몇 편까지 수용 가능한지, 광고 보상은 얼마로 책정해야 할지 데이터 수집하려고 우리한테 실험하는 거죠.”

아리나가 영애들의 호기심을 정리했다. 나는 그녀의 전문적인 시선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에나가 소서에 잔을 내려 두며 미소를 지었다.

“현생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런지 가끔은 현생에 있는 기분이에요.”

“응? 전혀 다르지 않아요? 일단 시력부터 편안한걸요?”

청발 영애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시에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강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세요. 아카데미 출신 학생들로 선수가 이뤄진 것도 꼭 영국의 조정 경기를 따온 것 같아요. 우리 사회의 계급과 학연을 반영하는 거죠.”

시에나는 이번엔 옆으로 시선을 틀어 테라스를 응시했다.

“강변 자리나 테라스같이 관람하기 좋은 자리는 돈 좀 있어야 앉을 수 있고. 또 평민 영애들은 금화를 모으려고 아등바등 일하고, 귀족 영애들은 그런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잖아요.”

그녀는 빈 커피 잔을 손끝으로 쓸며 피식 웃었다.

“디자인만 조금 다를 뿐, 자본주의와 경쟁이 제대로 깃든 사회죠.”

“아아, 영애 부정적인 얘기 하지 말아요. 이 즐거운 세상에 왜 현생을 뿌리고 그래요.”

“그러니까요. 시에나 영애, 얼른 카이엘드 팀 세 번째 선수나 봐요. 세상에 등 근육 좀 봐, 저 굴곡에 파묻히고 싶네요.”

나는 조용히 그녀들의 대화를 듣다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엘드 팀이요?”

“네, 조정 경기는 아카데미 팀끼리 겨루는데 카이엘드가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 팀이 전통 강호거든요.”

“의외인 게, 황실 아카데미 팀은 힘이 약해요.”

“뭐가 의외예요? 당연히 그럴 만하죠. 현생으로 치면 카이엘드 아카데미는 체대고 황실 아카데미는 예대니까.”

현실 대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아카데미 분류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도 교육열이 심한가요?”

“귀족가 자제들은 심한 편이에요. 가정교사 영애한테 들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교습을 못 다닐 정도래요.”

“맞아요. 기사 영애들도 단기 알바로 영식들 검술 교습 나간다는데, 한번 다녀오면 몇 달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대요.”

와, 사교육 시장도 있네.

현생을 오마주한 게임 사회를 보며 나는 시에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때, 강변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북부의 미래는 카이엘드 아카데미 안에서!”

기합이 바짝 들어간 아카데미 구호를 듣고 있으니 눈이 흐려졌다.

내 대학 슬로건과 비슷한 구호였다. 조정 선수들 위로 대학 동기들의 모습이 겹쳐진 탓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또 사회에 나가서도 열심히 달리는 그 인생.

캐릭터라고 하기엔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기에 좀 짠한 마음이 밀려왔다.

삐익.

선수들이 모두 배에 오르자 붉은 예복을 입고 있던 사내가 휘슬을 불었다. 그 소리에 선수들이 슬슬 노를 저어 출발선으로 나아갔다.

노가 깊게 수면을 팔 때마다 우렁찬 구호 소리가 계속 따라붙었다.

따스한 봄바람에 스민 소리에 생명력이 가득하다.

나는 넘치는 에너지를 물씬 느끼며 입가에 양손을 대고 소리를 쳤다.

“화이팅!”

영애들의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뉴비 영애, 귀여워 죽겠네. 무슨 야구 개막전인 줄.”

“어휴, 귀족 영애가 왜 소리를 질러요. 캐붕 조심해요.”

그녀들은 장난치듯 나를 놀리며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나는 계속 웃으며 선수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뭐, 어때요! 중세에도 이런 귀족 영애가 한 명쯤은 있었겠죠.”

“그건 그래요.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아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 선수들에게 힘내라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우리가 시끄럽게 구는 게 거슬렸는지, 강변 관객석에서 한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내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짙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부채를 집어 들었다.

“어? 카이엘드 공작도 왔네요.”

그러나 외면한 보람도 없이 아리나의 놀란 목소리가 그 남자의 정체를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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