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엘런과 알렉스 사이에서 미친 사람처럼 굴며 메이저 에피를 긁어모았어도 고작 10캐시를 정산받았는데 상점에서 가장 비싼 아이템은 1만 캐시였다.
아득한 물가에 힘이 빠졌다.
이게 경제적 박탈감인가?
더 서글픈 건 그 레어템들이 모두 품절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영애들 대체 얼마나 부자신 거예요…….
‘남주 교환권’, ‘30분 회귀권’, ‘서사 치트키’, ‘일일 남주 체험권’.
초고가 아이템들은 다 품절 상태였고, ‘재입고 대기 신청’ 버튼만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중 ‘남주 시점 엿보기’만이 품절 임박이라는 붉은 텍스트를 달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리스트를 내려 보았다.
최하단으로 내려가니 영애들이 말했던 ‘AI 연동 메시지 무제한 이용권’, ‘AI 연동 커뮤니티 무제한 이용권’도 있었다.
1캐시짜리 아이템.
1만 캐시 아이템을 보고 저가 아이템들을 보니 영애들의 억울함이 이해가 갔다.
근데 왜 ‘S급 남주 관람권’은 없지?
검색창에 검색을 해 보아도 그 아이템은 찾을 수 없었다.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일단 검색창을 끄고 다시 아이템 정렬 탭으로 돌아왔다.
나는 영애들의 팁대로 제일 비싼 아이템을 골랐다.
품절된 상품들을 제외하면 이 상품이 가장 가격이 높았다.
‘남주 시점 엿보기’
홈쇼핑마냥 ‘품절 임박’ 글자가 번쩍대니 마음이 급해진다.
[‘남주 시점 엿보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상단의 장바구니를 확인한 후, 결제하기를 눌러 주세요.]
장바구니에 들어가니 4천 캐시짜리 아이템 ‘남주 시점 엿보기’ 하나가 담겨 있었다.
결제하기를 누르자 결제 방법이 떴다.
[연결된 계좌가 없습니다.]
[적립된 캐시로만 결제가 가능합니다.]
[보유한 11캐시를 사용해 구매하시겠습니까?]
초라한 내 적립금이 시스템 창에서 반짝였다.
“응. 결제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튜토리얼 창이 팟, 켜지며 결제창에 불투명한 검은 막이 다시 한번 씌워졌다.
[튜토리얼 체험 결제 시 모자란 캐시는 시스템에서 대신 결제해 드립니다.]
기특한 알람이 사라지고 결제 완료 창이 떴다.
[‘남주 시점 엿보기’가 결제되었습니다.]
[‘남주 시점 엿보기’를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아이템 적용할 남주도 없잖아. 슬롯엔 아직 엘런 카이엘드뿐이니까.
“아니, 다음에 쓸래.”
[아이템 사용을 종료합니다.]
[구매한 아이템은 AI 담당자를 통해 언제든 사용 가능합니다.]
아이템 사용할 땐 다시 상점에 접속할 필요가 없나 보네?
아이템 인벤토리는 AI 담당자와 연결된 듯하다.
[쇼핑을 더 진행하시겠습니까?]
캐시도 없는 마당에 괜히 물욕만 생길 것 같아 상점을 종료했다.
“물가 장난 아니네. 또 언제 캐시 모으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루에 1개씩 메이저 에피를 획득한다 해도 1천 캐시를 모으려면 3년이 걸리고, 1만 캐시를 모으려면 30년이 걸렸다.
어쩌면 타임라인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타임라인을 일찍 시작한 영애들이 저 레어템들을 구매한 거겠지.
가난한 뉴비는 부유한 고인물 유저들이 부러워졌다.
그런데 그때 AI 담당자님이 말을 걸어왔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외에도 광고 감상으로 캐시 적립이 가능합니다.]
광고 감상?
[광고 1편 감상 시 0.5 캐시를 적립해 드립니다.]
뭐지, 이거 설마 광고 보고 캐시 받는 그건가?
나는 찜찜한 눈으로 허공을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광고는 어떻게 감상하는데요?’
[광고 모드를 ON 하시면 자동 스트리밍 됩니다.]
[광고주의 요청 물량에 따라 노출되는 일일 광고 수가 조정됩니다.]
광고주가 있어야 광고를 볼 수 있다는 뜻이군.
[광고 감상 모드를 ON 하시겠습니까?]
거부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ON이지.
그렇게 나는 광고의 세계로 한 발 들어서게 되었다.
***
따사로운 햇살이 들이찬 침대.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몸을 돌아누웠다.
이불 냄새 되게 좋네.
이 게임 은근히 디테일하단 말이야.
기분 좋은 향기에 나른한 숨을 흘리는데, 발랄한 음악이 들려왔다.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상태창이 반짝이며 익숙한 플라스틱 병을 보여 줬다.
[하루 종일 기분 좋은 향기. 초고농축 다X니.]
……잠이 덜 깼나?
졸린 눈을 깜빡이는데 다시 한번 귓가에 시스템 알람음이 울렸다.
[광고 감상 보상 0.5 캐시가 적립됩니다.]
상태창이 사라진 허공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먼지만 부유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깨달았다.
아, 이거 광고였어?
생동감 넘치는 광고에 놀란 나는 이불에 코를 파묻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와, 가상현실 게임은 광고도 다르구나.
나는 플랫폼의 기술력에 감탄하며 일어나 목욕을 하러 갔다.
사용인들이 채워 준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히 풀어지는데, 사용인이 하얀 병을 가져왔다.
“새로 들여온 장미수예요. 오늘은 이걸로 머리를 감겨 드릴게요.”
“고마워.”
달콤한 바닐라와 매혹적인 장미가 뒤섞인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뜨며 익숙한 샴푸 통을 보여 줬다.
[누구나 돌아보게 만드는 머릿결. 미X센 모이스처 하이드로 워터풀 샴푸. 로즈&바닐라 향 출시!]
나는 촉촉이 젖은 내 머리칼을 내려다봤다.
이것도 광고였니?
“아가씨 왜 그러세요? 마음에 안 드세요?”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주던 사용인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니야. 마음에 들어.”
그냥 좀 몰입감이 깨져서요.
[광고 감상 보상 0.5 캐시가 적립됩니다.]
몰입감 좀 깨지면 어때요.
광고 계속 틀어 주세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캐시는 생각보다 빠르게 쌓였다.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꺼내는데 또 한 번 알람음이 들렸다.
[노트북은 역시 엘X. 초경량 노트북!]
인생 대충 살자.
과일 로고 박은 노트북 협찬하면서 국산 노트북 광고하는 시스템처럼.
나는 피식 웃으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오늘도 평화로운 커뮤니티.
늦은 오전에 들어가니 벌써 새로운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댓글이 많이 달린 글이 하나 있었다.
제목: 봄국 조정 경기 구경 가시는 분? [47]
조정 경기?
배 타는 스포츠?
『봄국에는 대표적인 명물이 세 가지 있죠.
사시사철 따뜻한 봄 날씨, 사계국 명장이 모인 에즈히나 디저트 거리, 에즈히나 강변 조정 경기.
봄국 영애 여러분! 드디어 그날이 돌아왔습니다.
에즈히나 강변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스포츠, 황실 배 조정 대회가 다음 주에 열립니다.
남주들의 우람한 팔뚝을 멋진 스포츠 정신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카페 큐비즘에서 테라스 자리를 선착순으로 예약받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영애들 자리 빼놓을 테니까 DM 주세요(합장 이모티콘)』
┗ 이 영애 또 영업 나오셨네 ㅡㅡ 일 좀 대충해요 ㅡㅡ 걱정 돼 진짜 (한숨)
┗ 영애는 현생에서도 엄청 잘나갔을 거 같아. 영애가 내 상사였으면 나 진짜 퇴사했을 듯 ㅜ-ㅜ
┗ 글쓴이: 물들어 올 때 바짝 벌어야지! 나 최근에 새로 들어온 알바생 슬롯에 추가했는데 #역키잡이라 돈 많이 벌어야 해. 울 귀염둥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주려면 내가 힘내야지 ㅠ^ㅠ
┗ 참사랑에 아침부터 가슴이 따뜻해지네요. 계좌 불러요 영애, 후원 들어갑니다.
┗ 글쓴이: 신X은행 101-XXX-(*현생 정보 언급으로 부분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 아니 영애; 왜 현생 계좌를 부르고 있어;;
┗ 글쓴이: 평민이 어떻게 중세 은행에 계좌를 터 ㅜ ㅜ 베니스의 상인 찍을 일 있나... 내 피와 살은 소중하다구...☞☜
스포츠 경기도 있고, 계좌도 있고 여기 정말 별게 다 있구나.
뭔가 현생 같네.
기묘한 기분에 팔을 쓱쓱 매만지는데, 메시지가 수신됐다.
아리나 영애였다.
[아리나: 영애! 우리 봄국 단톡방에서 조정 경기 언제 보러 갈지 얘기 중인데 영애도 들어올래요? :)]
내가 혼자 갈까 봐 챙겨 가려고 연락해 준 것 같다. 따뜻한 사람들.
나는 훈훈한 마음을 삼키고 얼른 답장을 보냈다.
[초대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아리나: ㅇㅋㅇㅋ 잠시만요]
몇 초 뒤, 나는 단체 채팅방에 초대됐다.
[시에나: 영애 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아리나: 데이지 영애 어제 황궁 갔다면서요 ㅋㅋ 조정 경기 때 그 썰도 좀 풀어줘요 ㅋㅋㅋㅋ]
[앗 별거 없었는데. 그래도 궁금하시면 얘기해드릴게요!]
[라리사: 헐, 울 뉴비 영애 겸손한 거 봐! 황태자 캐를 잡아 왔으면서!! ㅇㅁㅇ]
[아리나: 그니까여 ㅋㅋㅋㅋㅋㅋ 뉴비 영애 은근 남주 복 좋아ㅋㅋㅋㅋ]
[아리나: 어쨌든 우린 바로 타임워프 쓸 거니까 영애도 얼른 비에른한테 허락받고 따라와요!]
[타임 워프요?]
[아리나: ㅇㅇ 시에나 영애가 테라스 자리 예약했다는데, 일주일 기다리기 지루해서 지금 가서 보려고요ㅋㅋㅋㅋ]
다 같이 미래 이동이라니.
이런 설정은 처음이라 눈이 흐려졌다.
[시에나: 뉴비 영애, 좀 이따 봐요~]
헉, 벌써 가는 거야? 나도 갈래!
나는 후다닥 일어나 허락을 받으러 비에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