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황태자 전하. 무례하게 들릴까 걱정되지만, 어떻게 여쭈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이렇게 묻는 걸 용서해 주세요.”
“편히 물어도 돼.”
알렉스가 허락하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창밖으로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는 이에테르 공작저가 보였다.
나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혹시 미치셨나요?”
나의 안전지대, 공작저에 도착하기 무섭게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말 많이 듣긴 해.”
나는 빛의 속도로 마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러셨구나. 죄송한데 제가 미친 분들이랑 상성이 안 맞아서요. 앞으로는 뵐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내가 아는 예의를 최대한 끌어모아 허리까지 숙이며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런데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지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레이디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
“웃기려는 게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전하.”
“이래서 엘런이 레이디에게 끌리나 봐.”
“카이엘드 공작님은 저한테 끌리는 게 아니라…….”
키워드 때문에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혼자 그러는 거고!
그러나 이걸 설명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함에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이 어찌나 센지 귓가에서 살랑대던 머리칼이 팔랑였다.
스르르르.
그런데 갑자기 내게 슬로우 모션이 걸렸다.
따스한 봄볕에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칼이 나풀나풀 가슴께로 떨어졌다.
[감정선 심화를 위해 미모의 포텐이 터지는 순간 자동으로 슬로우 모션이 걸립니다.]
[‘얼굴이 개연성’ 기능 해제를 원하시면 설정에서 해제해 주세요.]
……이런 쓸데없는 디테일 살리지 마.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내 가슴께에 내려앉은 머리칼을 보다 다시 황태자를 쳐다봤다.
그런데 왜인지 알렉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야, 나한테 진짜 반한 거야?
여주 버프 때문에 쓸데없이 자의식이 성장하는 찰나,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스쳤다.
“전하.”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틀었다.
성벽 그늘에 검은 마차가 서 있었다.
아주 익숙한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 옆에 서 있던 엘런 카이엘드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였다. 그림자를 헤쳐 나오며 엘런이 물었다.
“왜 레이디 데이지가 전하와 함께 있는 겁니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엘런이 알렉스에게 두던 시선을 내게로 움직였다.
“미리 말하는 걸 깜빡했군.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누가 좋아해?
왜 당연한 말을 하나 빤히 쳐다보는데, 엘런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가 원한다면 질투 같은 건 언제든 해 줄 테니, 다음엔 그 점을 고려해 줬으면 좋겠군.”
“…….”
황태자의 개소리를 피해 집에 도착했더니 더 큰 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스로 이성을 찾은 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질투하시라고 이러는 거 아니고요. 황태자님이 갑자기 찾아와서 황궁에 가자고 부탁하신…… 아니, 근데 약속이라니요?”
무슨 약속?
엘런이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단호히 말했다.
“데이트 3번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는 그제야 그의 기괴한 데이트 신청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됐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거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말했는데.”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엘런은 내 말에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거로 넘어가지.”
“아니,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정말 못 들었다니까요?”
“난 말했어.”
“전 못 들었어요.”
“못 들었을 리가. 바로 옆에서 말했는데.”
“정확히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는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제 입가를 매만졌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레이디는 다시 듣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불길한 기분이 든다.
“그래, 그렇게 듣고 싶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
웃음을 거둔 엘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해서 부탁하는 거니 부디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하하.”
엘런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뒤에서 터진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황태자가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미친X 둘 사이에 껴서 제정신이 아닌 내가 흐릿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돌아보자, 황태자가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레이디가 참 고생이 많네.”
너도 그 고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러나 세계관이 정한 불합리한 계급 때문에 대놓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신분제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스크롤을 쥔 손을 꽉 움켜쥐는 것과 입술을 깨물어 튀어나올 욕을 틀어막는 것뿐.
엘런은 그제야 알렉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전하는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전에 말했던 탐색대 말이야. 그것 때문에 봄국 폐하와 논의를 하러 왔지.”
“아.”
무언가 들은 게 있는지 엘런은 한 번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의심스러운 지점을 찾은 듯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레이디 데이지와 함께 계신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야, 레이디 데이지도 그 탐색대의 일원이 될 테니까.”
“안 됩니다.”
알렉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런이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처음으로 뜻을 같이한 터라 나는 놀란 눈으로 엘런을 쳐다봤다.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두다 다시 황태자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겨울국은 위험한 곳입니다.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곳에 레이디 데이지를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엘런, 너 상식적인 인간이었구나?
오랜만에 귓가에 박힌 정상적인 말에 울컥했다.
“엘런,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또 디아나도 있는데 위험할 일이 뭐 있어?”
“사고는 순식간입니다. 검술이나 이능은 그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물이 있는지 모르는데 스스로 방어가 불가능한 레이디를 데려갑니까? 게다가 이에테르가에서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아, 그 허락은 거의 다 받을 뻔했는데.”
알렉스는 아쉬운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네가 말한 겨울국 정보 때문에라도 레이디 데이지를 데려가야 해.”
“아, 진짜! 저 필사한 적 없다니까요?”
나는 내 캐릭터에 무슨 설정이 있든 간에 일단 잡아뗐다.
“필사?”
뒤에서 엘런의 물음이 들려왔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앞에서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알렉스 때문에.
그는 손끝으로 톡톡 마차 문을 두드리다 고개를 기울였다.
“소문 낼 생각은 없었는데.”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엘런이 물어왔다.
알렉스는 엘런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나를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 못 해. 레이디가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
마족의 편서. 그걸 보유하면 봄국에서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 사실을 봄국 최고 권력자 앞에서 폭로했으면서 이제 와 날 걱정하는 척하는 꼴이라니.
정말 한 대만 패 주고 싶다.
게임에 투명 인간 기능이 추가되면 좋을 것 같아. 이상한 슬로우 모션보다도 더 필요한 기능이야.
그 기능 있으면 사람들이 무조건 현질 한다니까?
일단 나만 해도 그게 얼마든지 간에 구매해서 알렉스의 얄미운 입을 마구 때려 주고 싶었다.
[고객의 소리 접수 완료.]
[소중한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업데이트 시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생각하기 무섭게 AI가 내 생각을 접수했다.
하, 이걸 끄면 게임 난도가 높아지고, 켜 두면 생각을 감시당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대화를 듣다못해 상황 맥락까지 싹 읽어 버리니. 특히 메이저 에피소드 판독 기능은 소름이 돋았다.
맞다. 캐시!
나는 현질에 민감한 시스템 반응을 욕하다 아까 받은 캐시를 떠올렸다.
얼른 상점 가서 아이템 둘러봐야 하는데.
나는 초조한 눈으로 두 남주를 흘깃 쳐다봤다. 저 인간들 사이에서 시간을 낭비할 바에 빨리 상점을 둘러보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여기서 어떤 핑계를 대고 벗어날까 고민하는데 알렉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엘런한테 말해도 돼?”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도 엘런이 내 대답을 가로챘다.
엘런은 어느새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두 남주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구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
남주와 서브 남주 사이에 선 여주.
순간,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소설로 볼 때는 짜릿했는데, 상대가 미친놈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내가 얘네한테 매력을 못 느껴서 그런 건지 이 상황이 다 귀찮기만 했다.
떫은 눈으로 엘런과 알렉스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는데 갑자기 시스템 알람이 울렸다.
[메이저 에피소드 ‘남주와 서브남주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주’가 탐지되었습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
나는 상태창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야 이게?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1캐시가 적립됐다. 자본에 약한 나는 이 상황에 흥미가 돌았다.
혹시, 이 상황에서 다른 메이저 에피를 쌓으면 또 캐시가 적립되는 걸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달콤한 호기심이 이내 광산의 금맥을 찾는 욕망으로 변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삼각관계 클리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수금 작업을 시도했다.
“아니요. 전하. 제발.”
내가 말했지만 고막을 파고든 목소리에 닭살이 돋았다.
평생 청순 여주는 못 되겠다고 씁쓸히 자아 성찰을 하며 꿋꿋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마세요.”
나름 처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엘런을 바라봤다.
“카이엘드 공작님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세요. 공작님께 피해를 드리고 싶지 않아요.”
엘런의 눈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찰나 나는 다시 알렉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부탁드릴게요.”
“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렉스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며 눈을 찌푸렸지만 나는 아련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이거 진짜 될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스템의 심사를 기다렸다.
몇 초 후 알람이 울렸다.
[메이저 에피소드 ‘남주를 지키기 위해 서브남주를 선택하는 여주의 희생’이 탐지되었습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