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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7화 (18/208)

17화.

당근색 종이?

나는 내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주황색 스크롤이 주먹 밖으로 빼꼼히 삐져나와 있다.

이동 스크롤을 말하는 건가?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주먹을 흔들었다. 황제와 황태자의 기 싸움 때문에 적막에 휩싸인지라 사락대는 드레스 마찰음이 크게 느껴졌다.

새가슴인 나는 손을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솜털로 고막을 간질이듯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흐아아아아암.”

힐긋 눈동자를 들어 보니 딱딱하게 굳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제 무릎에 딱 박혀 있었다. 정확히는 꼬물꼬물 일어나 제 허리에 착 달라붙는 라리사 황녀에게.

황녀 영애의 커다란 초록 눈이 황제를 향해 올라갔다.

그녀는 말없이 황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결국, 황제가 먼저 물어왔다.

“라리사, 무슨 일이지?”

황녀 영애는 굉장히 서글픈 눈으로 하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연분홍색 입술을 달싹이던 황녀 영애가 울먹이며 말했다.

“라리사 배고파…….”

뭐?!

배고파?!

나는 당장 황궁 요리사를 잡아와 황녀 영애 앞에 바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 기분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닌지 황제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천천히 짓씹듯 읊조렸다.

“배가…… 고프다고?”

황제가 무어라 명하기도 전에 단상 아래에 있던 시종과 근위병들이 허둥대며 패닉에 빠졌다.

“당장 황녀님의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경! 황궁 요리사에게 지금 식사를 준비하라고 전하시오!”

“예! 제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마치 전시 상황처럼 그들은 분주하게 발을 놀리며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순간 황제의 시선이 단상 아래로 흘러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됐다. 내가 직접 에메랄드 홀의 식당으로 가지.”

뚜벅뚜벅.

고막을 깊게 짓누르는 발걸음 소리를 따라 숨 막히는 위압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그는 황태자와 내가 있는 1층까지 내려왔다.

“폐하.”

스쳐 가는 발걸음을 잡은 건 알렉스였다.

알렉스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가벼웠으나, 사람을 멈춰 세우는 힘이 있었다.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필 걸음을 멈춘 그가 내 옆에 딱 서 버렸다.

‘……폐하, 한 걸음만 더 지나쳐 주시면 제가 좀 편하게 대기를 할 수 있을 텐데요.’

나는 황태자와 황제의 사이에 갇힌 채 소심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왔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답지 않은 대화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황제는 매정하게 알렉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사계국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황녀님의 식사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죠.”

알렉스가 비꼬듯 나긋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황제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하하.”

아, 아니다. 웃음소리였다.

황제가 나른히 웃으며 라리사 황녀를 반대쪽으로 옮겨 안았다.

“알렉스 황태자, 그대가 아직 어려 모르는 듯하니 내 친히 알려 주지.”

그는 알렉스가 이해하기 쉽도록 어절을 하나하나 끊어 발음했다.

“이. 세상에. 라리사의. 식사보다. 중요한 건. 없다.”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는지 이따금 사락사락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우리 황녀 영애님 제대로 부둥받고 지내시는구나.

나는 황녀 영애의 뛰어난 조련 스킬에 감탄하며 울컥한 마음을 눌렀다.

황녀 영애님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녀의 조련을 받을 수 있는 저 황제 놈과 신하들이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나도 황녀님 오물오물 밥 먹는 거 보고 싶어!

나는 황실의 주접을 질투하며 속으로 심장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황제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신지 모르겠습니다.”

웃음이 어린 맑은 목소리.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황제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황녀 영애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빠아, 이짜나요. 라리사 천사 언니랑 같이 밥 먹고 싶어요.”

수줍음 가득한 속닥거림이었다.

천사 언니가 누군지 모르지만 참 부럽다, 라는 생각을 하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혹시 나 얘기하는 거 아니야?

“에스텔라 영애를 말하는 건가?”

황제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흠칫하는데 “응!” 하는 귀여운 대답이 들렸다.

이내 황녀 영애님의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라리사는 예쁜 언니가 무지무지 조아요.”

귓속말하는 거 같은데 다 들렸다.

나는 절박하게 고개를 젓고 싶었다.

아니에요 영애!

영애 아버님에게는 분명 #폭군 키워드가 있어요.

저는 절벽 엔딩을 치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우리 둘이 따로 먹어요.

그러나 황녀 영애에게 내 마음이 들릴 리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한마디를 덧붙이며 쐐기를 박았다.

“히힛, 천사 언니가 라리사 엄마 해 주면 좋겠다아아.”

아, 설마…….

황녀 영애님 혹시 #베이비메신저?

나는 그녀의 키워드를 가늠하다 생각에 빠졌다.

#베이비메신저면 아버님보다 황녀님과 엮일 일이 더 많은 거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 황녀 영애의 제안이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저 아버님은 잘생겼고, 돈 많고, 권력의 정점에 서 계시잖아?

여주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 남주로 선택하면 절벽 엔딩도 없을 거 같고.

무엇보다 저 아버님을 남주로 선택하면 황궁에서 황녀 영애님을 끼고 살 수 있어!

슬롯에라도 넣어 둘까?

슬롯에 넣으면…… 아.

행복 회로를 돌리던 나는 생각을 멈췄다.

내게 남은 키워드가 떠오른 탓이다.

#여공남수 #역키잡.

당연히 애까지 있는 저 아버님을 내가 #역키잡 할 수는 없을 테고, 분명 #여공남수가 활성화될 텐데.

#폭군을 수로 깐다라…….

폭군을 홀린 수많은 요부의 설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녀들의 최후도.

비록, 죽지는 않더라도 #피폐물의 길을 걷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빙의한 지 2주 좀 지났다고 이제 슬슬 남주 안에 자리한 키워드가 예상되기 시작한다.

여기 널린 게 #힐링물 남주인데 굳이 #피폐물 남주를 슬롯에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를 거절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곧 들려온 황제의 말에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황제가 이름을 호명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세요.]

을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황제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는 황녀 영애를 바라봤다.

하얀 은발에 녹안을 가진 부녀가 꽃사슴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윽!”

이거 누가 삽화로 좀 따 줘요. 나 그 엽서 살 거야. 굿즈 출시해 줘.

느른히 고개를 기울이던 황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텔라 영애만 괜찮다면 함께 식사하지.”

나는 순간 황제의 동굴 목소리에 홀려 그 손을 잡을 뻔했지만, 손에 쥔 스크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린 채 황제의 손을 내려다봤다.

‘혹시 황제의 청을 거절할 수 있나요?’

[네, 목숨을 걸면 가능합니다.]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해맑은 담당자님의 목소리에 나는 흐린 눈으로 황제와 황녀 영애를 바라봤다.

눈치 빠른 황녀 영애가 내 표정을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검지와 엄지를 딱 붙였다.

돈을 형상화하는 보디랭귀지였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손짓에 당황하는데 눈앞에 상태창이 켜졌다.

[메이저 에피소드 ‘권력자에게 가족으로 간택 받은 여주’가 탐지되었습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획득 보상으로 1캐시가 적립됩니다.]

메이저 에피소드?

[랭킹 객관성 확보를 위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에피소드 1천 개를 선정하여 ‘메이저 에피소드’를 AI 심사 기준으로 활용합니다.]

[대사나 상황을 감지한 후 ‘메이저 에피소드’를 판별합니다.]

‘……아니 AI 담당자님. 메이저 기준이 뭔지는 아세요?’

[메이저 에피소드 선정 기준은 에피소드 ‘인용 작품 수’와 ‘인용 작품의 평균 연독률’입니다.]

바로 답이 돌아온다.

확신 넘치는 담당자님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관 권력자에게 가족으로 간택 받는 주인공을 생각해 보니, 여러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스친다.

새엄마, 새언니, 양녀, 며느리까지. 수많은 로판 명작 속 에피소드를 떠올린 나는 소름이 돋았다.

와, 정말 다 재밌는 작품들이었어.

이 게임 진짜 사전 조사 열심히 했나 봐. 메이저 에피를 1천 개나 뽑았다니.

놀란 눈으로 상태창을 보는데 낯선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캐시는 뭐야?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 보니 처음 2만 5천 자 달성 보상 아이템을 받을 때, 캐시 뽑기권이 있었다.

이 세계의 화폐 단위는 골드, 실버, 쿠퍼.

캐시는 통용되지 않았다.

아마도 캐시는 시스템 통화인 듯하다.

캐시에 대한 생각을 곱씹기 무섭게 알람이 들렸다.

[축하합니다! 첫 캐시가 적립되었습니다.]

[캐시 사용을 위해 ‘상점’을 방문하겠습니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상태창이 상점 방문을 권했다.

상점에 가면 이 사람들을 두고 사라지게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상점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상태창을 무시했다.

근데 1캐시라니?

보상 액수 한번 소심하다.

시스템 물가를 걱정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알렉스가 어느새 내 앞으로 한 발 나와 나를 제 뒤로 가린 탓이다.

알렉스의 시선이 황제를 향하다 그가 내민 손에 떨어졌다.

“폐하, 레이디 데이지는 제가 황궁에 모셔 온 손님입니다. 청을 거두어 주시지요.”

모셔 온 손님이 아니라 스크롤로 낚아 온 제물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알렉스가 희한한 소리를 지껄였다.

“제가 왜 무리해서 레이디 데이지를 제 곁에 두고자 폐하께 청을 올리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알렉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레이디 데이지를 좋아합니다.”

……네가 나를요?

내 머릿속 물음에 답하듯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이 자식 지금 내가 황제랑 엮이면 탐색대 못 들어갈까 봐 저러는 거지?

기가 막혀 헛숨을 흘리는데 알렉스가 다시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미꽃처럼 화려한 청년이 제 외관만큼 매혹적인 목소리로 나긋하게 부탁했다.

“부디 제가 폐하를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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