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4화 (15/208)

14화.

심각하다. 이건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빡이던 나는 오후 햇살이 스민 캐노피 천을 바라봤다.

은발 벽안.

신비로운 분위기.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완전 내 취향이잖아.

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AI 담당자님, 저 첫눈에 반한 걸까요?”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솔직히 그 남주 누군지 알잖아요. 알려 주세요.”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도 못 해 줘요? 담당자님 신경망에는 그분 정보가 있을 거잖아요.”

[…….]

남주 정보는 내 슬롯에 있어야만 조회가 가능했다.

일주일 내내 AI 담당자님을 졸라 봤지만, 그는 슬롯에 없으니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내가 끈질기게 구니까 와이파이도 없는 세상에서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척을 하고 있다.

‘찾아보라고 했으면서 대놓고 ‘얘가 S급 히든 남주임.’ 해도 돼요?’

‘이렇게 쉬우면 흥미가 팍 식는다니까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빨리 찾고 조기 완결 치는 게 나아요.’

‘바로 [결] 치고 데이터 왕창 드릴 테니까, 얼른 정보 좀 줘 봐요.’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기계랑 인간이 싸우면 무조건 기계가 이긴다.

인간은 물리적 공격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정신적 공격에 무너질 거다.

우리는 저 견고한 뻔뻔함을 절대 이길 수 없다.

나는 오래 누워 있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몸을 웅크려 누웠다.

손을 뻗어 침대 아래 숨겨 둔 노트북을 꺼내 커뮤와 메신저를 켰다.

AI가 저런다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설원 속 앙상한 하얀 나무 숲, 그 앞으로 높이 뻗은 얼음산.

온통 새하얗던 그 세상은 분명 겨울국이었다.

나는 다시 떠오른 그 남자의 얼굴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내 취향이야.

솔직히 그런 미모라면 급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난 얼빠니까.

어쨌든 히든 남주 후보로 오를 정도면 중요한 캐릭터겠지?

분명 이 세계에 그에 대한 정보가 뿌려져 있을 거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겨울국 난민들을 만날 계획까지 세웠다.

“오…… 봉사 활동도 있네?”

커뮤를 뒤져 보니 ‘겨울국 재건 협회’에서 주최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팁이 있었다.

게시물을 정독하던 나는 순간 어깨를 떨었다.

가을국에서 들었던 황태자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겨울국 황족 대가 끊긴 덕분에 황족 노릇하면서 대접받고 있는데, 황녀가 깨어나면 다시 외교권이나 기사단 통솔권을 황실에 반납해야 할 테니.”

흠. 촉이 온다.

흑막의 촉.

흑막 롤이 확실해 보이는 ‘겨울국 재건 협회’. 그 이름이 주는 위화감에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세계관 흑막이니 위험할 거 같으면서도, 또 엄청 매력적일 것 같은 이중적인 느낌.

아, 로판 세상이라고 너무 로판적 사고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흑막이 멋질 거라는 편견을 버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근슬쩍 ‘겨울국 재건 협회’ 건물에서 진행하는 봉사 일정을 체크했다.

가장 가까운 일정은 12월 28일.

아직 멀었네?

그전에 다른 정보도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최근 게시물로 돌아왔는데, 눈에 띄는 게시물이 하나 있었다.

제목: ‘내집내공’ 연말 콘서트 신청곡을 받습니다 ^0^ [124]

불과 30분 전에 올라온 글인데 벌써 댓글이 124개나 달려 있다.

……연말 콘서트?

진한 현생 냄새를 풍기는 단어에 나는 흐린 눈으로 게시물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영애님들, 편안한 오전 보내고 계신가요?

매해 연말, 영애들과 즐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 내 집에서 내 공연을 준비하는 바바라 루베르 영애입니다.

D-63!

바로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생에서 즐기던 내 플레이리스트가 가물가물한가요?

매년 연말, 당신의 최애 곡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지금 바로 신청해 주세요! (대충 찡긋 이모티콘)

늘 그랬듯 제가 아는 노래면 코드 따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드리고 모르는 노래는 메시지로 자료를 요청드릴 예정입니다.

(자료는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한 녹음 파일입니다. 전달 주시면 최대한 비슷하게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럼 댓글로 올해 마지막 날 듣고 싶은 영애들의 인생 노래를 달아 주세요!

올해는 작년과 달리....』

나는 글을 읽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흥의 민족 DNA를 버리지 못한 영애들이 매년 연말에 자체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다.

심지어 공연 기획자가 이 세계관의 아이돌, 유명한 프리마돈나 영애였다.

프리마돈나가 여주 버프를 받고 K-POP을 부른다?

현생 그리워하던 영애들 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30분 만에 124개의 댓글이 달린 이유를 납득했다.

┗ 아X유!!!!! 우리 언니 목소리 까먹을 것 같아요 ㅠㅠㅠ ‘나이트 레터’ ㅠㅠ 제발 제발 뽑아 주세용ㅜㅜ

┗ ‘마가린’! ‘마가린’ 듣고 싶어요ㅜㅜㅜㅜ

┗ ‘마가린’ 받고 ‘스프링 데이’도 신청합니다

┗ 저는 ‘다음 단계’ 추천♥

멜X TOP 100 차트마냥 익숙한 노래들이 댓글 창을 점령했다.

나는 익숙한 노래 제목들을 하나하나 읽어 갔다.

프리마돈나 집 안방에서 펼치는 현생 덕질이라니.

참나 이 사람들. 열심히 남주 찾고 완결 낼 시간에 이렇게 놀면 어쩌자는 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타이핑을 했다.

┗ 저도 마가린 ♥> <♥

어쩌긴, 행복한 빙의 생활 완성이지.

나는 바로 공연 참석 신청을 하고, 프리마돈나 영애의 집 주소를 받았다.

“아, 맞다…….”

비에른한테 뭐라고 말하고 외박하지?

아아, 이광필 씨한테 외박권 얻어 낸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그 노력을 또 해야 해?

나는 심각하게 그 걱정을 하다 커뮤에 겨울국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문의했다.

글을 올린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조언들이 많이 쏟아졌다.

그러다 이 세계에도 조선왕조실록 비슷한 황실 기록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우리 집에 놀러 와! 겨울국 난민들이 가져온 겨울국 황실 대화 기록집 1부 있어. 영애 빌려줄 게 ㅇㅅㅇ!

오, 대체 어떤 집이길래 저런 국가 보물을 가지고 있는 걸까?

┗ 고마워 영애! 나 지난주에 데뷔당트 무도회 갔는데 거기서 만난 사이라고 하면 할까?

┗ 내가 아직 어려서 데뷔당트를 못 가서 ㅠㅠ 그냥 봄국 황성 올 일 있음 연락해! 우연히 만난 척 도서관 데려가 줄 테니까 :D

황성……?

┗ 영애 황성에서 살아??

┗ 웅웅. 나 황녀야!

어쩐지 집에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게 수상하다 했더니 황녀 영애였구나.

남주를 찾으려다 황녀랑 친구 되는 전개라니, 나 아무래도 로판에 잘 맞는 사주 같다.

팔자가 미쳤다.

……아니, 잠깐만.

봄국 황녀면 그 초대박 히트작 ‘회귀한 김에 아빠를 구하겠습니다’ 여주잖아?!

타다다다다다다다닥.

┗영애 ㅠㅠㅠㅠ 저 정말 영애 팬이에요 ㅠ-ㅠ!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저희는 운명인가 봐요 ㅠㅠㅠㅠ 지금 바로 타임 워프해서 날아갈 테니까 좀만 기다ㄹ.......

똑똑.

노크 소리에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데이지.”

하얀 나무문 너머 비에른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나는 시선을 미끄러뜨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한참 집무 볼 시간 아닌가? 무슨 일이지?

나는 대충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소파에 앉았다.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어온 비에른이 내 앞에 앉았다.

그는 어쩐지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왜 저러나 싶어 움찔하는데 비에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 찾아왔으니 응접실로 나가 봐야 할 것 같다.”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하지?

나는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아니. 나 말고 데이지, 네가 가야 할 것 같다고.”

“저요?”

날 찾아올 사람이 있나?

동방예의지국 국민은 남의 집에 가기 전에 연락하는 예의를 갖추었다.

영애들이 방문하는 거라면 분명 메신저로 먼저 말을 해 줬을 텐데 그런 연락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중세 귀족가에 방문하면서 현대인만도 못한 예의를 가진 인간이 누구야, 대체?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데 비에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널 데리러 왔어. 지금 당장 입궁하라고 하는데 데이지 너 혹시…….”

나는 의아한 눈으로 비에른을 올려다보았다.

비에른은 제 목덜미를 쓸며 물었다.

“가을국 황태자와 아는 사이니?”

“모르는 사인데요.”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단답이 나갔다.

“모르는 사이인데 봄국까지 왔다고?”

“……황태자가, 아니 황태자님이 봄국에 왔다고요?”

그놈이 왜?

아니,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고 여길 와?!

순식간에 차오른 물음표가 머릿속을 빼곡히 메웠다.

비에른이 나보다 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가을국 황태자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황제 폐하께 부탁을 했다는데…… 좀 당황스럽군.”

나는 황태자를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아 정말 혼신을 다해 모른 척했다.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신문에서만 뵈던 분인데 왜 저를 만나러 오신 걸까요?”

나는 황송한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놈은 마력을 이용해 날 죽이려 했었다. 그런 놈에게 신상을 들켰다니!

몸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팔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비에른은 좀처럼 의심을 풀지 못했다.

아, 안 돼! 나 그 자식 얼굴 보기 싫어. 거절해 줘, 비에른!

나는 혹시라도 비에른이 날 황궁으로 보낼까 봐, 그가 의식의 흐름을 바꾸도록 그럴싸한 말을 지어냈다.

“호, 혹시 이에테르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 게 아닐까요?”

“이에테르가의 도움?”

순간 비에른의 표정이 차분하게 굳어졌다.

“저는 이에테르가에 소속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절 불러서 돈과 지위로 꼬신 다음에 이에테르가의 정보를 빼 오게 만들려는 게 아닐까요?”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 이간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에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니 당신 왜 이렇게 팔이 안으로 굽어?

미안하면서도 내 말을 무조건 믿어 주니 이 민망한 연기를 이어 갈 용기가 생겼다.

나는 손가락을 매만지며 시선을 떨궜다.

“솔직히 본 적도 없는 분이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는 게 찜찜해요.”

나는 입을 달싹이다 힐긋 그를 한 번 올려다봤다.

비에른은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그런지 고심하는 듯했다.

“그런데 오라버니.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해도 타국 공작가의 사람을 만나는 건데, 일정도 잡지 않고 만나자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요.”

나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것처럼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도 제가 바로 황태자님을 만나러 갔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저뿐만 아니라 이에테르가를 우습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결혼 적령기의 귀족 여성이 외국 황태자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보기 좋지 않았다.

너무 자존심 없어 보이지 않나?

게다가 명분!

약속도 없이 공작가의 사람을 부르는 건 분명 예의 없는 짓이다.

갑작스러운 만남을 요구하면서 그럴싸한 명분조차 준비하지 않았잖아?

이에테르 공작가를 발아래로 내려다봤다는 소리지.

가주인 비에른은 분명 이 부분에서 모욕감을 느낄 거다.

게다가 가을국 황태자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사람.

봄국 황제가 아닌 이상 눈 밖에 나도 욕 한 번 먹고 말 일이다.

비에른은 결정을 내린 듯 차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네 말이 맞아. 내 가문 사람을 만나는데 내게 설명조차 하지 않았지. 그래. 이 만남은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다시 잡는 게 좋겠다.”

다행히 비에른은 내 편을 들었다.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간 후,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을국에 있는 영애들에게 그 미친 황태자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니, 근데 그 자식은 내가 이에테르가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엘런이 이른 건가?

와…… 가벼워.

사람이 그렇게 안 생겨서 한없이 입이 가볍네?

남의 신상을 동의도 없이 넘겨?

침대에 앉은 나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노트북을 꺼내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서운하네.”

창밖에서 따뜻한 바람을 타고 들어온 익숙한 목소리.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한 번 더 밀려왔다.

“정말 최선을 다해 모른 척하더라.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고막에 선명히 새겨진 내 이름.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목에 힘을 주어 천천히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데이지.”

바스러지는 오후 햇살을 맞으며 남자가 창틀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해괴한 소리에 원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황태자는 서운한지 예쁘장한 얼굴로 한쪽 볼을 부풀리며 내게 불만을 드러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나른한 숨을 따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섭섭하네. 난 그날 이후로 레이디 생각만 하다 돌아 버리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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