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3화 (14/208)

13화.

“하아, 하아. 완전 미친 새X 아니야?!”

번쩍 눈을 뜬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몸을 확인했다.

팔에 나뭇가지에 짓눌린 자국이 붉게 새겨져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이템이고 뭐고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힘이 풀린 다리로 다급하게 복도를 걷다 결국 치맛자락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 2층 연회 홀 복도에 이르렀을 때, 아는 얼굴을 만났다.

“데이지 영애! 어디 갔었어요!”

시에나가 나를 보며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도회 끝났어요. 이에테르 공작이 영애 찾아다닌다고 성을 뒤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서…… 영애 괜찮아요?”

내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지,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너머 유리창을 바라봤다.

황성 앞에 마차가 가득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시에나를 바라봤다.

“혹시, 저 때문에 아직 못 가신 거예요?”

“그럼요. 영애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먼저 가요? 지금 아리나 영애랑 로잘린느 영애도 영애 찾고 있어요.”

높은 작위의 캐릭터고, 마음만 먹으면 타임워프를 써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날 기다려 줬다는 사실에 미안하면서도, 마음이 말도 못 하게 안정됐다.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영애, 사실 제가 이벤트 1등 했어요.”

시에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12시 지나면 사라진다기에 바로 히든 남주 관람권을 썼거든요. 지금 막 가을국에서…….”

“그만! 말하지 말아요!”

두서없이 말을 쏟아 내는데 시에나가 다급하게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건 영애가 얻은 상품이잖아요. 그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알려 드릴게요.”

“아뇨, 사실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시에나는 망설여지는지 입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아리나 영애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이 게임은 계속 우리가 순위에 신경을 쓰게 유도하고 있어요. 아이템을 걸고 이벤트에서 줄 세우기 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녀는 내 팔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고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S급이니 TOP 3니 순위에 신경 쓰게 만들어서 욕망하게 만들고, 고통을 참게 하잖아요.”

시에나는 내 상흔을 부드럽게 쓸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너무 괘씸해요. 저는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면서 내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다 [결]을 치고 싶어요.”

연보라빛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맑은 빛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영애만 괜찮다면, 히든 남주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 줬으면 해요. 영애가 정보를 공개하면 다들 그 남주를 슬롯에 넣으려고 난리일 텐데, 그러다 우리 커뮤니티가 망가질 것 같아서 겁나요.”

나는 시에나의 말을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나 역시 20억이면 만족한다 생각했으면서, 막상 이벤트 1등을 하고 좋아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아리나에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혼자 나와서 그 아이템을 사용했다.

그 생각의 아래로 끝없이 파고들면 본능적인 이기심이 보였다.

단순한 랭킹 상승이 아닌, 집단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동물의 욕망.

이 게임은 분명 그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유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 나는 이기적으로 히든 남주에 관한 정보를 숨기려 한 거다.

이제 와 그 정보를 선심 쓰듯 시에나에게 공유하려 했고.

시에나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스템의 농간에 속아 히든 남주를 좇는 게 얼마나 추한 짓인지.

별거 아닌 정보를 귀하게 여기며 고마운 영애들을 나도 모르게 경쟁자로 여겼다.

남주보다 소중한 영애들을!

충격에 빠져 입이 벌어지는데 시에나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내 턱을 닫아 주었다.

“벌레 들어가요.”

시에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시에나는 나보다 오래 이 게임을 해서 그런지 시스템을 경계하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그럼?”

내게 미소 짓고 있는 시에나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비에른을 기다렸다가 같이 갈게요. 가면서 할 얘기도 있거든요.”

사실 비에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세 번째 관람이 남아서였다.

나는 시에나를 더 이상 히든 남주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지금 이 아이템을 끌 수 있다면 그러고 싶으니까.

“그래요 그럼. 아리나랑 로잘린느 영애한테는 제가 메시지 보낼게요. 조만간 또 봐요.”

시에나는 빙긋 웃으며 계단 아래로 몸을 틀었다.

나는 사라지는 시에나를 보다 홀로 돌아갔다.

연회가 끝났는지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쪽으로 테이블이 밀린 탓에 무도회 홀은 휑한 느낌이 났다.

나는 유리창에 기대 벽면 거울을 바라봤다.

화려한 홀 전경과 푸른 드레스 차림의 내 모습이 비친다.

이미 충분히 즐겁고 화려한데 뭘 더 욕심을 내.

마지막에 시에나를 만나서 다행이었다.

욕망이 깃들 뻔한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5년 차.

경력은 무시 못 하는 건가?

뜻하지 않게 빙의 생활 팁을 얻은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과몰입할 뻔했어. 그까짓 게 뭐라고.

히든 남주가 뭐든, 나는 내 취향 남주 찾아서 [결]을 치는 거다.

내 선택만 믿자.

긴장이 풀리며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슬며시 내려갔다.

빠바바바방!

조용한 공기 속으로 팡파르 소리가 파고들었다.

[★S급 히든 남주 후보 3번★]

[60초 후에 S급 히든 남주 후보 3번이 공개됩니다.]

드디어 마지막 관람권이 발동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빨리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그런데 갑자기 훅 밀려온 한기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앗, 차가워!”

나는 차갑게 언 발을 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두툼한 눈 속에 구두가 다시 푹 박혔다.

눈?

얼어붙은 유리구두를 보다 고개를 드니 설원이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나무가 곳곳에 자리한 하얀 설원.

한때, 이곳은 숲이었는지 하얗게 메마른 나무들이 눈에 잠겨 있었다.

나는 시야를 조금 더 멀리 던졌다.

남색 밤하늘을 반으로 쪼개듯 날카롭게 솟은 얼음산이 보였다.

끝없는 설원, 깎아지른 듯한 얼음산, 메마른 겨울나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이 설원은 황실 복도에서 봤던 겨울국의 모습과 비슷했다.

눈에 닿는 새하얀 것들이 달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며 빛을 발했다.

시야가 환히 느껴질 정도로 겨울 공기 속에 달빛이 가득하다.

나는 팔을 감싸 쥐고 빠르게 마찰했다.

“으, 추워…….”

입에서 새나온 뿌연 김이 흩어졌다.

너무 추웠다.

대체 마지막 후보가 누구길래 여기 있는 거야.

나는 이러다 얼어 죽을 거 같아 언 발을 떼어 걷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한 걸음 한 걸음 깨끗한 눈길 위로 내 발자국이 새겨졌다.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시야에 하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박사박.

내딛는 걸음의 수가 늘어날수록 바위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 바위는 사람이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하얀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의 뒷모습.

그는 제 앞에 솟은 위협적인 산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히든 남주 3번인가?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폐부가 얼어붙는지 호흡이 고통스러워 숨이 점점 짧아졌다.

“하아, 하아.”

짧게 흘러나오는 하얀 연기가 흩어지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래도 남자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쪽으로 몸을 트는 모습마저 눈에 담길 정도로.

눈에 반사된 뭉근한 빛이 로브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윤곽을 밝혔다.

나는 얼어붙은 채 느릿하게 드러나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 아래로 흘러나온 은빛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떨어진 유려한 선.

어둠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남자의 윤곽이 밤하늘에 뿌려진 은하수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내 그가 완전히 내게 몸을 틀었다.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그가 역광으로 달빛을 등진 탓에 오히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내 작은 숨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설원.

기묘한 긴장감이 추위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크윽!”

뒤에서 뜨거운 숨이 밀려오며 푹, 고꾸라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마물이 길게 찢어진 입을 벌린 채 쓰러져 있었다.

모든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갔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공포감.

하얀 설원 위로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물의 목 근처에 박힌 얼음덩어리에서 새어 나온 피였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친다.

나는 처음 눈앞에서 마주한 죽음에 패닉에 빠졌다.

가을국 황태자에게 느꼈던 두려움과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였다.

자박자박.

남자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꾸준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도망칠 거라 생각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목적이 아닌 건지. 그의 걸음걸이는 여유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좁아지고 있었다.

사아아아.

저 멀리 산맥에서부터 바람이 밀려왔다.

흔들 나뭇잎이 없는 게 아쉬운지 바람은 가지에 쌓인 눈을 끊임없이 털어 냈다.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바람에 부서진 눈가루가 흩날린다.

순간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얀 눈이 아스라이 흩어지고 있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금빛 머리칼 위로 차가운 눈가루가 몇 점 달라붙었다.

그 감각에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데 내 발끝이 그림자에 파묻혔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남자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수분을 빼앗는 겨울 공기 탓인지, 눈앞의 건조한 시선 때문인지 폐부가 버석하게 말라 간다.

뿌옇게 새나오던 숨이 멎을 즈음 남자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먹잇감을 살피는 늑대처럼 고요히 제 몸을 숙였다.

그를 따라온 겨울바람에 자욱하던 혈향이 밀려났다.

나는 목덜미를 내놓은 어린 짐승처럼 바짝 긴장한 와중에 남자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그는 신이 가장 고운 눈을 모아 세심히 조각한 인형 같았다.

설원으로 빚은 듯 평온한 얼굴.

매끈한 미간 아래 단정히 뻗은 콧날과 그 아래서 부드럽게 꺾인 턱선.

그러나 사선으로 파고든 빛 때문일까.

기이하게도 그 온화한 낯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바다처럼 짙푸른 시선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 진득한 움직임에 모든 감각이 빨려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말없이 손을 들었다.

시야 안에서 하얀 손이 느리게 다가왔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하얗고 긴 손가락이 내 뺨에 닿는 순간, 경고음처럼 시스템 알람이 끼어들었다.

[S급 히든 남주 후보 3번 관람이 종료됩니다.]

***

구겨진 세상이 팽창하며 눈앞에 봄국 무도회 홀을 펼쳤다.

현실감이 없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점차 주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불빛과 하얀 대리석 기둥, 실크 벽지.

그 화려한 것들 속에 자리한 내 모습.

밤하늘을 담은 창 앞에 서 있는 내가, 거울에 비쳤다.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봤다.

누군가 닦아 준 핏방울이 뺨 한쪽에 번져 있었다.

CH2. 메인 시나리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