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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2화 (13/208)

12화.

눈을 뜨니 다시 아까 그 복도였다.

한 번 화면 전환을 해 봤다고 이젠 크게 어지럽지 않았다.

그나저나 뭔가 개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워낙 개소리를 잘 하는 인간이랑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찜찜함을 빠르게 털어내고 다시 홀로 돌아가려 걸음을 틀었다.

몇 발자국 걷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 후보가 3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나 또 이동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라 해도 갑자기 증발하는 걸 들키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막말로 갑자기 마법을 쓰는 여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웹소설 다독으로 인해 가짜 성녀와 가짜 가주의 최후를 많이 봐 온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씁쓸한 시선을 내려 깨끗한 손바닥을 내려 봤다.

달빛에 은은히 반짝이는 무능한 손이 눈에 담겼다.

직업물 영애들처럼 금손을 타고나지도 않고, 기사 영애들처럼 검술이 좋지도 않고, 마녀 영애들처럼 마력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 그냥 손.

웅크린 집순이.

하찮은 내 닉네임을 생각하니 또 울컥했다.

이 손으로 겁도 없이 무슨 구라를 치냐고.

그냥 책이나 보고, 영애들이 올린 영상 짤이나 봐야지.

공작저의 푹신한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트북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내 수식어가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웅크린 집순이 맞네.

시스템이 차별을 하긴 하는데, 할 만한 거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 게임이 내게 준 수식을 납득하고 복도 창틀에 기대앉았다.

벽면 가득한 설원 그림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구름이 지나가는지 그림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주변이 난잡하게 그를 비추든 말든 그림은 고요하다.

그래서인지 아무것도 없는 망국의 정경이 더 고독해 보였다.

나도 망국을 겪어 본 나라의 사람이라 그런지 그 고독한 풍경화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게임 기획자도 한국 사람일 테니 분명 겨울국이 마왕을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는 엔딩을 냈을 거야.

나는 이름 모를 겨울국 사람들을 응원하며 슬쩍 시스템에 정의구현을 강요했다.

빠바바바방!

내 말에 답하듯 이상한 팡파르 소리가 또 들려왔다.

[★S급 히든 남주 후보 2번★]

[60초 후에 S급 히든 남주 후보 2번이 공개됩니다.]

반짝이는 핑크빛 창을 보다 눈을 감았다.

또 시야가 일그러지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아서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사아아, 공기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도가 밝아졌는지 까맣던 눈꺼풀이 살굿빛으로 물들었다.

2번 후보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겠거니 싶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눈앞에 하얀 장막이 있었다.

희뿌연 장막이 흩날리며 뺨을 간질였다.

한 발 물러서 고개를 드니 천장까지 높게 걸린 커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분명 성 안인데 뭔가 이상했다.

봄국 성과 달리 어두침침한 방이었다.

봄국의 성은 하얀 대리석 바닥과 도금된 창틀, 꽃이 수놓아진 실크 벽지가 발린 화려한 성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에스닉 무늬가 직조된 붉은 카펫과 어두운 나무를 얇게 덧바른 정갈한 벽.

그리고.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창처럼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첨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딕풍의 절제된 도시.

커뮤에서 본 가을국 묘사에 늘 들어가던 표현이었다.

여긴 가을국인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다가 잡히면 뭔 일 나는 거 아니야?

순간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 마음이 사라졌다.

아까 엘런을 만났을 때, 일정 시간이 지나니 관람이 끝났다며 시스템이 나를 있던 곳으로 되돌려 놨었다.

뭐, 여차하면 도망쳐서 시간 끌면 되지.

얼굴만 봐서는 내가 누군지 모를 테니 날 찾을 수 없을 거야.

설마 봄국의 웅크린 집순이를 이웃 나라 사람들이 꿰고 있을 리가.

하찮은 별명이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벽에 열린 문이 하나 보였다. 옆방으로 연결되는 중문인 듯했다.

조심스레 문에 다가가자 점차 소곤거리는 소리가 켜졌다.

문에 박힌 둥근 유리 너머로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당구대처럼 생긴 긴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집무를 보는 중인지, 크라바트를 맨 셔츠 위에 갈색 베스트를 입은 단정한 차림이었다.

남자는 서류를 보다 테이블에 놓인 산 모형으로 시선을 내렸다.

눈 덮인 하얀 산 모형이었다.

한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날짜를 말해 주는 김에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도 알려 줬으면 좋을 텐데.”

“전하는 늘 한결같으십니다.”

맞은편에 있던 금발 머리의 사내가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늘 양심이 없으세요. 성녀님이 쓰러지시는 걸 보셨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남자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지금 나한테 욕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늘 한결같으신 모습에 감탄했을 뿐이죠.”

“옆 동네 보좌관들은 황태자가 뭘 하면 ‘대단하십니다’, ‘최고십니다’ 찬양해 주기 바쁘다던데, 나는 어쩌다 이런 악랄한 보좌관을 만나서.”

“그 악랄한 보좌관 덕분에 성녀님 예언도 듣고, 여름국 조력까지 얻어 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인정. 여름국 황제가 직접 토벌 원정대에 참가한다고 할 줄은 몰랐지.”

여름국 황제?

그거 우리 황제 영애 아니야?

보좌관이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제가 설득을 잘한 덕 아니겠습니까.”

황태자인 듯한 남자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촛불이 그려 낸 빛이 그의 금안에 녹아들었다.

그 눈빛이 뜨거운지 보좌관이 허둥대며 목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님께서 계획하신 원정대에 저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데. 실언을 용서하세요. 오늘 여름국 서한을 받고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한동안 머리 좀 식히고 와.”

“억! 말실수 좀 했다고 저같이 유능한 인재를 자르십니까?”

“아니 한 2주 쉬고 오라고. 다음 달에 원정 떠나면 당분간은 못 쉴 테니까.”

보좌관은 입을 달싹이다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도 그 원정대에 참가해야 합니까?”

“그럼 나 혼자 가라고? 이 여린 몸으로?”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제 팔을 감싸 안았다. 그가 어깨를 떨며 약한 척을 하자 보좌관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내 보좌관이 인상을 구기며 안면근육을 떨었다.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으시는 분이 이 무슨 추태십니까? 체통을 지키세요.”

“체통을 지키게 만들어 줘.”

“제가 뭘 했다고요!”

“놀리는 재미를 느끼게 하잖아.”

보좌관이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가끔 부장님을 보며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욕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는 보좌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태자라는 그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하얀 능선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의 손길을 따라 산 모형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눈 쌓인 산 모형이 어느새 짙은 녹음을 이뤘다.

신기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살랑이는 작은 풀들을 바라보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어제 엘런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어.”

“그분은 참. 봄국에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하께 손을 벌리십니까.”

“아니, 내 도움이 필요해서 보낸 게 아니야.”

그가 피식 웃었다.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하더라고.”

보좌관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재밌는 얘기요?”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봄국에 황제 말고도 마왕의 기상 시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더군.”

“누가요?! 신전엔 저희밖에 없었잖아요. 여름국 폐하 쪽 측근을 제외하면 알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봄국에서…….”

보좌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을 분주하게 굴렸다.

“엘런 말로는 자기를 짝사랑하는 레이디가 우연히 신전에 따라왔다가 들었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그건 개소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런이 개소리하는 거 아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구나.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전에 잠입하는 것도, 레이디 혼자 봄국에서 가을국으로 건너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새겨져 있던 눈에서 훅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전문 인력일 거야. 그것도 마왕의 안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날카로운 눈매에서 금빛 눈동자가 서늘히 빛났다.

“겨울국 재건 협회 사람이 아닐까? 마왕 토벌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쪽밖에 없는 것 같거든.”

“그렇죠. 겨울국 재건 협회는 겨울국 황실이 복권되는 걸 싫어하겠죠.”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국 황족 대가 끊긴 덕분에 황족 노릇하면서 대접받고 있는데, 황녀가 깨어나면 다시 외교권이나 기사단 통솔권을 황실에 반납해야 할 테니.”

“흠. 그래도 설마 마왕 토벌을 방해할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에이. 그럼 다 같이 죽는 건데 그렇게 무식할까요?”

“똑똑한 인간들이면 제 손으로 황가를 몰락시키지 않았을 거야. 마족의 유일한 천적을 제 손으로 죽인 멍청한 이들이니 그 자식들이라고 뭐 다를까?”

나는 숨을 멈췄다.

‘마왕의 기상’이 시스템의 개그인 줄 알았는데, 그 사건에 얽힌 정치적 서사가 꽤 복잡해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태자는 자그마한 수풀을 손가락으로 쓸며 희미한 숨을 내뱉었다.

“마왕이 깨면 우리 가을국도 겨울국 꼴이 날지도 몰라.”

그는 결심한 듯 손을 거두었다.

“그러니 방해가 되기 전에 죽여야지.”

죽여? 나를?

무해하기 그지없는 웅크린 집순이를?

“히끅.”

나는 얼른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남자의 눈동자가 확 문가로 덮쳐 왔다.

얇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눈매를 휘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건 발이 얼어서도, 놀라서도 아니었다.

나무문에서 실처럼 돋아난 얇은 나뭇가지들이 밧줄처럼 나를 옭아맸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죽이겠다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해세요! 저는 겨울국 사람이 아니에요!”

“인사를 특이하게 하는 레이디네. 엘런을 짝사랑한다는 그 레이디 맞죠? 반가워요.”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손까지 한 번 흔들었다.

……쟤 백퍼 사이코패스다.

진짜로. 싸패 남주의 냄새가 나.

“그날 신전에 경비를 빼곡히 세웠거든요. 혹시 우리 기사단 쪽에서 말이 새나간 건가 의심도 했었는데…….”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발로 신전에 들어온 게 진짜였나 봐. 내가 직접 결계를 쳐 둔 집무실까지 들어온 걸 보면.”

“정말 오해세요. 저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요…….”

“그럼? 어떻게 들어왔어요?”

……시스템의 이벤트 경품으로?

라고 말하면 백퍼 죽이려 들겠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는데, 황태자는 고요히 내 답을 기다렸다.

그 집요한 시선에 뺨에 수백 개의 가시가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다. 그건 기분이 아니었다.

어느새 목을 휘감은 줄기가 뺨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으악, 시간 꽤 지나지 않았어?

시스템 왜 안 켜져?!

화면 전환을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드디어 반가운 팡파르 소리가 울렸다.

[S급 히든 남주 후보 2번 관람이 종료됩니다.]

나는 허겁지겁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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