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1화 (12/208)

11화.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울리자 빙의 영애들이 눈을 반짝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상할 거라 기대는 안 하지만 이 축제 분위기가 설렜다.

코로나 때문에 페스티벌에 못 간 지 백만 년.

고막을 울리는 EDM과 실감 나는 축제 분위기가 심장을 둥둥 자극한다.

나는 흥분으로 곱아든 손가락을 서로 맞댄 채 상태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빙의 후 처음 경험하는 이벤트라 그런지 어떤 상품이 나오고 누가 상을 탈지 너무 궁금했다.

[3등은 3개의 비자금을 찾은 익명의 영애십니다.]

[3등 상품으로 ‘남주 시점 엿보기’를 드립니다.]

[남주 시점 엿보기

: 남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상황/심리 파악 가능. 1만 자 분량 인정]

3개의 비자금을 찾은 영애가 3등을 했다.

그런데 상품이 신기했다.

남주 시점 전개라니?

외전 같은 건가?

……이 게임 정말 웹소설 컨셉에 진심이구나.

질린 눈으로 상태창을 보고 있는데, 아리나가 갑자기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3개가 3등이래요! 어떡해! 나 1등 하는 거 아니야?”

아리나가 내게 속닥거리며 제 흥분을 드러냈다. 덩달아 나도 흥분돼 웃음이 나왔다.

[2등은 5개의 비자금을 찾은 익명의 영애십니다.]

[2등은 2명으로 공동 수상입니다.]

[2등 상품으로 ‘30분 회귀권’을 드립니다.]

[30분 회귀권

: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 흑역사를 지울 수 있습니다. 단, 사건이 삭제될 시 5천 자가 분량에서 차감될 수 있습니다.]

“꺅!”

아리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홀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꽂혔다.

그녀는 뒤늦게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아닌 척했지만, 빙의 영애들은 다 그녀가 2등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1등은 누구려나?

아리나가 1등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는데 바로 1등 시상이 시작됐다.

[1등은 12개의 비자금을 찾은 익명의 영애십니다.]

[1등 상품으로 ‘S급 히든 남주 관람권’을 드립니다.]

[S급 히든 남주 관람권

: 진짜 S급 히든 남주는 누구? 3명의 남주를 감상하고 진짜 S급 히든 남주를 찾아보세요! S급 히든 남주 후보는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S급 히든 남주 관람권?

나도 그렇지만 다들 꽤 놀란 듯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겹쳐지니 꽤 큰 소음이 됐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저들끼리 눈짓을 교환했다.

아리나 영애가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대박이다. 드디어 히든 남주 보는 영애 하나 생기나 봐요.”

“진짜 궁금하다. 어떤 영애일까? 실물 영접 후기 좀 올려 줬으면.”

나는 뉴비라 그런지 히든 남주를 보여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다.

대충 맞장구를 치면서 빈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올려 두는데 시야가 붉어졌다.

띠링.

[축하합니다! 비자금 찾기 이벤트 1등으로 선정됐습니다!]

[1등 상품 ‘S급 히든 남주 관람권’이 지급됩니다.]

“……?”

나는 분홍색 상태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다 경직됐다.

나?

나야?

내가 1등이라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태창을 보는데 팟, 핑크색 화면이 뒤집혔다.

[‘S급 히든 남주 관람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유효기간이 있는 아이템으로 1시간 후 자동 소멸됩니다.]

“데이지 영애? 괜찮아요?”

멍하게 허공을 보는데 아리나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 저…… 아까 복도에 팔찌를 흘리고 온 거 같아요. 그게 생각나서.”

“팔찌 끼고 왔었어요?”

“네, 빨리 찾아올게요.”

의아해하는 아리나를 두고 서둘러 홀을 나왔다.

[‘S급 히든 남주 관람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유효기간이 있는 아이템으로 1시간 후 자동 소멸됩니다.]

어둑한 복도에서도 여전히 분홍색 상태창이 반짝였다.

“미친!”

진짜로 그 그림들이 전부 비자금이었어?

“와…….”

내 사랑 이광필 씨!

감사해요! 평생 효도할게요!

나는 입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모순되게도 내가 1등 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뿌듯한 성취감에 얼굴 근육이 팽팽히 당겨 올라갔다.

나는 포만감 어린 웃음을 즐기며 은은히 점멸하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좋아, 아이템을 한번 사용해 볼까?

[‘S급 히든 남주 관람권’을 사용합니다.]

생각하기 무섭게 아이템이 개봉됐다.

[S급 히든 남주는 누구?]

[★S급 히든 남주 후보 1번★]

[과연 그가 S급 히든 남주일까요? 60초 후에 S급 히든 남주 후보 1번이 공개됩니다.]

뭔가 익숙한 멘트가 생각나는 안내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됐든 60초 뒤에 시작한다는 거지?

나는 찜찜한 눈으로 상태창을 보며 남주 공개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공간이 휘어지듯 시야가 아찔하게 일그러졌다.

소용돌이처럼 어둠에 빨려 가는 모습에 토기를 느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욱!”

몸이 휘청여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런데 벽이 좀 말랑했다.

더듬더듬.

손을 위로 움직이는데 벽이 단단하게 굳어 갔다.

“레이디는 정말…….”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깊은 한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작님이 왜 여기 계세요?”

나를 한심하다는 양 내려다보는 엘런 카이엘드가 보였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테라스 구석에서 혼자 쉬고 있었는지 그는 벽에 기대 있었다.

난 그를 더듬고 있고.

확 손을 떼어 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터질 듯 열이 올랐다.

엘런이 그런 나를 보며 비꼬듯 피식 웃었다.

“왜, 또 울 생각인가?”

“아니에요. 그때는 오해가 있었어요.”

“오해는 무슨. 날 엿 먹이려고 그런 거잖아.”

그는 믿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주변을 돌아보니 반쯤 열린 붉은 커튼 사이로 춤추는 사람이 보였다.

여긴 무도회 홀 근처 야외 테라스였다.

나는 여기에 어떻게 온 걸까?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가?

근데 갑자기 나타난 거라면 얘는 왜 안 놀라는 거지?

나는 찜찜한 눈으로 엘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작님, 혹시 제가 여기 어떻게 나타났는지 기억하세요?”

“…….”

그는 ‘얘가 또 무슨 수작일까’라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체리알처럼 붉은 눈동자에 금세 피로가 어린다. 또 집착 사생 취급하는 눈빛에 혈압이 훅 올라왔다.

“술을 좀 마셨더니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제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 혹시 아시나 해서요.”

“그날이랑 똑같아. 날 보더니 달려와서 이렇게 몸을 맞댔지.”

“제가 언제 달려와서 몸을 맞댔어요!”

“그랬잖아. 그날도, 지금도.”

나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입을 다물었다.

아, 착각계 싫어. 이거 진짜 끔찍한 키워드야.

엘런은 제가 이겼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번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기쁜 것처럼.

엘런은 난간에 앉으며 나지막한 웃음을 계속 흘려 댔다.

나는 어쩐지 엘런에게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리한 포지션을 바꾸고 싶어 대화 주제를 바꿨다.

“‘마왕’에 대해 아는 사람은 공작님 말고 또 누가 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놀랐는지, 엘런의 웃음이 썰물처럼 싹 사라졌다.

“그게 왜 궁금하지?”

주제를 바꾸려 꺼낸 화제긴 하지만, 진심으로 마왕이 궁금하긴 했다.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마왕의 기상’ 시나리오가 잘 흘러가고 있는지, 이걸 아는 10명의 남주는 또 누구일지.

물론, 굳이 끼어들어 해결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보던 웹소설이 휴재로 끊겨 다음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게 된 그 답답함.

대충 결말이 담긴 스토리 요약본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딱, 그 정도 호기심.

그러나 엘런은 내게 답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에른을 팔았다.

“비에른 오라버니는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비에른에게 말한 건가?”

나는 엘런의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께는 마왕의 ‘마’ 자도 말 안 했어요.”

아니다, ‘마’는 얘기했구나.

마늘의 효능으로 단어가 대체됐으니.

나는 찔리는 양심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살짝 떠봤는데 모든 고위 귀족들에게 공유된 정보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의심 가득한 엘런의 시선을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님이 황도로 오시고, 요즘 황제 폐하를 계속 찾아뵙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궁금해졌어요. 다른 뜻은 없어요.”

“레이디가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여전히 이해 못 하겠는데.”

그는 코웃음을 쳤다.

마치 내가 궁금해하는 척한다 생각하듯.

내가 본인을 좋아해서 가을국에 따라갔다고 생각하는 놈이니 그럴 만했다.

이 기회에 오해를 좀 정리하자.

“당연히 궁금하죠. 마왕의 기상 때문에 황실의 지원을 받으러 오신 거라면, 이에테르가도 마왕 토벌에 소집될 테니까요.”

“듣기로 이에테르가에 들어간 지 일주일밖에 안 됐다던데, 참 대단한 우애군.”

“네. 그게 바로 핏줄의 힘이죠.”

엘런의 비꼼을 받아치자 그가 묘하게 불쾌한 낯을 했다.

“정말 공작님만 알고 있는 건가요? 봄국에는 공작님 말고 아는 사람이 더 없어요?”

머리를 쓸어 넘기던 엘런이 시선을 황성 정원으로 멀리 던졌다.

가만히 무언가를 가늠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도 알고 계셔.”

나는 그 답에 움찔했다.

……엇, 진짜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엘런은 다시 시선을 내게 미끄러뜨리더니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직 봄국에서는 폐하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야.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니,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하거든. 데이지 양도 비밀을 지켜 주면 좋겠어.”

그는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하며 내게 부탁했다.

그 낯섦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런데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냥 부탁하는 건 아니야.”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주에 에즈히나 강변에서 식사나 하지.”

“……예?”

“데이트. 해 주겠다고.”

그는 굉장히 인심 쓴다는 듯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알겠어. 두 번.”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데이지 양은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군. 알겠어. 세 번. 세 번 데이트하지.”

“아니. 됐다고요.”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엘런이 움찔할 정도였다.

나는 이대로 착각계를 종료해 버릴까 하다, 발현될 다른 키워드를 떠올리고는 그 욕구를 꾹 눌렀다.

“비에른 오라버니의 안위가 달린 일인데 그런 걸로 보상을 받을 생각 없어요. 말씀은 금스흐즈믄(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감사한다고 말하려니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좀 놀란 듯 살짝 벌어진 입을 그대로 둔 채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 기막힌 숨을 토하며 웃었다.

“참, 데이지 양은 알 수 없는 사람이군.”

너만 하겠어요?

그 진중한 외모를 그렇게 하찮게 쓸 거면 다른 사람 줘!

“데이지 영애.”

자꾸만 띠껍게 구겨지는 눈을 제대로 뜨려 노력하며 엘런을 응시했다.

그는 입매를 휘며 짧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 목요일 2시에 데리러 가지.”

아니, 너랑 밥 안 먹는다고!

거절하려는데 갑자기 또 시야가 아찔해졌다.

[S급 히든 남주 후보 1번 관람이 종료됩니다.]

“으, 됐어요.”

겨우 거절하는데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부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황성이 어둠에 삼켜지며 엘런의 말이 흐릿해졌다.

“진심으로 내가 원해서 청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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