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리나 영애는 이벤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줬다.
게임 내 이벤트는 로판 소설 설정에서 따오는데 무도회 때는 ‘신데렐라 이벤트’가 열린다고 한다.
“구두 주인을 찾는 것처럼 보물찾기를 해요. 찾는 물건은 매번 바뀌고요.”
로잘린느가 상기된 얼굴로 쿡쿡 웃었다.
“12시가 지나면 아이템이 소멸되긴 하는데, 그래도 ‘신데렐라 이벤트’ 경품이 제일 등급이 높아요.”
“등급이요?”
아는 게 없는 나는 물음표 살인마 그 자체였다.
따스한 영애들은 그런 나를 타박하기는커녕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 줬다.
“1등부터 3등까지 시스템에서 보상으로 초고가 아이템을 줘요. 대신 12시가 지나면 소멸되니까 바로 써야 해요.”
“아하.”
이벤트가 언제 시작하는지, 퀘스트는 어려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영애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호기심을 꾹 눌렀다.
“그나저나 봄국 뉴비 영애는 오랜만이라 너무 반갑네요. 그죠?”
“맞아요. 6개월 만이죠.”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저희도 그렇게 도움받고 적응한 거라 새로운 분 오시면 꼭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아아. 인성에서 빛이 난다.
나는 화기애애하게 미소 짓는 영애들을 보다 조심스럽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게 마지막 질문임. 진심.
“혹시 여기에 영애들과 슬롯 겹치는 남주가 있나요?”
아무리 슬롯 저장이라지만 남의 남자를 뺏는 기분이라 웬만하면 슬롯에 담긴 남주는 피하고 싶었다.
“세상에, 영애 도덕심 무슨 일에요.”
아리나가 감동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로잘린느도 웃으며 내 걱정을 덜어 갔다.
“다른 영애가 슬롯 채갈까 봐 걱정됐으면 무도회에 참석 못 하게 했을 거예요.”
“맞아요. 무도회에 방생된 남주는 암묵적으로 슬롯에 넣어도 된다고 합의된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럼 무도회 밖에서는 조심해야겠네요?”
“뭐, 찜찜하긴 해도 별수 있나요? 그렇게 애탔으면 빨리 선택을 했어야지.”
“어머? 그건 아니죠. 썸 타고 있는데 홀라당 뺏는 건 비양심이지.”
여기서 처음으로 적발 영애와 청발 영애의 의견이 갈렸다.
이 부분은 유저마다 가치관이 다른 듯하다.
어쨌거나 무도회에서는 자유롭게 슬롯 추가가 가능한 거 같은데.
나는 드레스 안에서 발목을 풀며 스텝 밟을 준비를 했다.
가서 맘껏 남주 슬롯을 채워 와야지.
나는 만선을 꿈꾸는 어부처럼 홀에 가득한 남주들을 욕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데이지 영애, 이제 곧 첫 춤 시작이네요.”
나를 포함 오늘 데뷔하는 영애는 3명.
그중 유저는 오직 나뿐이었다.
첫 춤을 끝내면 5분 간격으로 곡 연주가 시작되고, 파트너를 바꿀 수 있게 된다.
저쪽에서 신사들과 담소를 나누던 비에른이 왔다. 그가 내 파트너를 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갈까?”
비에른은 제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이따금 보여 주는 예쁘장한 미소를 달고.
비에른과 홀에 들어서자 느린 곡조의 노래가 나왔다.
둥글게 홀을 돌며 비에른과 춤을 추는데 창가 근처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런 카이엘드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머리부터 발끝으로 툭 떨어지기에 획 눈을 돌려 버렸다.
눈 한번 마주쳤다고 또 어떤 착각질을 해 댈지 벌써 짜증이 났다.
“신경 쓰지 마.”
비에른은 눈치를 챈 건지 몸을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신경 쓰이면 쫓아내 주고.”
농담일 게 분명한데 진지하게 말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도 비에른과 다시 가까워지는 순간 조용히 물었다.
“쫓아내실 수 있어요?”
“물론. 엘런은 내 말을 잘 들을 거야. 세력을 구축하려면 귀족들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세력이요?”
“갑자기 황도에 온 것도, 계속 황제를 알현하는 것도 엘런답지 않은 행동이거든. 자세한 건 모르지만 황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황실을 압박하려면 귀족의 도움이 필요할 테지.”
뭔가 일리가 있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엘런이 황도로 온 게 ‘마왕의 기상’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비에른도 ‘마왕의 기상’에 대해 아는지 궁금해졌다.
“오라버니, 혹시 ‘마늘의 효능’에 대해 들어 보셨어요?”
마왕의 기상에 대해 물으려 했는데 입이 멋대로 마늘 전문 농부처럼 마늘 영업을 시도했다.
[접근 제한 정보는 자동 필터링 됩니다.]
“……마늘?”
비에른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살포시 접었다.
“네. 몸에 좋다더라고요.”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며 별거 아닌 척 둘러댔다.
다행히 그 순간 음악이 멈추고 춤이 끝났다.
얼른 멀찍이 떨어진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박수 소리가 민망한 공기를 덮어 주었다.
그런데 데뷔탕트 첫 춤이 끝나기 무섭게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묘하게 귀에 익은 전자음.
황실 무도회에는 안 어울리지만, 파티에는 찰떡인 경쾌한 비트.
……EDM?
나는 눈을 찌푸리고 허공을 올려다봤다.
곧 그 음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이 좋아하는 랜덤 게임★☆]
상태창에 박힌 별이 오색찬란하게 점멸하며 클럽 조명을 흉내 냈다.
[무도회장에 참석한 영애들과 즐기는 ‘신데렐라 이벤트’! 지금 바로 시작됩니다.]
몇몇 영애들이 탄성을 질렀다가 황급히 제 입을 가렸다.
모두 손목에 워치를 찬 빙의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의 눈앞에도 상태창이 뜬 듯하다.
파트너를 청하는 시간이었지만 영애들 몇 명은 아예 홀 밖으로 자리를 떴고, 몇 명은 창밖을 보는 척하며 술을 홀짝였다.
나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상태창에 집중했다.
이 세계의 사치품, 초고가 아이템은 뭘지 너무 기대됐다.
초조하게 창을 바라보는데 팟, 상태창이 점멸하며 주제를 알려 주었다.
[오늘의 보물찾기 주제는 ‘황실의 비자금’입니다.]
……비자금?
나는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상태창을 응시했다.
기껏해야 사람, 음식, 장식품을 생각했는데.
[욕설 필터링]
[욕설 필터링]
나만 놀란 건 아닌지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필터링 발동음이 들려왔다.
[현재 봄국 황성에는 수십 개의 ‘비자금’이 숨겨져 있습니다. 1시간 안에 가장 많은 ‘비자금’을 찾은 영애 TOP 3에게 랜덤 아이템을 포상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신데렐라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59:59]
“잠시만 실례할게요. 술을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달빛이 너무 아름답네요. 저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 게요.”
홀에 머물던 영애들마저 모두 양해를 구하며 빠져나갔다.
나는 사라지는 시간을 보다 고개를 들어 홀을 빙 둘러보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신의 가호가 깃든 느낌.
높으신 분들이 숨겨 둔 비자금 찾기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일을 잘 아는 전문가의 지인이었다.
서울지방국세청 탈세전담 조사 N국 소속, 세무조사관 이광필 씨.
우리 아빠였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사회적 고됨을 강제로 청취해 온 지 2N년 차.
A 기업의 상속세 징수를 위해 벌인 세무 전쟁, B 기업 재무 담당자의 현란한 탈세 스킬.
듣기 싫어 후루룩 식사 속도를 높였던 과거가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낯선 빙의 세상 속에서 여주 버프 대신 현생 버프를 받게 되었다.
***
해가 잘 들지 않고 사람도 잘 찾지 않는 어둑한 복도.
한쪽 벽에는 아치형 유리창이 하나 있어 복도에 푸른 달빛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 빛이 반대쪽 벽면에 걸린 그림을 비추었다.
나는 그림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중세 유럽 세계관답게 섬세히 세공된 프레임 안에 캔버스 유화가 담겨 있다.
화풍이 비슷하고, 주제 또한 비슷하다.
겨울, 나무, 밤.
모두 약속한 듯 하얀 설원에 자리한 앙상한 나무를 그렸다.
차라리 인물화였다면 황족의 초상화를 그렸겠거니 했겠지만, 풍경화라 의심이 갔다.
그림은 가격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변동이 심한데, 기준조차 주관적이라 크게 차익을 남기기 좋았다.
주식은 갑자기 가격이 급등하면 부정 거래를 의심이라도 하지.
30만 원을 주고 산 그림은 누군가 300만 원으로 팔아도 국민적 관심을 얻지 못했다.
신인 작가가 성공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뿐.
게다가 세법망을 피하기도 좋았다.
대한민국 세법상 6천만 원 이하의 그림과 살아 있는 작가의 그림은 양도해도 세금을 떼지 않는다.
그러니 수천만 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얻어도 안목을 인정받을 뿐 잃는 게 없었다.
주식도 수천만 원 수익을 내면 세금을 왕창 뜯기는데 말이지.
우아하고 안전하게 자금을 확보할 방법인 셈이다.
사실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이라 자금 확보 과정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풀어 주신 썰이 기억에 남았다.
열혈 세무조사관인 이광필 씨는 불의를 참지 못했고, 부정 거래의 흔적을 찾아내 어떻게든 벌금을 물리거나 세금을 징수하곤 했다.
한번은 A 기업인의 재산이 갑자기 훅 늘어 이광필 씨의 레이더망에 걸린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득 증가의 이유는 그림 매매 차익.
추적해 보니 구매자는 바로 그 A 기업이었다.
A 기업은 사내 복지를 들먹이며 로비에 전시할 그림을 샀는데, A 기업 사모님의 갤러리에서 그림 10점을 고가로 구매했다.
냄새를 맡은 이광필 씨는 바로 기업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역시나 A 기업은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금 확보 중이었고, 수많은 비자금 조성 정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이광필 씨는 A기업의 재무팀장이 벌여 온 회계 조작을 발견해 9시 뉴스에 나왔다.
내가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명절마다 이광필 씨가 추석 특선 영화처럼 풀어 대는 썰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자 세무조사관도 늘 골머리를 앓던 분야가 바로 그림과 골동품이었다.
솔직히 정말 심미적 취미인 경우가 많아, 무작정 돈세탁 수단으로 의심하기 어렵다고 했다.
예술은 숫자가 아닌 인간의 감정이 지배하는 영역이니.
그는 감으로 그 애매한 선을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신인 작가의 그림을 시리즈로 잔뜩 구매하는 경우.
값이 올랐다는 소문이 돌면 연작 가격도 모두 반등해, 수익 규모가 배로 늘기 때문이었다.
신인 작가님한테 무슨 민폐냐고 그게.
나는 손을 뻗어 캔버스 천을 만졌다.
‘AI 담당자님, 혹시 화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겨울국의 몰락’ 화가를 찾습니다.]
[엑스트라로 인물 정보 조회가 불가능합니다.]
음. 역시 엑스트라인 건가.
황실 복도에 12개의 그림을 걸 수 있는 능력자인데, 이름 없는 엑스트라라니.
냄새가 나는데.
나는 허공에 떠 있는 타이머를 흘깃 쳐다봤다.
[남은 시간 05:32]
나는 눈으로 12점의 그림을 훑었다.
‘내가 찾은 비자금으로 등록해 줘.’
[‘겨울국의 몰락’ 시리즈 12점을 황실 비자금으로 등록합니다.]
[총 16개의 비자금을 등록하셨습니다.]
그림 외에도 나는 식당 근처에 있던 도자기 화병과 분수대에 달려 있던 청동 인어상을 담았다.
금화 같은 유동성 자산이나 소유한 영지 문서 같은 부동산 자산도 찾고 싶었지만, 무리해서 황실 금고에 들어갔다가 사형당하고 싶지 않았다.
뭐, 수상 못 하면 어때.
초고가 아이템을 받든 안 받든 현실에서 20억 받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기 승 전 20억.
20억만 생각하면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진다.
나는 행복한 발걸음으로 다시 연회 홀로 돌아갔다.
돌아가니 마지막 춤이 끝났는지, 시종들이 샴페인 잔을 올린 접시를 들고 귀족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나는 잔 하나를 챙겨 먼저 도착한 시에나의 곁으로 갔다.
“영애는 벌써 비자금 다 찾으셨어요?”
“아뇨. 저는 어차피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산책하다 왔어요.”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하나도 없었다.
“영애는 아이템 욕심이 없으시군요.”
“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시스템이 자꾸 경쟁심을 자극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1분쯤 남았을 때 영애들이 거의 다 돌아왔다.
아리나도 숨을 몰아쉬며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헉, 영애들, 저 이번에 1등 할 거 같아요.”
“오, 비자금 많이 찾으셨어요?”
아리나는 웃음을 참기 힘든지 입매를 씰룩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녀 영애님 만나서 같이 황제의 비밀 금고에 다녀왔거든요.”
“대박!”
와, 진짜 그 정도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구나.
대단하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박수를 치고 싶었다.
“수표랑 남부 영지 문서 10개를 찾았는데, 황녀 영애랑 반띵해서 5개씩 채웠어요. 비밀 금고에서 꺼냈으니까 이건 백퍼 비자금이에요.”
그녀는 입매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이번에도 남주 교환권 주면 좋겠어요.”
“남주 교환권이요?”
“네. 저번 신년제 이벤트 1등 아이템이었어요. 선택한 남주 바꿀 수 있게 해 주는데, 그거 너무 탐나요.”
“아니, 아리나 영애는 남주 선택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꾸고 싶어 해요?”
시에나가 눈빛으로 쯧쯧 혀를 찼다.
아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부채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눈웃음을 쳤다.
“빙의한 김에 재밌게 놀아야죠. 저는 데이지 영애만 괜찮으면 저기 카이엘드 공작이나 이에테르 공작도 제 남주로 한 번씩 품어 보고 싶어요.”
“전 괜찮으니까 마음껏 가져가세요.”
특히, 엘런 카이엘드 좀 가져가 줘.
[시간 종료!]
그때, 시스템 알람이 울렸다.
[‘신데렐라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유저의 등록 비자금을 대조 중입니다.]
[LOADING…….]
[비자금 대조가 끝났습니다.]
[지금 바로 신데렐라 이벤트 TOP 3 영애의 시상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