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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8화 (9/208)

08화.

[캐릭터 정보 확인 중]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가 슬롯에 추가됩니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의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

직업: 카이엘드가의 가주, 차기 봄국 황실 기사단 총사령관(황제와 협의 중)

계급: 봄국 공작위, 여름국 대공작위

특성: 소드마스터, 대륙 제5의 검

키워드: #집착남 #능력남 #무심남 #냉미남 #절륜남 #동정남 #북부대공 #살인귀 (더 보기)

등급: 남주 선택 후 확인 가능

반투명한 상태창을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절륜남과 #동정남이 어떻게 같이 있을 수가 있지?

그때 몸이 기우뚱하더니 전봇대 마냥 수직으로 우뚝 섰다.

엘런이 나를 떼어 내나 싶었는데, 그는 다시 제 몸을 밀착하며 나를 위협적으로 노려봤다.

몇 초 뒤 엘런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살벌한 목소리가 용암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대의 정체가 뭐지?”

엘런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나를 찍어 누르며 내 얼굴을 뜯어 살폈다.

근데 저 위험한 눈빛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었다.

반말……?

갑자기 짧아진 언사에 기분이 나빠졌다.

엘런은 한술 더 떠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지?”

“네?”

“언제부터 날 스토킹한 거냐고.”

“……예?”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런 식의 접근을 아주 싫어하는데 말이지.”

“이런 식의 접근이 뭔지 좀 설명을…….”

“우연인 척 내 눈에 들려 수작 부리는 접근.”

엘런은 내 말을 끊으며 제가 생각한 접근의 개념을 설명했다.

자의식 넘치는 발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수작을 부렸다고요?”

엘런의 갑작스러운 캐붕에 당황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슬롯에 넣자마자 이놈의 말이 짧아졌다.

나는 다급하게 AI 담당자님을 불렀다.

‘담당자님. 혹시 슬롯을 넣으면 남주 캐릭터가 변하나요?’

[급전개를 막기 위해 남주가 슬롯에 저장되는 순간 유저의 선호 키워드가 활성화됩니다.]

[※선호 키워드는 추후 유저가 다른 남주를 선택해도 무리 없을 만큼만 스토리에 간섭합니다.]

아, 이 게임 너무 변수가 많아.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결국 AI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담당자님, 필터 일시 해제해 주세요.’

[네. AI 담당자 필터를 해제합니다.]

[AI 담당자가 활성화됩니다.]

‘내 키워드가 뭐길래 저놈이 저러는 건가요?’

[유저에게는 20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현재 활성화된 키워드는 #착각계입니다.]

‘왜 하필 착각계가 활성화된 거야!’

[첫 만남에 활성화 가능한 키워드는 전연령 키워드입니다. 남주에게 활성화 가능한 유저의 키워드 대부분은 19금 전개에 적합한…….]

‘조, 조용히 해!’

[키워드 확인을 중지합니다.]

[‘3번은 만나 봐야 인연인지 알지’ 법칙에 의해 3회 만남 전까지 활성 키워드 변경이 가능합니다.]

[변경 가능 키워드는 #역키잡 #여공남수입니다.]

[키워드를 변경하시겠습니까?]

누가 봐도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이 남자를 #역키잡 할 수도 없고, 여공남수를 하기엔 저 남자의 #살인귀 키워드가 걸렸다.

살인귀를 수로 깔고 내가 공이 되려면, 난 얼마나 쓰레기가 되어야 하는 걸까?

……그래, 이게 최선이구나.

나는 조심스레 남주에게 잡힌 팔목을 틀었다.

“죄송합니다. 각하에 대한…… 제 마음이 너무 커…… 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 짧을 말을 하는데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수치스러워!

내가 크게 한 발 물러섰는데도 엘런은 내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개소리를 덧붙였다.

“각하? 역시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군.”

저 가증스러운 놀란 척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아니, 아까부터 확신을 담아 날 스토커로 몰았잖아!

소설을 읽을 때 남주 얼굴 묘사를 보고 나면 남주가 이상한 짓을 해도 납득이 됐다.

솔직히 얼굴이 서사고 개연성이니까.

그래서 여주가 남주 행동에 불쾌해하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내가 여주가 되어 보니 납득이 갔다.

저 오만한 얼굴을 한 대 패 주고 싶어졌다.

엘런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느릿하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왕의 기상에 대해 알 정도면 날 오랫동안 쫓아온 것 같은데.”

아뇨. 5분 전에 보상으로 받은 정보인데요.

“가을국에 따라왔던 건가?”

가을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나는.

나는 애매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팔을 빼내려 애썼다.

혼자 답을 찾은 남주가 입매를 기울였다.

“그래, 신전에 왔을 때 따라붙었나 보군. 거기서 성녀의 예언을 엿들었고.”

‘네 맘대로 해라’라는 평온한 마음으로 엘런의 개소리를 듣던 나는 예언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예언이요?”

……뭐지?

마왕이 깨어날 걸 알고 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엘런의 손에 힘이 풀렸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그러쥐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이지?”

분노가 넘실대는 목소리가 엘런과 내 사이로 파고들었다.

엘런의 시선이 그제야 내게서 떨어져 남자에게로 흘러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에테르가에서 상관할 일이 아니니 빠져.”

“아니, 이에테르가와 아주 상관있는 일인데.”

천사 같은 뒤태를 가진 남자가 나를 제 뒤로 감추며 낮은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따뜻한 목소리가 그간의 설움을 어루만지듯 내 귓가로 스며들었다.

“내 동생에게 사과하게. 엘런 카이엘드 공작.”

나의 사촌 오라버니이자, 나의 자금줄, 나의 빛, 비에른 알폰스 이에테르였다.

나는 외동이라 그런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순간 울컥해서 눈앞이 흐려졌다.

이래서 부둥물 보는구나.

든든한 가족이 있으니까 마음이 힐링 된다.

비에른은 살짝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을 맞추더니 천사 같은 낯을 확 일그러뜨렸다.

내가 울먹이는 걸 보고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아니! 그래서 운 건 아닌데!

당신에게 감동한 거예요!

뒤늦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그는 엘런을 향해 몸을 튼 뒤였다.

엘런도 당황했는지 매끈한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내게 물었다.

“왜 우는 거지?”

“그건 울린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비에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엘런의 물음을 잘라 냈다.

엘런의 시선이 비에른에게 미끄러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울렸다고?”

억울하겠지.

인정한다.

얼른 남주의 오해를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세상에, 저 덩치로 레이디를 울렸나 봐.”

“저 커다란 손으로 레이디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더라고요. 나 같아도 울지. 어휴.”

“어머, 저분 엘런 카이엘드 공작 아니에요?”

어느새 거리로 나온 빙의 영애들이 이쪽을 둘러싸고 바람잡이를 하고 있었다.

영애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는 나만 보이게 한쪽 눈을 윙크까지 하며 유치한 연극을 했다.

그녀들은 내게 무례하게 군 남주에게 화가 난 듯했다.

그 소란에 엑스트라들마저 이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저 신사분이 레이디를 납치하려 했나 봐.”

“저런, 파렴치한! 경비대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한술 더 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 숙덕거림에 열이 받는지 엘런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가만히 있을 건가?”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면.

“날 좋아한다고 다짜고짜 달려든 건 레이디잖아.”

묵직한 비소가 흘러왔다.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이러는 건가? 자존심도 없나 보군, 이에테르가 레이디는.”

“…….”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 새X가 엿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솔직히 착각물은 오해가 맛있는 구간인데 천천히 풀어야지.

나는 언젠가 이 소설을 읽을 미래의 독자의 유희를 위해 벌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엘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응. 그러길래 예의를 좀 갖추지 그랬어.

어깨에 붙은 지점토 키울 시간에 시스템을 이기는 매너를 키워 놨어야지.

속으로 혀를 차는데 머릿속으로 알람 소리가 파고들었다.

[3건의 메시지가 수신됐습니다.]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메시지? 그건 뭐지?

‘……일단 확인해 줘.’

허락하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생각이 파고들었다.

[아리나: 공작 껍데기는 괜찮은데 캐릭터가 좀 이상하네요? 왜 저래?]

[아리나: ㅉㅉ 그냥 버려요 세상의 절반이 남주예요.]

[아리나: 근데 저 금발이 영애 사촌 오빠예요?]

맞아요. 그 사촌 오빠랍니다.

진짜 아쉽다 아쉬워. 내 취향인데 왜 혈연관계인지.

근데 이거 회신은 어떻게 하지?

[아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리나: AI 담당자랑 동기화하면 바로 생각으로 메시지가 가요.]

[아리나: 근데 영애 사촌 오라버니 저분도 남주캐 같은데요?]

비에른이 남주캐?

그럼 뭐 해요. 나랑 연결될 수 없는 사이인데.

[아리나: 전에 가짜 남동생 선택하고 [전] 진입한 영애한테 들었는데, 가족을 남주로 선택하면 자동으로 추가 서사가 활성화된대요.]

추가 서사?

[아리나: ㅇㅇ ‘출생의 비밀’이라고 ‘B급 사건’ 1만 자 추가된대요!]

[아리나: 비에른 괜찮아 보이는데 슬롯 추가해요!]

[아리나: 솔직히 나 같으면 벌써 했다! 저런 용안을 어떻게 가만히 놔둬?]

[메시지 종료. 집중력 보호를 위해 AI 동기화 메시지는 한 장소당 10건으로 수신 제한됩니다.]

아, 야박한 시스템.

정보를 더 듣고 싶었지만, 메시지가 차단된 바람에 나는 다시 앞의 공작들을 보았다.

엘런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햇살이 깃들었던 상큼한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런이 내 어깨너머 어딘가를 보더니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가로등에 기대고 있던 제 몸을 벌떡 세우며 입을 열었다.

“오해를 풀어 주고 싶지만,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군.”

“그래. 멀쩡한 레이디를 스토커로 몰아붙일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닐 테니 이해하네.”

비에른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엘런을 비꼬았다.

천사 같은 낯이라 비에른의 말은 타격감이 컸다.

엘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지 그의 턱 근육이 움찔했다.

그는 비에른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비에른은 참지 않고 그의 뒤통수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카이엘드가의 공식 사과를 기다리지.”

엘런은 비에른에게 고개를 돌린 채 인상을 쓰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게 가문이 나설 일인가?”

“그런 각오도 없이 이에테르가에서 보호하는 레이디를 모욕한 건가?”

“내가 사과할 일은 없으니 기다리지 말게.”

엘런은 진심으로 짜증이 나는지 답답한 숨을 토하고는 뒤를 돌았다.

“어머, 퇴장도 참 졸렬하네요.”

“무례한 사람은 끝인사마저 무례하다잖아요. 사이언스죠.”

빙의 영애들은 주변인 1, 2 역할에 몰입하며 바람잡이를 했다.

엘런은 울컥했는지 걸음 속도를 높였다.

슬슬 양심의 가책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내 키워드 때문에 오해를 했고, 내가 무리해서 옷깃을 스쳐 키워드가 발동한 거니까.

엘런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비에른이 그제야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괜찮아?”

“폐를 끼쳤네요. 죄송해요.”

그 미안한 마음이 곧 비에른에게 집중됐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만든 게 민망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폐는 무슨.”

그는 피식 웃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웃음을 짓고 있는 비에른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만난 거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지.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어.”

비에른은 정말 오라버니 같았다.

다정하고 동생 바보 같은 따뜻한 오라버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힐링제였다.

그때, 공작부인 영애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네요. 이에테르 공작.”

비에른은 그녀를 아는지 살짝 묵례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트리비아나 공작부인.”

공작부인 영애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애, 이에테르가의 사람이었군요.”

비에른의 한쪽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데이지를 아십니까?”

공작부인 영애는 고인물 같았다.

깨발랄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중후한 귀부인 역할에 몰입했다.

그녀는 일회용 접시가 조선백자로 보일 만큼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카페에서 만났는데 대화가 잘 통해서 제가 이번 데뷔탕트 때 샤프롱을 해 주려던 참이었어요.”

“샤프롱을요? 부인께서요?”

샤프롱이 진짜 중요하긴 한 모양이다.

비에른마저 공작부인의 제안에 삑사리를 내고는 냉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묘한 뿌듯함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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