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네?”
당황하는데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밀려왔다.
“근데 아리나 영애, 초면에 강제로 옷깃 스치면 슬롯 활성화 안 되지 않아요?”
아리나라고 불린 녹발 영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옷깃 먼저 스치고 서사 쌓았는걸요.”
적발 영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건 영애한테 #몸정 키워드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거죠. 아, 혹시 뉴비 영애도 #몸정 키워드 있어요?”
나도 #몸정 키워드를 좋아하지만, 키워드 선택에 개수 제한이 있어서 설문 조사 때 고르지 못했다.
내 표정을 보고 대충 답을 짐작했는지 씁쓸한 얼굴로 아리나가 다시 말했다.
“뉴비 영애 만난 김에 슬롯 저장하는 법 알려 드리고 싶은데. 저 공작이랑 쌓을 서사가 생각이 안 나네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서사가 뭐예요?”
공작부인 영애가 아, 탄성을 지르며 미안한 듯 웃었다.
“서사는 여기서 하는 말인데…… 음, 갑자기 길에서 끌어안으면 미친 사람 같잖아요? 옷깃이 스칠 만한 사건을 만드는 걸 서사 쌓는다고 해요.”
“아하…….”
역시 개연성이 중요하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적발 영애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 카페 사장님은 어때요? 평민들은 비쥬(볼을 맞대는 프랑스식 인사) 하니까 옷깃 스치기 쉽더라고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영애들이 등을 돌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를 쳐다봤다.
카페 주인은 입구에서 어떤 소년에게 신문을 받고 있었다.
주인이 소년에게 키를 맞추어 허리를 구부렸다. 그 반동을 따라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살며시 파도쳤다.
그가 소년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웃어 주었다.
그러자 찹쌀떡같이 하얀 뺨에 깊은 볼우물이 파이고, 가늘게 휘어진 눈이 매혹적인 곡선을 그려 냈다.
카페 주인은 확신의 씹덕상이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심신 안정제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비주얼 쇼크로 심장마비를 겪을 뻔했다.
[전]에 진입도 못 하고 죽을 수는 없다. 내 20억!
주인은 소년에게 은화를 쥐여 주고는 신문을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아리나가 허리를 펴고 우아한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제이크.”
“네, 아가씨.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는 또 청량한 미소를 달고 웃으며 다가왔다.
아리나는 슬쩍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제 동생이에요. 예쁘죠?”
갑자기 아리나는 나를 호적으로 묶으며 카페 주인의 앞으로 밀었다.
주인이 놀랐는지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다시 서비스 정신이 충만한 미소를 되찾았다.
“네, 아리나 아가씨를 닮아 미인이시네요.”
“그렇죠? 인사해, 동생. 에즈히나 거리에서 제일 잘나가는 파티시에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얼른 비쥬를 하라고 들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 그에게 비쥬를 시도했다. 다행히 남자는 인사를 하려는 걸 눈치채고 허리를 굽혀 주었다.
사락.
순간 옷자락이 스치더니 다시 상태창이 나타났다.
[남주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캐릭터 정보 확인 중]
[죄송하지만, 엑스트라는 슬롯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5쌍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엑스트라는 슬롯에 저장할 수 없다네요.”
내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제이크가 남주가 아니었어?”
“엑스트라가 저렇게 위험한 얼굴을 해도 돼?”
“여긴 위험한 세상이야. 정말 위험해.”
그녀들은 매우 감동한 표정으로 자신의 공포감을 서술했다.
오직 아리나만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안 되겠다. 내가 대충 서사 만들어 줄 테니까 저 공작이라도 슬롯에 넣어요.”
“저 공작님을요?!”
“네네, 남주도 급이 있거든요. 저 정도면 분명 A급이에요. 남주로 선택해서 시나리오를 까 봐야 등급을 확인할 수 있긴 한데, 얼굴을 봐요. 저 외모로 C급이면 사기지.”
혼자 중얼거리던 아리나는 갑자기 인상을 와락 썼다.
“C급 캐릭터 디자인에 저렇게 품 낭비하면 예산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절대 아니야. 절대 아니어야 해요!”
분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의 현생 직업을 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현생 정보 유출은 블라인드 되지 않나 보다.
시스템의 블라인드 마지노선을 곱씹는 새, 나는 거리로 나와 있었다.
아리나는 내 손에 냅킨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 새똥 묻었다고 하고 닦아 줘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업이 어디 있어요.”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아리나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로판적 허용이 있으니 괜찮아요.”
“……예?”
“여주가 뭘 해도 다 반하거든요.”
광신도 같은 눈빛을 마주하니 아리나가 좀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접어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그럼 아리나 영애가 슬롯에 넣으세요. 저한테 저 공작님은 너무 과분한 거 같아요.”
어제 막 들어온 유저에게 처음 본 공작이랑 스킨십을 하라니.
이건 뉴비한테 보스몹을 때려잡으라는 소리였다.
아리나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눈꼬리를 내렸다.
“저는 어제 [전] 진입했어요. 남주는 1명만 선택 가능해서 이제 더 넣을 수가 없어요.”
“벌써요?”
“네, 그나저나 영애가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죠. 돌아가요.”
그녀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의 영역에 들어온 상태였다.
감각이 남다른 건지 공작은 우리 대화를 다 들은 듯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훅 고막을 파고들었다.
“지금 저를 두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공작의 무감한 시선이 제 어깨에서 짧게 머물다 내 손으로 내려왔다.
“제 어깨에 새똥은 없는 것 같은데요.”
중저음의 느른한 목소리로 들으니 아리나가 준비한 작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피부로 와닿았다.
나는 맹렬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잡아뗐다.
“아니요. 잘못 들으신 것 같아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공작은 대답하는 대신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거대한 체격 때문인지, 붉은 눈동자 특유의 선득한 시선 때문인지 숨이 답답해졌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는 기분.
저 공작 진짜 남주 맞나 봐.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나는 작게 기침을 하며 막힌 호흡을 뚫었다.
공작의 시선에서 벗어나 카페로 돌아가려는데 알람이 울렸다.
[★무료 분량 5회차 확보★]
[축하합니다! 24시간 내 2만 5천 자 분량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만 5천 자를 채웠다고 알람이 떴다.
그런데 내가 좀 빨리 채운 모양이다. 24시간 이내에 채웠다고 보상을 주는 걸 보면.
공짜로 아이템을 주는 건가?
물음에 답하듯 상태창이 팟 전환되더니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1. 서사 치트키
남주를 내 슬롯에 저장『』
: 원하는 남주와 옷깃을 스치도록 시스템이 사건을 만들어 드립니다.]
[2. 완벽한 조력자
능력 하녀/집사의 입사 지원서
: 헤메코, 여론 조성, 밀수. 불가능을 모르는 만능 조력자의 입사를 강제합니다.]
[3. 현질로 슬기로운 빙의 생활
$잭-팟$ 5천 캐시 뽑기권
: 아이템 구매를 위해 필요한 캐시를 지금 뽑아 보세요.]
3번은 내가 여기 물가를 몰라서 그런지 5천 캐시가 영 소박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1번과 2번 보상이 탐났다.
반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엘런 공작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악질 사생팬을 마주한 내 최애돌의 피곤한 표정과 비슷했다.
억울한 나는 엘런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어졌다.
1번으로 가자.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느니 시스템 버프 받고 명예 회복하는 게 낫지.
‘1번으로 할게요.’
[서사 치트키가 지급되었습니다.]
[서사 치트키를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응. 바로 사용.’
[서사 치트키가 활성화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주를 서치 합니다.]
[서치 성공!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에게 서사 치트키를 적용하시겠습니까?]
‘응. 적용 고.’
[남주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서사가 조정됩니다.]
[조정 중…….]
뭐든 새똥 닦아 주는 것보단 낫겠거니 싶어서 서사 활성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상태창이 믿을 수 없는 문장을 써 내려갔다.
[서사 활성화 ‘S급 사건’이 발동됩니다.]
[겨울국의 ‘마왕’이 동면에서 깨어납니다.]
푸른 상태창에서 반짝이는 문구를 보며 나는 입을 벌렸다.
마, 마왕?
겨울국 황녀를 동면시킨 그 마왕?
마왕도 동면 중이었어?!
아니 잠깐만, 이거 결말 아니야? 튜토리얼 창에 최종 보스 시나리오 유출된 거 아니냐고.
“레이디?”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건지 엘런이 팔짱을 풀고 다가왔다.
그는 짙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내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서 미친 소리를 해 대는 상태창 때문에.
[오랜 동면으로 머리가 아픈 ‘마왕’이 기분이 좋지 않다며 한숨을 내쉽니다.]
[‘마왕’의 눈에 벽에 걸린 대륙지도가 들어옵니다. 중간에 깨서 화가 난 ‘마왕’이 전 대륙을 얼리기로 결심합니다.]
[잠이 덜 깼는지 ‘마왕’이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감으며 ‘5개월만, 으음, 5개월만 더 자고 얼려야지.’라고 중얼거립니다.]
[S급 사건 ‘마왕의 기상’이 5개월 뒤로 스케줄링 됩니다.]
……설마 내가 서사 치트키 썼다고 마왕이 깬 건 아니지?
원래 5개월 뒤에 일어날 예정이었겠지?
“괜찮습니까?”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엘런이 나를 자세히 확인하려는지 몸을 굽혔다.
상태창을 훅 뚫고 들어온 얼굴에 놀라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콱.
치맛자락이 밟히는 바람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엘런이 민첩하게 내 허리를 낚아챈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와 콧날이 닿을 만큼 가까이 맞붙게 되었다.
순간 싸한 감이 들었다.
설마 뉴비에게 ‘S급 사건’ 서사를 준 이유가…….
의심하기 무섭게 알람이 울렸다.
[서사 치트키가 완성되었습니다.]
[‘엘런 아이스타스 카이엘드’에게 귓속말로 ‘마왕의 기상’ 일정을 알려 주세요.]
이 미친 시스템!
고작 쟤한테 귓속말로 정보 주라고 ‘마왕’을 깨웠어?!
[사건 유지 시간은 5초입니다. 제한 시간 5초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5]
[4]
나를 일으켜 준 엘런이 몸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초 수가 시야에 담기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양심을 집어던지고 상체를 세워 그의 귓가에 입을 붙였다.
“공작님, 5개월 뒤에 마왕이 깨어날 거예요!”
무슨 개소리냐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엘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바닥 아래로 그의 어깨가 벽돌처럼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오더니 나를 무섭게 응시했다.
와,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이겠네.
위압감이 남다른 사람인지라 저렇게 노려보니 솔직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나마 상태창 너머로 얼굴을 마주한 탓에 쫄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옷깃이 스치기 무섭게 엘런이 내 슬롯에 들어왔다.
[남주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