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6화 (7/208)

06화.

왜 남캐들은 웃으면 안 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고작 그 짧은 웃음에 나는 아침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비주얼 쇼크였다.

나는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 되겠어. 빨리 돌아다녀서 최대한 눈높이를 높여야겠어.

나는 커뮤에서 ‘뉴비를 위한 비주얼 쇼크사 예방 팁 10가지’를 읽다 태블릿을 의자 위에 내려 두었다.

첫 번째 팁은 밖에 자주 나가 미적 쾌감에 익숙해지라는 거였다.

나는 마차 커튼을 거칠게 젖혔다.

그리고 눈에 담기는 에즈히나 거리의 정경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긴 안구극락(眼球極樂)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푸른 하늘이 색채를 잃을 정도로 강력한 비주얼 폭발이 곳곳에서 터졌다.

길을 걷는 신사도, 마차를 모는 마부도, 커다란 술통을 이는 레스토랑 주인마저도 잘생겼고.

분수대 근처에서 책을 읽는 숙녀도, 마네킹 옷매무새를 다듬는 의상실 주인도, 따뜻한 빵을 진열하는 빵집 주인도 존예였다.

캐릭터 디자인을 어떤 분이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손목이 갈려 나가셨을 것 같아 심히 걱정됐다.

건물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서자 마차에 그림자가 졌다.

에즈히나 거리를 보여 주던 유리창이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췄다.

처음 봤을 땐 내가 세계관 최강 미녀가 아닐까 의심했는데, 지금 보니 적당한 얼굴이다.

나는 말랑한 뺨을 만지며 눈꼬리를 내렸다.

이 세계에서는 평균이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에즈히나 3가입니다.”

“네, 감사해요.”

나는 되찾은 겸손함을 챙긴 후 마차에서 내렸다.

봄국 영애들이 말한 디저트 카페를 찾아 카페 거리를 걸었는데 영애들이 말한 카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담소를 나누는 여인들이 보였다.

그들의 손목에는 스마트 워치가 걸려 있었다.

가게 안에 들어서니 그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혹시, 뉴비 영애?!”

익숙한 묘사 때문인지 영애들의 외형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적발금안, 은발자안, 녹발적안, 흑발청안, 청발녹안.

마치 00년대 아이돌의 예명 같은 외형.

나는 고도의 신기술 속에서 먼 과거의 향수를 더듬으며 자리로 가 앉았다.

은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영애가 손뼉을 치며 반갑게 인사했다.

“영애!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공작부인 영애예요. 어제 영애 도와준다고 했던.”

귀부인 같지 않은 발랄한 반응에 긴장감이 사라졌다.

나도 반색하며 감사 인사를 전하려 했다.

그때 고양이상의 붉은 머리 영애가 배시시 웃으며 내 잔을 채워 주었다.

“영애 차부터 마셔요. 막 들어와서 정신없죠? 저도 한 달쯤 됐을 때 겨우 적응했어요.”

그녀가 따라 준 차는 노란 꽃잎이 둥둥 떠 있는 꽃차였다.

“감사합니다!”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시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있잖아요. 영애.”

한 영애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나는 찻잔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날 보고 있던 영애들에게 바로 시선을 낚아채였다.

다섯 명의 영애들은 내게 호기심이 이는지 눈을 반짝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공작부인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애가 빙의한 소설은 제목이 뭐예요?”

생각보다 싱거운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 악녀의 부내나는 일상’인데 혹시 아세요?”

“어머 어머!”

내 소설 제목을 얘기했더니 ‘대박’, ‘미친’, ‘그거 내 최애 소설이에요!’라며 거친 반응이 쏟아졌다.

“신작이라 기대 안 했는데, 그 소설도 시나리오화 됐군요!”

“근데 캐디(캐릭터 디자인)만 빌려온 거 같아요. 저는 돈도 없고, 아직 잘생긴 호위 기사도 없거든요.”

조금 울적하게 답하자, 맞은편에 있던 하늘색 머리의 영애가 입을 열었다.

“여기 골목 꺾으면 용병 시장 있어요. 가끔 비운의 검투사 남주들 나오는데 한번 가 봐요. 지난주에 어떤 영애가 채용 후기 올렸는데, 검투사분들 피지컬이 미쳤대요.”

마지막 말은 내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슬쩍 소매 아래 숨겨 뒀던 워치를 꺼내 그녀가 준 정보를 저장했다.

‘검투사. 에즈히나 거리 5가. 피지컬 미침.’

내일 바로 와 볼까?

갑자기 모험심이 들끓었다.

집순이의 마음에 역마살을 집어넣다니 대단한 플랫폼이다.

그런데 붉은 머리 영애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이, 그렇게 쉽게 남주를 찾는 건 좀 그래요. 히든 남주는 호락호락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걸요?”

나는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근데 굳이 히든 남주를 찾을 필요가 있나요?”

영애들은 나를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영애는 히든 남주에 관심 없어요?”

나는 손사레를 치며 답했다.

“찾으면 좋죠! 다만 찾기 힘들어 보여서요.”

50년 동안 아무도 못 찾은 거 보면 말 다 했지.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50년을 더 낭비할 바에는 그냥 옆에 있는 남주 선택하고 20억 타는 게 낫지 않을까?

1, 2년 정도는 기다려 볼 만하지만, 몇십 년 단위로 기다리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다른 남주도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플랫폼은 우리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했잖아요.”

내 말에 영애들이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녀들은 약속한 듯 까르르 웃었다.

“그 말을 믿다니 영애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제가요? 제가 순진하다고요?”

내게 얹힌 깨끗한 수식어에 당황했다.

음란 마귀 꼈냐는 소리는 자주 들어 봤어도 순진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본 탓이다.

그런데 영애들은 진심인지 활짝 웃고 있었다.

초록 머리의 영애가 웃음의 여운을 즐기며 말했다.

“정말 유저의 행복이 목적이었으면 랭킹 나누기를 안 했겠죠.”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랭킹 시스템을 설계한 것부터가 유저가 랭킹에 신경 쓰도록 운영하겠다는 뜻이에요. 아마 랭킹에 따라 보상이 있을 거예요. 어쩌면 페널티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딴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현생에서 게임…….”

갑자기 음소거를 한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현생 정보 언급으로 대화가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아, 또 블라인드.”

초록 머리 영애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부인 영애는 초록 머리 영애를 보며 웃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뉴비 영애 말이 맞긴 해요. 자기만족이 우선이죠. 영애들 대부분은 랭킹에 관심 없어요. 히든 남주는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저도 영애들이 히든 남주에 욕심내는 건 이해해요.”

“왜요?”

“히든. S급. 좋은 수식어 다 붙였는데 얼마나 잘생겼겠어요.”

길가의 돌멩이마저 완벽한 이 아름다운 세상. 디자인팀이 히든 남주에 얼마나 혼을 갈았을지 가늠해 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진짜.

내 남주 아니어도 좋으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 줬으면 좋겠네.

그런데 공작부인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있잖아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히든 남주를 최고라 말해도, 내 눈에도 최고라는 보장은 없어요.”

초록머리 영애가 공작부인 영애에게 맞장구를 쳐 줬다.

“하긴, 저도 제 취향은 장발인데 싫어하는 영애들도 있더라고요. 히든 남주 장발이면 좋겠다.”

“전 장발 싫어요. 흑발 청안이면 좋겠어요.”

청발 영애가 바로 초록 머리 영애의 말을 자르며 정색했다.

그때 붉은 머리 영애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했다.

겨우 숨을 진정시킨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도 백퍼 남주겠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영애들이 창밖을 쳐다봤다.

나도 그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검은 바퀴, 검은 문, 검은 유리창.

온통 검은색인 매끈한 마차에서 올블랙 착장의 남자가 내렸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 틈으로 얇게 떨어지는 햇빛이 모두 그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후광인가?

매끈히 넘긴 남자의 검은 머리칼이 금빛으로 보일 만큼 순간 강렬한 빛이 일었다.

완전히 햇빛의 영역에 드니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단정한 미간과 높게 솟은 콧날, 시원하게 뻗은 입술.

하얀 대리석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조각 같은 얼굴, 그 안에 자리한 붉은 눈동자와 입술이 제 야릇한 색채를 과시했다.

커다란 마차만큼 장신인 남자는 내리자마자 제 코트 깃 자락을 손으로 한 번 털어 정리했다.

한 영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동차 CF인가? 마차가 슈퍼카로 보이네요.”

“응, 백퍼 남주네요. 얼굴에 주인공 서사가 있잖아요? 저 깊은 감정선 좀 봐요. 눈물 날 거 같네요.”

초록 머리 영애가 장난으로 냅킨을 들어 제 눈가를 닦았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남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남자를 관찰했다.

그런데 흥분한 분위기 속으로 공작부인 영애의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 저 캐릭터 알아요. 엘런 카이엘드 공작이에요.”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공작부인 영애에게 끌려갔다.

“공작이요?”

“네. 저희 남편 놈이 맨날 욕해서 기억해요. 무슨 일인지 갑자기 에즈히나 거리를 사들이고, 타운 하우스에 사람을 고용했대요. 계속 북부에 있던 분인데 황실에 뭔가 한발 걸치려는 거 같다고 엄청 경계하더라고요.”

공작부인 영애는 그를 아련히 보며 혼잣말을 했다.

“아, 남편 놈이 카이엘드 공작이었으면 이혼은 생각도 안 할 텐데.”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이혼하세요?”

“아, 네네. 저는 #회귀여주 #벤츠남주 키워드가 있어서 새로 남주를 찾을 예정이에요.”

위로를 해야 할지, 축하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다가온 녹색 머리 영애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영애, 이렇게 옷깃이 닿으면 슬롯창이 활성화되거든요.”

그녀는 내 목덜미 옷깃을 톡 건드리고 자신의 것도 건드렸다. 그리고 옷깃을 맞대고 슥슥 비볐다.

띠링.

정말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남주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캐릭터 정보 확인 중.]

[죄송하지만, 유저는 슬롯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유저라 저장이 안 되죠?”

“우와, 네.”

상태창이 신기해서 거기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로 녹색 머리 영애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이렇게 남주랑 옷깃을 비비면 슬롯으로 저장할 수 있거든요.”

“아, 그렇구나.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텃세 없는 따뜻한 정보 나눔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입꼬리를 휘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득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유혹하듯 나긋하게 속삭였다.

“오늘 슬롯 추가 한번 해 볼래요? 저 공작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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