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20억 소리에 눈이 뒤집힌 나는 얼른 상세 안내서를 켜고 모음과 자음 단위로 내용을 뜯어 살폈다.
초반 내용은 의 제작 의도와 목표였다.
의 목표는 간단했다.
이용자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
이용자들이 어디로 갈지, 누굴 만날지, 뭘 할지 ‘선택’할 때마다 에피소드가 창조되는데, 그 데이터를 추출하는 게 제작진의 최종 목적이었다.
이용자가 할 일은 ‘선택’뿐.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있으면 되는 거다.
또 재밌는 사실은 AI 담당자가 텍스트화한 데이터를 플랫폼에서 웹소설로 연재한다는 거였다.
게임 출시 전 대중의 반응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연재를 한다는데 재밌을 거 같다.
현생 나가면 아까 그 영애 소설부터 봐야지.
물론, 이용자의 동의를 받은 콘텐츠만 웹소설로 오픈될 수 있었다.
나는 오픈에 동의했다.
왜냐?
또 돈을 주니까!
플랫폼은 유저에게 연재 수익금을 나눠 준다고 한다.
모두 같은 비율로 수익금을 나눠 주는 건 아니고, 상위 랭커 10명은 매출의 40%를 정산해 주고, 하위 랭커 90명은 매출의 10% 비율로 준단다.
상•하위를 나누는 기준은 AI의 정성평가!
5명의 AI 담당자가 독자가 되어 100명의 데이터를 읽는다고 한다.
에피소드, 가독성, 캐릭터 매력, 전개 속도를 평가해 랭킹을 매긴다는데.
“음…….”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솔직히 랭킹 공정성이 의심됐다.
이따금 AI 자동 키워드를 보면 흐린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단 말이지.
[…….]
‘아니, AI 최고인데, 탑 두뇌인 거 인정하는데, 그래도 솔직히…… AI가 콘텐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이건 예체능 영역이잖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현재 AI의 기술은 광고를 제작하고 추상화를 그릴 수 있는 수준입니다. 자료 서치를 시작합니다…….]
‘믿어요. 응, AI를 믿습니다.’
AI가 또 급발진을 하기에 다급히 그를 달랬다.
뭔가 옥장판을 판매하는 다단계 판매원처럼 신뢰감 없는 전문성이 느껴졌지만, 그냥 믿는다고 해 줬다.
그냥 믿자.
솔직히 이런 개꿀이 어디 있어.
알아서 써 주고 평가도 한다잖아.
이 정도면 자소서 대신 써 주고 합격도 보장해 주는 수준 아니냐고.
막말로 100등 해도 20억 받는 거니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나는 내 오른쪽 검지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손가락. 네가 우리 인생을 꽃길로 이끌었다.
완결을 치면 자동으로 로그아웃 되고, 일주일 내로 20억이 정산된다고 한다.
완결 시기는 [전]에 언제 진입하냐에 달려 있었다.
게임 시나리오 스테이지는 [기]–[승]–[전]–[결]로 나뉘는데, [기]-[승]은 딱히 승급 미션이 없었다.
빙의한 장소랑 주변 인물 묘사만 들어가도 인정!
나는 벌써 [기]–[승] 요소를 충족한 셈이다.
스테이지당 글자 수 15만 자만 채우면, 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음, 난 지금 얼마나 채웠을까?
[현재 글자 수는 2만 3천 2백 자입니다. [전] 진입 전,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추가될 경우 [기]-[승]의 분량이 늘어나거나, 재미없는 에피가 삭제됩니다.]
퇴고도 알아서 해 준다니. 난 정말 먹고 놀기만 하면 되는군.
예쁜 검지를 또 한 번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손가락.
플랫폼은 유저의 이해력이 심히 걱정되었는지, 안내서에 주석으로 예상 질문을 달아 두었다.
『Q. 저는 빵을 좋아하는데 종일 빵 만들고 먹기만 해도 되는 건가요?
A. 당연합니다. 이용자님이 원하신다면 온종일 빵을 만들고 드시기만 해도 [기]–[승] 완성 요건이 충족됩니다. 이용자의 만족이 최우선이니까요! 행복하게 지내신다면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인생 또한 절반은 성공한 겁니다.^^』
이용자 만족도가 최우선이니 그저 행복하기만 하란다.
이런 혜자로운 플랫폼…….
시큰한 코끝을 괜히 매만졌다.
그리고 [전]은 남주를 선택하면 자동 진입된다고 한다.
남주 캐릭터에는 시나리오가 내장되어 있어서, 자동으로 주변 배경이 변하고 에피소드가 진행된다는데…….
『Q. 남주에게 내장된 시나리오를 꼭 따라야 하나요?
A.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이용자님의 창의성을 존중하지만, 완결은 어려운 일입니다.
기성 작가님들도 완벽한 완결을 위해 오랜 기간 휴재를 하고 고민하시기도 하죠.
완결은 이용자님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어, 제작진들은 결말을 자동화했습니다.
선택에 따라 세부 에피소드는 달라지지만, 결국 정해진 결말로 흘러갑니다.
남주 캐릭터에 설정된 배경과 성격에 따라 시나리오가 자동 진행되니 이용자님은 그저 즐겨 주시면 됩니다.
에 배드엔딩은 없으니까요!
★이용자님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완벽한 결말★
제작진이 준비한 행복한 결말을 즐겨 주세요.^^
TIP: 남주의 등급에 따라 전개력이 달라집니다. S급 히든 남주를 찾아보세요. 바로 랭킹 1위를 탈환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조건은 행.복.이다.
이 게임 기획자는 마더 테레사의 환생이 틀림없다.
완결 치면 20억을 주고, 거기에 플러스로 웹소설 수익금까지 준다니.
역시 대기업인 건가? 자본 폭격 한번 엄청나네.
감사한 마음으로 잘 줍줍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의사항도 있었다.
[전]과 [결]에 진입해도 텍스트화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면 분량을 채우지 못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예를 들면, 배탈이 나서 계속 화장실에 있다든지.
주구장창 욕을 써서 모든 대사가 블라인드 처리된다든지.
불타올라 매일 19금 씬만 찍는다든지.
19금 씬을 조심하라고?
참나,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건가? 쯧쯧, 본능을 너무 쉽게 보네.
[…….]
……필러링, 필터링부터 켜자.
치직 들리는 기계음에 얼른 Ctrl+F ‘필터링’을 입력했다.
바로 설정법이 나왔다.
안내를 따라 설정 탭에 들어갔다.
[설정]–[커뮤니케이션]–[필터]
탭 진입은 간단하였으나 설정 가능한 필터가 수백 개였다.
‘□ 도로변 산책 시 필터링.
*욕설이 난무하는 돌발상황 제어로 깔끔히 생각만 전달’
그렇게 138개의 항목을 신중히 체크하고 내려왔을 때, 나는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미친!”
‘□ 담당자에게 생각을 전하고 싶을 때만 전달
*헤이, 담당자. 하이, 담당 등의 명령어 설정 후 사용 가능합니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 줘야지! 이걸 왜 맨 밑으로 내려 둔 거예요.
바로 명령어를 설정했다.
‘담당자님’으로 하자. 모를 땐 기본이 최고니까.
그러자 치직거리던 기계음이 모두 사라졌다.
드디어 모든 생각이 필터링 된 거다!
해방감에 절로 굳어진 어깨가 쑥 내려갔다.
다시 게시판으로 돌아와 둘러보는데 방금 올라온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제목: 봄국 데뷔탕트 가는 영애? [0]
『다음 주면 봄국 데뷔탕트잖아. 혹시 여기 참석하는 영애 있어? 그냥 참석하는 거든 뭐든 말이야. 나 남편 따라 참석하는데 얼굴이나 보자 ㅎㅎ』
오, 나 곧 데뷔탕트라고 들었는데 만나면 좋겠다.
얼른 댓글을 달았다.
┗ 저요. 저 이번에 사교계 데뷔해요!
그러자 바로 대댓글이 달렸다.
┗ 글쓴이: 설레겠다. 의상은 맞췄어? 파트너는 누구야?
의상이랑 파트너?
그거 어떻게 준비하는 거지?
┗ 제가 오늘 막 들어와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씁쓸히 댓글을 달고 다른 글을 보러 나오는데 갑자기 대댓글 알람이 미친 듯이 떴다.
┗ 영애! 여기 옷 제작만 해도 한 달 걸려! 어떡해! 괜찮은 드레스는 있어?
┗ 오늘 빙의했으면 아직 남주 슬롯 하나도 못 채웠으려나? 주변에 존잘남 있나 찾아봐. 높은 확률로 존잘이면 남주 캐더라.
그 외에도 나를 걱정하는 대댓글이 마구마구 달렸다.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니 슬슬 두려워졌다.
┗ 의상이랑 파트너를 제가 정해야 하나요? 저 지금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ㅜ-ㅜ
다들 내 댓글을 기다렸던 건지, 또 우다다다 대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보통 집안에서 해줘. #가족복수극 키워드 있는 거 아니면. 구박받는 중에 그런 거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ㅠ 아, 혹시 영애한테 가족 복수극 키워드 있는 건가? ㅜㅜ
┗ 헐 가족 복수극이면 아싸 캐릭일 확률 높은데. 파트너 구하기 어려우면 우리 집 호적메이트 빌려줄까? 껍데기는 쓸 만함 ㅇㅅaㅇ
나 가족 복수극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한테 그런 키워드가 있나?
‘담당자님, 내 키워드에 #가족복수극 있는지 알려 줘요.’
[유저에게는 #가족복수극 키워드가 없습니다. 유저의 키워드는 #사이다물, #고수위…….]
‘그, 그만해 들어가!’
쓸데없이 성실한 AI를 들여보내고 다시 댓글을 달았다.
┗ 저 지금 사촌 오라버니 집에 얹혀살아서 옷도 어떻게 사야 할지 막막한데ㅜ 일단 내일 물어볼게요. 근데, 저 많이 늦은 거예요?
그러자 어김없이 두두두 달리는 댓글.
┗ 보통 일주일 전이면 영애들이 드레스 인증 글 올리고, 무도회 춤 커버 영상도 올린단 말이지... 영애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걱정되긴 하네
┗ 게시글 검색해보면 무도회 안무 영상 여러 개 있어. 그거 보고 일단 연습부터 해 영애 ㅠㅠ
┗ 드레스는 진짜 문제가 심각하네... 여기 오뜨꾸뛰르 운영하는 영애 없어? 우리 뉴비 영애 드레스 좀 맞춰줘!!
┗ 나나나! 나 봄국 생 마레 거리에서 오뜨꾸뛰르 운영중! 뉴비 영애 사이즈가 어떻게 돼?
┗ 대박. 여기 완전 능력자 커뮤네 ㄷㄷ 근데 디자이너 영애... 설마 본 셰밍 주인 아니지?
┗ 엇 맞아. 어떻게 알았어?
잠시 대댓글이 멈췄다. 새로 고침을 몇 번 하니 폭발적으로 대댓글이 달렸다.
┗ 미친! 나 거기 예약 길다 해서 패스했는데, 영애네 의상실이었어?!ㅇ0ㅇ
┗ 영애!! 여기 가을국인데도 영애 이름 엄청 유명함. 울 디자이너 영애 #능력여주구나.
┗ 나 다다음달에 결혼하는데 영애네서 옷 맞추고 싶다. 제발, 제발 나 예약자 틈에 살포시 끼워주면 안 될까? ㅠㅠ
오…… 유명 양장사가 여주의 양장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나, 그 양장사 또한 빙의 영애일 줄은 몰랐다.
직업물도 인기가 많구나.
역시 로판은 취향판이다.
┗ 당연하지. 영애들은 내가 다 책임진다고! 메신저 보내! ^0^
혈연, 지연, 학연을 뛰어넘는 빙연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야말로 황금 인맥.
이 세계 먼치킨 여인들이 다 모인 곳이라니.
갑자기 노트북이 소중해져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그때, 또 한 번 알람이 울렸다.
┗ 뉴비 영애, 사교계 처음이면 내가 가이딩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