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인터넷은 안 되지만 커뮤니티 접속은 가능했다.
인증 절차도 간단했다.
빙의한 소설 제목을 기입하고, 비밀번호를 설정하니 바로 가입이 됐다.
낯선 판타지 세계에서 한국 IT의 UI/UX를 경험하다니.
익숙한 사이트 디자인을 보고 있으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우선 게시물 최상단에 있는 공지사항부터 읽었다.
공지: 빙의 커뮤니티 이용 시 주의사항
『안녕하세요, 영애님들. 기획자입니다.
모두 낯선 세상에서 고생이 많으셔요. 조금이나마 영애님들의 적응에 도움이 되고자 커뮤니티를 개설했습니다.^^
현생을 잊고자 즐기는 콘텐츠인 만큼 모든 현생 정보는 블라인드 처리됩니다.
따라서 현생 정보는 비밀 유지 부탁드립니다.
또한, 빙의 캐릭터에 따른 신분 차이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유저입니다.
커뮤니티 내 모든 유저의 호칭은 ‘영애’로 통일 부탁드리겠습니다.
+ 커뮤니티 스핀오프로 메신저 앱 또한 제공하고 있사오니 필요하실 경우 태블릿과 워치를 이용해 메신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이건 제작사에서 만든 커뮤니티였다.
생각보다 빡빡하지 않은 주의사항에 나는 턱을 괴고 쓱쓱 스크롤을 내렸다.
뭐, 서로 영애라 부르고 현생 정보 말하지 말라는 거잖아.
주의사항을 빠져나온 나는 바로 커뮤 관전에 들어갔다.
제목: 오늘 빙의하신 분? [23]
『오늘은 몇 분 들어왔나 체크해 볼까요?』
┗ 이런 것도 있네요. 저 지난주에 처음 들어왔어요.
┗ 환영해요. 전 작년에 들어옴.
작년?
분명 이벤트 참가 신청은 일주일 전에 오픈됐는데?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댓글을 달았다.
┗ 작년이요? 이 이벤트 일주일 전에 오픈한 거 아니에요? 작년에도 있었어요?
다들 커뮤만 보고 사는지 바로 대댓글이 달렸다.
┗ ㄴㄴ 일주일 전에 오픈한 건 맞는데 이거 다 빙의 타임라인이 달라요. 여주가 7세부터 63세까지 다양해서.
┗ 63...세요?
┗ ㅇㅇ 곧 회귀하실 예정임.
뭔가…… 이상한데?
노련한 빙의 여주가 뉴비 빙의 여주를 상담해 주는 댓글을 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빙의 타임라인이 다르다고? 같은 날 이벤트에 참가했다 해도 빙의한 시점은 다르다는 얘긴가? 왜?
근데 63세 빙의면 중세 기준으로 거의 100살 아니냐고.
빙의한 상태로 노환 오시는 거 아니야?
“잠시만…….”
만약에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후다닥 게시판에 ‘여기서 죽으면’을 검색해 봤다.
제목: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거야? ㅠㅠ [58]
『빙의하면 다들 살아남으려고 난리잖아. 그 이유 알겠더라....
나 에피 잘못 쌓아서 데드 플래그 꽂은 거 같아. 다음 주면 죽을지도... ㅠㅠ 일단 최대한 안 죽어볼 건데... 혹시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건가?』
┗ 절대 안 죽어. 걱정 마. 그냥 바로 현생 복귀라던데? 안내서 봐봐.
┗ 글쓴이: 오 고마워ㅠㅠ 나 너무 무서웠오ㅠㅠㅠ
┗ 토닥토닥 괜찮아. 근데 다음 주에 죽는다니? 전개 괜찮은 거야? ㄷㄷㄷ
┗ 글쓴이: 나 원작 여주가 살인마라 무서워서 누명 씌우고 감옥에 보내버렸거든... 근데 원작 여주가 탈옥했대... ㅠㅠ 담주면 영지 도착할 듯ㅠㅠ
┗ 헉! 영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ㅠㅠ
┗ 미쳤어! 영애 어디 국가야? 여기 여름국 폐하 계시잖아. 폐하!! 살려 주세요!
┗ 글쓴이: 나 봄국이야 ㅠㅠ 여기 황제 미친 개또라이야. 영지에서 알아서 판결 내리고 사람 죽일 수 있어. 울 양아버지 영주임 나 어뜩해ㅠㅠ
┗ 그건 여름국도 똑같아. 음... 어쩌지. 도망은 생각해봤어?
┗ 글쓴이: 웅.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하 어떻게 도망가야 할지
┗ 헐! 영애 나 이거 지금 봄. 내가 도와줄까? 나 마녀 여주임 이동 스크롤 가져다줄게. 주소 불러봐
┗ 대박!
┗ 끌올해!
┗ 영애!!! 이거 봐! 여기 이동스크롤 있대!!
……뭔데 이거?
모두가 하나 되어 영애를 도와주는 현장을 지켜봤다.
┗ 글쓴이: 앗 나 이제 봤어 ㅠㅠ! 여기 봄국 수도 근처 호베른 영지야! 나 호베른 백작저 2층 제일 왼쪽 방에서 지내고 있어
┗ ㅇㅇ 오키키. 방금 메신저 보냈어. 저녁에 영애 방에 들를게
┗ 글쓴이: 웅웅!
┗ 헐 마녀 영애님. 저도 친추해도 되나요?
┗ 저두요! 저두요!
┗ 저도 스크롤 ㅠㅠ! 저 농부 여주로 빙의했는데, 진짜 미치겠어요. 여기 맨날 비 오고 옆에 소 농장 있어서 찌린내 장난 아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애들도 메신저로 주소 보내. 스크롤 쏴줌
두근두근.
이동 스크롤 나눔이라니.
판타지 덕후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문장이었다.
┗ 글쓴이: 고마워 영애들 ㅠㅠ 나 꼭 살아남아서 후기 올릴게!
후기도 올린다고?
스크롤을 올려 작성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들어온 뉴비 찾는 글이 10월 15일 작성이었고, 저 글은 작년 9월 17일 작성인 걸 보니 후기가 올라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후다닥 ‘후기’를 검색해 봤다.
제목: <<후기>> 원작 여주 오기 전에 도망간다고 했던 영애야ㅎㅎ [112]
『나 원작 여주 때문에 도망 여주로 강제 키워드 갱신됐던 영애인데 기억하려나? ㅎㅎ
결론부터 말하면 마녀 영애님 덕분에 잘 도망쳤어!
하... 마녀 영애님 너무 아름다우시더라. 고아한 얼굴과 반짝이는 금안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어. 아니다, 이 세계의 것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암튼 가능했다면 바로 팬클럽 만들었을 텐데 내가 현생에서... (*현생 정보 언급으로 부분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짐 싸고 스크롤 찢으려는데, 벌컥 문이 열린 거야. 우리 집 셋째 오빠가 들어왔더라고. (물론 나랑 피는 안 섞였지만.)
근데 영애들 그거 알아?
마검사들은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대. 마녀 영애님이 방문하신 바람에 셋째가 눈치채고 온 거야. 셋째가 마검사거든.
손에 스크롤을 들고 있던 터라 그냥 솔직하게 말했지.
원작 여주가 탈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복당하기 전에 도망치고 싶다. 이렇게.
셋째 오라버니는 묵묵히 듣다 묻더라고, 어디로 갈 거냐고. 그래서 여름국으로 갈 생각이라 했더니 셋째 표정이 굳는 거야.
내가 여기 빙의한 지 6개월 차거든?
이 오라버니 얼굴은 진짜 내가 현생에서 본 그 어떤 연예인보다 잘생겼는데 성격이 참 개차반이야. 죽으라면 죽어야지 키워준 은혜 모른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를 줄 알았는데, 웬걸? 조용한 거야.
한참 있다 입을 여는데, 자기도 같이 가겠다네?
속으로 펄쩍 뛰었지.
내가 왜 너랑? ㅇㅅㅇ;;
물론 대놓고는 말은 못 하고 그냥 혼자 자아성찰 시간을 가지고 싶다 둘러댔어. 그랬더니 이 자식 그냥 내 팔 잡고 스크롤 찢더라.
역시 또라이 자식 ㅎㅎ....
그때 알았지. 이 자식은 분명 #또라이남주 키워드 있을 거라고.
게다가 강제로 끌어안긴 바람에 옷깃이 스쳐서 이 망나니 놈이 내 남주 슬롯에 들어온 거야.
어차피 남주 슬롯은 다다익선이니까 별로 신경 안 썼어. 나중에 한 명만 선택하면 되니까.
(아! 여름국 폐하 영애가 메시지 주셔서 귀화 허가도 받았어. 감사하게도 황궁에 지낼 곳도 주심 ㅠㅠ 진짜 감사해요 폐하 ㅠㅠ 갓폐하! 권력의 맛 기미만 했는데도 맛있었어요! 사랑해요ㅜㅜ)
그렇게 황궁에서 지내고, 날 따라온 저 셋째도 여차저차 여기서 귀빈 대접받으며 같이 지냈어.
그런데 우리 셋째 인기 많더라. 연회 갈 때마다 사람들이 자꾸 우리 셋째한테 달라붙는 거야.
그걸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쟤는 키워드가 뭘까?
남주 슬롯에 들어오면 캐릭터 정보 확인 가능하잖아. 셋째 정보 다시 확인해봤는데, 역시나 #또라이남주 키워드 있더라 ㅋ
로판 덕후 경력 어디 안 가죠? 안목 무엇?
그 외에도 #순정남이랑 #동정남 키워드도 있었어.
좀 놀랐어. 우리 셋째 인기도 좀 있고, 나름 귀족 영애 혼자 나간다고 본인 지위 버리고 따라올 정도로 매너도 (개똥만큼이지만) 있는 앤데 동정이라니?
근데 영애들 있잖아...
급 전개 미안한데, 나 사실 저 연회 날 셋째한테 고백받았어.
보름 전에 달이 되게 파랬잖아. 달빛에 홀려서 혼자 연회 홀 테라스에서 꽃구경하는데 발소리가 들리는 거야.
셋째더라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얘가 날 짝사랑할 거라고 짐작조차 못 해서 죄책감만 있었어.
괜히 나 따라와서 고생하니까.
그래서 봄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데, 얘가 피식 웃더라.
진짜 여기 남주들 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그런 위험한 얼굴로 웃으면 안 됨. 범죄야 그거.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어. 현생에서 그런 비주얼 쇼크를 겪어본 적이 없었거든.
셋째가 답답한지 제 머리를 헤집는데 그 커다란 손안에서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리더라.
그게 왜 시선을 잡아끌던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
그러다 셋째가 말하더라고.
“넌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
...모르지요 저는?
말한 적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눈치 없이 대답하지는 않고 조용히 있었어. 그러니까 셋째가 막 노려보다가 다가오더라. 키가 워낙 커서 고개 꺾이는 줄 알았어.
나를 내리꽂듯이 쳐다보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그러다 갑자기 제 손가락으로 내 뺨을 살살 쓰다듬더니 또 바람 소리를 내면서 웃더라.
여름국이라 그런가.
뺨에 닿는 바람이 뜨겁게 느껴지더라.
온통 셋째 얼굴밖에 안 보였어. 그 붉은 입술이 벌어지는 짧은 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널 좋아하니까.”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휘감는데 그 순간 생각이 멈춰버렸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대로 굳었던 것 같아.
셋째가 그런 내 얼굴을 보면서 제 이마를 딱 맞대더라고.
“너한테도 내가 남자로 보일 날이 올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마음이 아팠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내숭 부려서 미안해.
사실 알았어. 나도 얘가 좋았나 봐.
술도 좀 마셨고, 심장이 간질간질 뛰어대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대로 발꿈치 들어서 입을 맞추려고 했는데....
ㅠㅠ 실패했어. (셋째 키가 너무 커 ㅠㅠ 영애들 혹시 기습키스 노리면 꼭 어디 올라가서 해. 여기 남주들 키 인플레 심하더라 ㅠ)
셋째 눈이 커지더니 완전 빵터져서 막 웃는 거야. 죽고 싶었어. 그냥 뛰어내려서 현생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피해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입가에 온기가 느껴졌어. 셋째가 나한테 입을 맞춘 거야.
한참 입술만 맞대고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벌리고....
으악, 부끄러워서 더는 말 못 하겠어.
어쨌든 나 남주 선택했어! ㅎㅎ 지금 같이 살 마을 고르는 중이야.
어쩌다 보니 #생존물에서 #잔잔힐링물로 바뀐 것 같은데 애초부터 랭킹 신경 안 써서 지금 너무 좋아.
하... 이거 진짜 소장판 나오면 바로 지르려고.
요약: 탈출 후 남주 선택하고 [전] 진입해서 잘 지내고 있음.
후기 끝 ㅎㅎ!
다들 너무 고마워. 나는 아무래도 곧 완결치고 현생으로 나갈 거 같은데. 그전에 오프라인에서 다 같이 보면 좋겠다 ㅠㅠ
다들 오늘도 힘내고 화이팅!』
┗ 아, 영애 잠시만. 이렇게 끝? 키스 뒤에 설명 좀
┗ 22 제발. 선생님 뒤에 좀만 더 얘기해주세요
┗ 333 이 소설 어디서 사야 하나요. 플랫폼 공유 좀요
┗ 4444 와 나 현생 나가면 영애 거부터 읽을 거야 미친 ㅠㅠㅠ
┗ 영애 진짜 축하해!
┗ 좀 있으면 [결]도 가겠다. 너무 축하해!!
┗ 글쓴이: 응! [결] 진입하면 후기랑 도움 될지 모르지만 팁도 올릴게 ㅎㅎ 영애들 사랑해 고마워.
뭐야 뭐야. 이 훈훈한 분위기.
아직 ‘슬롯’이니 ‘남주 선택’이니, [전]이니 [결]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남주를 선택하면 [전] 진입이라는 건 눈치챘다.
나도 곧 유니콘 같은 남주를 만나서 이렇게 되는 건가?
입꼬리가 하늘 모르고 올라가는 바람에 손으로 꾹 입술을 눌러야 했다.
그런데 댓글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 와 영애. [결] 금방 치겠네. 20억 받으면 뭐 할 거야?
……20억?
┗ 그러게. 현생 나가면 20억 바로 지급이랬지? 세금 떼나?
┗ ㅇㅇ 저거 세후 금액 말하는 걸걸? 연재 중단이나 조기 완결 아니면 20억 바로 준다던데. 안내서 20페이지쯤에 나와 있음.
┗ 쩐다. 와 목숨 걸고 완결친다.
……게임 완결 치면 현생에서 20억을 정산해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