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공작은 성미가 다급한 사람이었다.
“짐은 이게 다인가?”
“네.”
나는 간단하게 옷가지를 넣은 가방과 사과 박스를 들고 대답했다. 앞으로 내 빙의 생활을 도와줄 소중한 현대 물품.
“그 상자는 뭐지?”
“레이디의 물건을 궁금해하시는 건가요?”
뱉어 놓고 흠칫했다.
저거 중세 문법에 맞나?
마치 미드로 영어를 배워, 나도 모르게 쿨한 제스처를 쓰다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차갑게 굳는 외국인 친구의 얼굴을 보며 ‘어…… 내가 실수했나?’ 조마조마해지는 그 민망함.
영어 문법도 어려워 죽겠는데 중세 문법을 내가 어떻게 아냐고.
사이다물 그만 보고 예의 바른 여주 나오는 것 좀 볼걸.
“그래. 내가 실수했군.”
그러나 천사 같은 사촌 오라버니는 얼굴만 존잘이 아니라 마음도 미남이셨다.
그는 다정히 손을 내밀고는 나를 마차에 올려 주었다.
세상에. 좋은 냄새…….
이 시국, 새 마스크 특유의 석유 냄새만 맡다가 머스크 향이 스민 체향을 맡으니 기분이 몽글해졌다.
이래서 다들 빙의하고 싶어 하나 보다. 시각, 청각, 후각. 모든 감각이 호강하고 있다.
불과 몇 시간 전, 플랫폼을 욕하며 부들부들 떨었건만 나는 금세 적응했다.
내가 살던 곳은 시골인지 마차 밖 전경도 힐링 그 자체였다.
드넓은 목초지에서 얼룩소가 풀을 뜯고, 플라타너스가 가지런히 심어진 도로에는 나뭇잎에 부서진 햇살이 여름 바다처럼 반짝였다.
나는 창으로 들어오는 신록을 눈에 담으며 로판 세상을 구경했다.
‘이거 체험판 말고 소장본 구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대답 없는 세상에 장난스레 질문을 던져 본다.
[소장본은 20xx년 출시 예정입니다.]
“으악!”
“왜 그러지?”
우아한 남자의 목소리에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 너무 좋아서요.”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얘 좀 미친 애 아닐까?
[탁월한 캐릭터 분석력! 앞으로의 스토리를 기대합니다.]
기계음이 고막을 파고들고 눈앞에서 활자가 팔딱거렸다.
나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런 상태창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게임 빙의 웹툰을 봐 왔으니 당황하지 않고 이게 뭔지 알아챘을 뿐이다.
과속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속으로 다시 욕을 했다.
이 미친 플랫폼!
내 생각을 검열하고 있다는 거잖아!
[검열이 아닌 관찰입니다. 단어 선정에 유의해 주세요. 올바른 단어 선택은 문장력을 향상시킵니다.]
이 무슨 해괴한 개소리?
내가 왜 문장력 따위를 고민해야 하는데?
‘머릿속을 파고드는 감정 없는 목소리에 심장이 멋대로 요동을 친다. 그 파동이 머릿속에 혼란을 빚어냈다.’
생각도 이런 식으로 고심해서 하라는 거야?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표현력을 끌어모아 생각으로 항의했다.
[좋은 문장이지만, 가독성이 떨어져 독자 하차가 우려됩니다. 하차율이 높아지면 랭킹이 하락합니다.]
……독자 하차? 랭킹?
이 기계 보게?
자꾸 작가 취급이네. 웹소설 작가는 돈도 많이 번다는데 돈이나 많이 주면서 그런 취급 하라고.
[자료 서치를 시작합니다.]
[00뉴스 20xx년 12월 01일. 나OO 기자. 천장 없고 바닥없는 웹소설 시장…… N0만원 내외 수익을 이루는 작품이 다수…….]
갑자기 어학사전 발음을 틀어 놓은 것처럼 어색한 목소리가 담담히 신문 기사를 읊었다.
농담으로 던진 말에 급발진한 기계가 팩트를 조곤조곤 들이댔다.
‘알겠어요. 조용히 해요.’
그러자 소리가 뚝 끊겼다.
뭐지……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읽히는 이 찜찜한 기분.
순식간에 나의 힐링 여행 같던 로맨스 판타지 빙의 체험이 인공지능과 한판 붙는 SF 영화로 탈바꿈했다.
[인사드립니다. 유저의 담당자로 ‘제국 악녀의 부내나는 일상’ 콘텐츠를 함께 전개해 나갈 AI 피디입니다. 유저의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개인정보 보안을 위해 유저의 현생 정보 교환이 금지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장황한 설명 속 정신을 사로잡는 단어.
‘제국 악녀의 부내나는 일상.’
어제 내가 보다 잠들었던 그 소설이었다.
***
한적한 오후 햇살이 들어오는 마차 안.
고급 마차답게 흔들림 없이 편안하다.
나는 눈을 감고 마차 벽에 기대 자는 척을 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눈앞이 붉게 물든 것 같지만 그런 것에 정신을 둘 여유는 없었다.
‘아니 미친. 그럼 이거 내가 어제 보던 소설이야?’
[최근 3개월 감상작 중 이용자님이 선택한 키워드를 분석하여 선정했습니다.]
‘아니, 나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이름도 다르고, 그 여주는 처음부터 존부였단 말이에요!’
[저작권 문제로 일부 설정이 변경됩니다. 이름, 에피소드 등.]
‘……무슨 저작권? 대놓고 그 작품에 날 넣었다고 말해 놓고?’
이건 질문이 아니라 비꼰 건데 제멋대로 해석한 인공지능이 성실히 답변했다.
[캐릭터 디자인과 지위를 참조할 뿐, 그 외 상세 설정과 에피소드는 이용자님이 창작해 나가야 합니다.]
체험판이라면서 내가 에피를 왜 새로 만들어? 그냥 체험만 하게 해 줘야지.
현생도 피곤해 죽겠는데 게임에서도 머리를 써야 해?
킬링타임 콘텐츠답게 쾌속 전개, 쾌속 사이다를 제공하란 말이야!
[현재 개발 중인 콘텐츠는 다수의 유저가 함께 즐기는 MMOG(다중 온라인 접속 게임)입니다.
동일 세계관 공유에 따른 개연성 충돌 방지를 위해, 유저의 전개를 실시간으로 조정합니다.
만일 에피소드를 고정할 경우, 전개가 고정됨에 따라 개연성 충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동일 세계관 공유?’
[이용자님이 계시는 대륙은 3개의 제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봄국, 여름국, 가을국.(*발음 효율성을 위해 ‘제국’은 ‘국’으로 축약됩니다.)
현재 100명의 빙의 영애들이 동시 접속 중이며 각 국가에 33명의 영애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에피소드만 잘 짜 주신다면 자유로이 이동 가능합니다.]
‘오호…….’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100명이라며? 1명은 어디 있는 거지?
[1명은 망국의 나라 겨울, 겨울국의 몰락 황녀입니다.]
“…….”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여기 피폐물도 있어요?’
[플랫폼은 다양한 소재와 참신한 분위기의 콘텐츠를 제작하며…….]
‘있다는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피폐물은 아닌 거 같은데, 맞죠?’
피폐물,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여주가 구르는 소설.
감상이라면 몰라도 빙의라면 절대 사절이다.
[이용자님의 선호 키워드는 #사이다물 #여공남수 #착각계 #역키잡 #돈지랄 #고수위 #집착남 #다정남…….]
‘그…… 그만!’
쏟아지는 해시태그 발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뒤로 딱 달라붙은 민망한 키워드는 덕후의 사회적 두려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담당자님. 정말 제 이름 모르시는 거 맞죠?’
[이용자의 개인정보는 철저히 암호화되어 열람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죠?’
생각에도 목소리가 있다면 가히 물기 가득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달드린 태블릿 속 계약서를 통해 개인정보 보호 내역을 상세히 확인 가능합니다.]
‘제 생각은 어디까지 들을 수 있어요? 다 들으시는 거 같은데.’
[유저의 설정에 따라 필터링이 가능합니다. 현재 유저께서는 필터링을 걸지 않아 모든 정보가 이관됩니다.
그러나 추후 현실에서 데이터를 확인할 편집자의 멘탈 보호를 위해 음란성 생각, 욕설, 생리적 욕구는 자동 차단됩니다.]
‘필터링! 필터링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동봉해 드린 기기를 통해 확인 후 설정 가능합니다.]
‘말해 주기 귀찮으시죠?’
[…….]
예. 제가 확인할게요.
그나저나 지금 공작이랑 같이 있는데 이걸 언제 어떻게 확인한담.
[타임워프 기능을 사용하세요.]
‘타임워프? 그건 또 뭐예요?’
[***, 씬 건너뛰기. 1회 5천 자당 3회 이내 사용을 추천드립니다.]
‘오오오! *** 알아요!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씀해 주시지! 바로 사용할게요!’
***
눈을 뜨니 으리으리한 궁 앞이었다.
역시 공작가. 건물에서도 돈의 향기가 폴폴 느껴진다.
“하레네가 안내해 줄 테니, 우선 방으로 가서 여독부터 풀지.”
공작님의 중후한 저음에 나는 그제야 마차를 돌아봤다. 하레네로 보이는 사내가 내 짐을 들고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데이지 레이디. 이에테르가의 집사 하레네 크리트스입니다.”
순간 돼지 레이디로 듣고 울컥했으나, 재빨리 표정을 풀어냈다.
데이지니. 레이디니. 영 적응 안 되는 이름과 호칭이다.
“그럼 잘 부탁하네.”
존잘 공작님은 그리 정 없이 말하며 바로 발걸음을 떼셨다.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들어가시는 건가요. 각하?”
“보시다시피.”
“제게 또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가령 용돈은 얼마를 주겠다든지, 내게 잘생긴 호위 기사를 붙여 주겠다든지.
[…….]
……방에 가자마자 필터링부터 설정해야지.
나는 한숨처럼 들리는 기계음을 무시하며 다시 공작님을 간절히 쳐다봤다. 공작님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우선 목욕과 식사를 하고, 내일 내 집무실에서 따로 얘기하지. 하레네에게 일정을 잡아 줄 테니.”
와, 깔끔한 비즈니스 스케줄링.
옆 장르 본부장님 냄새가 났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동안인 건지, 아니면 로판 남주답게 ‘잘생기면 능력남’이라는 설정에 충실한 선천적 능력인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하레네를 따라 내 방으로 갔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내게 배정된 사용인과 인사를 나누고 목욕과 식사까지 마쳤다.
그렇게 장장 2시간, 내 생각을 컨트롤하며 버틴 뒤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달칵.
문을 잠그고 바로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사과 상자를 열었다.
노트북을 켜고 계약서를 읽는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한국말 같지 않은 한국말을 읽으며 머리를 쥐어짜다 습관적으로 검색을 하려 인터넷 창을 켰다.
인터넷 되려나?
동시 접속 콘텐츠라면 되지 않을까?
판교 테크노밸리의 힘을 믿어 보자.
초조하게 인터넷 화면을 켜는데 하얀 백지 화면이 드러났다.
아니, 백지는 아니었다. 화면 한가운데서 선명한 글자가 반짝였다.
[빙의 영애 커뮤니티에 가입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