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화 (2/208)

01화.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다.

금요일 밤을 자축하기 위해 야식을 주문하고, 편의점 희대의 마케팅 ‘4캔에 1만 원’에 맞추어 맥주 4캔을 사서 집에 왔다.

대충 씻고 침대에 파고든 나는 리더기를 켰다.

1시간 동안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직 덕력이 부족한 것인지 지하철에서는 웹소설을 읽을 수가 없다.

일반인 코스프레를 위해 켜 둔 ‘50년 후 미래 예측 경제 분석 - 부의 세상’을 끄자 바로 팝업이 떠올랐다.

[로맨스 판타지 애독자님을 위한 #빙의 체험 초대장 도착! ‘빙의물 시크릿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벽 그림 위로 새겨진 거대한 글씨. 그리고 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

[초대를 수락하면 1천 캐시를 드려요!]

1천 캐시 뽑기권도 아니고 1천 캐시를 그냥 준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클릭한 뒤 개인정보 수집 동의란에 체크하고, 주의사항(이벤트에 왜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인란에도 체크하고, 어떤 키워드를 좋아하는지 고르고, 응? 빙의하면 불리고 싶은 이름이 뭐냐고? 뭘 이런 걸 물어?

괴상한 질문 천지였지만, 대충 답하고 1천 캐시를 받았다.

그로부터 딱 일주일 후. 플랫폼으로부터 괴상한 모자를 받았다.

“뭐지? 굿즈인가?”

이걸 쓰고 자면 빙의할 수 있다는데, 상세 안내서는 없었다.

그저 꼭 밤 12시에 쓰라는 문구만 있을 뿐.

맥주캔을 비우며 시계를 보는데 11시 55분이었다. 장난삼아 모자를 쓰니 서늘한 쇠붙이가 관자놀이에 딱 달라붙었다.

그리고 5분 후, 나는 거짓말처럼 기절하듯 잠들었다.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정보 수집 동의], [주의사항] 문구는 왜 작은 글씨로 보이지도 않게 쓰는 걸까? 그걸 다 읽어 보는 사람이 있을까?

제발 나만 이렇게 대충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빙의물 시크릿 파티.

그것은 캐시 이벤트가 아니었다.

[REAL 로판 빙의 이벤트.]

나는 반짝이는 시스템 창을 보며 솜사탕을 물에 씻은 너구리마냥 황망히 눈을 깜빡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X 같은 상황에 당황할 수 있지만, 로판 작품을 10작 이상 달려 본 사람이라면 바로 상황이 파악된다.

‘나 빙의했구나.’

끄덕.

‘그래, 저건 시스템 창이고.’

끄덕.

홀로 상황을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으로 상세 안내서를 확인해 주세요.]

나는 언제 손에 쥐어진지도 모를 태블릿으로 안내서를 읽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최근 플랫폼들은 웹소설의 웹툰화를 넘어 가상현실 게임화를 진행하고 있다 한다.

이미 100개의 게임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그 콘텐츠 검증을 위해 체험단을 모집한 거다.

[……사용자 동의하에 접속이 이루어지며, 문제 발생 시 당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나는 장문의 설명문을 보다 울컥했다.

사람으로 베타 테스트라니! 이래서 IT 천재들은!

나는 대한민국의 콘텐츠 세계화를 위해 힘쓰는 인재들을 매드 사이언티스트 취급하며 태블릿을 집어던졌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플랫폼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물건을 주었다.

과일 로고가 박힌 노트북, 태블릿 피시, 스마트 워치.

눈을 뜬 순간 내가 잠시 빙의가 아니라 납치를 의심한 이유였다.

나는 태블릿에 대문짝만하게 뜬 PDF 뷰어를 끄고, 상자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메리예요.”

문밖으로 들리는 맑은 목소리에 흠칫했다.

……저분이 빙의물의 NPC, 개인 시녀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빙의물에서 시녀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우리 아가씨가 최고라며 여주를 최애로 아껴 주는 주접 타입.

주접 시녀분들은 정보를 많이 풀어 빙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여주의 가족에게 일러바치는 인간 CCTV 타입.

이들은 보통 여주에게 혼나며 사이다를 안겨 준 뒤 소멸한다.

저분은 어떤 타입이려나.

나는 긴장감에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높이 들린 시선 때문에 순간 방 전경이 눈에 담겼다.

지나치게 화려한 실크 침대와 황금 캐노피.

일단 돈 많은 집에 빙의한 모양이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 하나를 발견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빙의물 여주의 90%가 돈이 많거나, 돈이 많아질 예정이라는 클리셰가 이렇게나 감사할 수가 없다.

똑똑.

“아가씨?”

애처로운 부름을 계속 듣고 있자니 무시하기 미안해 심장이 저렸다. 하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하냐고!

‘들어오도록.’

‘응. 들어와?’

‘……이리 오너라?’

그냥 자고 있을 테니 몰래 들어와 주면 안 될까?

나는 고민하다 협탁에 있던 물 잔을 쳐다봤다. 그리고 슬쩍 잔을 밀어 떨어뜨렸다.

쨍그랑!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죄송합니다. 들어갈게요!”

얼른 침대에 누운 나는 실눈을 뜨고 문을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에 녹안. 코끝에 박힌 주근깨. 흡사 하이틴 여주를 떠올리게 하는 상큼한 미녀가 들어왔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으응.”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들어온 목적이나 빨리 말해 줘!

겸사겸사 내 이름도!

나는 게슴츠레 눈을 깜빡이며 그 시녀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시녀분은 주접 시녀신지 충직하게 정보를 흘려 주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셔요.”

오, 일단 공녀인가 보네. 신분 굿.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셔야죠. 잘하면 후견인이 되어 주실지도 몰라요.”

……응? 후견인이라니. 그럼 나 공녀가 아니야?

“후견인?”

시녀가 갑자기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도 안 한 귀족 여성이 혼자 살아가기엔 무서운 세상이니까요.”

혼자 살다니?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해 시녀를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초점이 잘 안 맞는 걸 보니 동공이 흔들리고 있나 보다.

“주인 어르신도 마님도 워낙 좋은 분이셨잖아요. 다들 아가씨를 도와주겠다고 하시는 게 당연하죠.”

“좋은 분이셨다고?”

왜 과거형인데?

순식간에 시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물론, 아가씨의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좋은 분들이실 거예요.”

그녀가 내 머리를 다정히 넘겨 주며 말했다.

“장례 치르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

잠시만. 빙의하자마자 부모님을 잃었다고?

값비싼 소품이나 시녀를 보아하니 좋은 부모님들 같았는데,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역시 충직한 정보형 NPC…….

그녀 덕분에 나는 내가 부유한 남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 기부를 많이 하신 부모님의 따스한 성정을 따라, 전 재산이 기부될 예정이라는 슬픈 정보가 뒤따라 붙었다.

부모님은 내가 금방 좋은 혼처를 찾아 떠날 거라 생각하셨고, 또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실 줄 몰라 유언장을 그리 작성해 두셨다고 한다.

기껏 부잣집에 빙의했는데 알거지로 시작한다니.

“힘내세요. 공작님이 잘해 주실 거예요. 분명 아가씨 데뷔탕트도 주인님 못지않게 잘 챙겨 주실 거고요.”

또 추가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올해 데뷔탕트를 앞두고 있다는 것.

즉, 나는 아직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용케도 공작이 내 소식을 듣고 날 후원하겠다며 찾아왔다. 그 이유는 글쎄…….

“수도까지 아가씨의 아름다움이 소문이 났나 봐요.”

……혹시 나 세계관 공식 미녀인 건가?

거울 속 얼굴은 확실히 자기주장이 강했다. 부드러운 금발에 바다처럼 파란 눈동자. 대충 구르면서 봐도 미인이었다.

그런데 거울을 확인하고 나니 공작에 대한 마음이 짜게 식었다.

참나, 얼굴 보고 달려온 공작이라니?

호색한의 냄새가 난다. 배 나오고 나이 많은 엑스트라겠구만.

로판에 들어왔는데 개안은 못 할망정 첫판부터 눈을 버릴 위기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시녀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

나는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레이디 데이지, 얼굴이 많이 상했군.”

이해합니다.

매일 거울로 그쪽 얼굴만 보시다가 다른 사람 얼굴을 보면 만족스럽지 못하겠죠.

“아닙니다. 각하.”

나는 시선을 들어 그를 힐끔 쳐다봤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서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안 돼! 방금 막 상을 당했는데 이러면 캐붕이잖아.

플랫폼이 개연성을 버렸다고 나까지 캐붕하면 안 돼.

왜 안 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으나, 빙의물 다독으로 학습된 주입식 캐붕포비아에 나는 얼른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진실의 광대가 제멋대로 진짜 광대마냥 씰룩씰룩 춤을 춰 대는 탓에 힘들었다.

내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존잘 그 자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천사의 현신이었다.

이제야 좀 로판에 빙의했다는 게 피부로 다가온다.

이렇게 이 남자를 따라가서 유니콘의 플러팅을 구경하면 되는 건가?

그러나 거대 플랫폼의 전개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숙부께선 참 좋은 분이셨지.”

네? 숙부요?

놀라 그를 쳐다보자 그가 고소를 머금었다.

“인정해. 그동안 내가 무심했지. 하나뿐인 내 사촌에게 이제야 오라비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사촌…… 오라버니?

“맹세하지. 그대가 평생 안온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에테르가의 비에른 알폰스가.”

혹시…… 이거 근친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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