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 개싸움
잘 싸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치용의 전투 능력은 탑 오브 탑이다.
문제는 상대가 더 잘 싸운다는 거였다.
퍽!
“꾸엑!”
치용을 알게 된 후 처음 듣는 비명.
돼지 멱이라도 따는 줄 알겠다.
“안 도와 ”
지친 얼굴로 인준이 물었다.
“우리 상대도 저기 버젓이 서 있는데 돕기는.”
인준이 격파한 이들 뒤로 보슬과 존, 또 다른 천 명이 온다.
“으라라라라아!”
무엇보다 저렇게 신이 난 치용을 말리다니, 무리다.
주황 행성에서는 답지 않게 진지하게 싸우더니 여기서는 또 아니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세주의 눈이 보슬에게 향했다.
“저 새끼는 뭐가 좋아서 옷까지 차려입고 왔어.”
전투복도 아니고 평소의 복장도 아니다.
어디 파티라도 가는 건지.
꽈르르르릉!
하늘에서 굉음이 울린다.
곧 하늘을 빽빽하게 채울 만큼, 먹구름이 몰려온다.
꽈르릉!
벼락이 치고, 빛이 번쩍인다.
하늘이 이 싸움을 보며 손뼉이라도 치나 보다.
저리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니.
세주의 눈은 보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본 처음부터 지금까지.
‘브로.’
-알아 나도.
불안감이 가슴을 채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불길한 예감이다.
그래서 죽어라고 머리를 썼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단련했다.
그런데도 이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 하는 수천의 회귀에서 저자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그게 몸이 기억하는 걸까
‘브로.’
-언제와 같아. 할 수 있는 걸 할 거잖아.
맞다.
언제와 같다.
‘정답이다.’
불끈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우우우우웅!
그러자 앞쪽에 미증유의 거력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압력이다.
“핫!”
그러자 뒤에서 장왕이 기합을 내지르며 나선다.
-염동력.
보슬의 옆 존이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인다.
-장왕의 능력으로는 잘해야 앞으로 3초.
“으라라압!”
퍽!
코피가 터진 장왕이 기합을 내질렀다.
지구에서는 초일류 사이키커지만, 리미트리스 급 사이키커에게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벼락을 꺼내고 겨눴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유진이 손을 썼다.
놈의 머리 위다.
광편 수류탄 다섯 개가 날아갔다.
용케 기척도 하나 없이 던졌다.
꽈과광!
하지만 그건 보이는 순간 터졌다.
“같잖은 놈들.”
존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걸었다.
장왕과 그사이에 선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널 죽이면, 네 군주라는 새끼의 기분이 더러워질까 ”
당한 만큼 갚는다. 그게 유진의 지론이다.
김소혜 박사가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나.
화가 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꽈르르릉!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들리고.
펑, 하고 땅에 꽂히는 벼락이다.
그들이 있는 곳 바로 옆이다.
쏴아아아아아아!
그러곤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는 제가 합니다.”
“해.”
세주는 유진에게 허락하고 앞으로 나섰다.
보슬은 여전히 나서지 않는다.
그는 어디선가 소파를 가져와 앉았다.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전장 한복판에서 무슨 짓인지.
그는 보랏빛 배리어를 친 뒤, 비 한 방울 맞지 않았다.
투두두둥.
-움직인다.
천의 병력이다.
말이 천이지, 바글바글하다.
뒤에서 누군가 세주의 어깨를 잡는다.
“내가 해.”
“무리하지 말라니까.”
이미 노블 패스가 찢길 만큼 아플 거다.
그런데 뭘 더 한다고.
“내가 해!”
그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말릴 수가 없었다.
인준은 자신을 잘 알았다.
그는 치용만큼 싸우질 못한다.
유진만큼 재능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싸움을 앞서, 그저 구경만 하는 방관자로 남는 건 더 싫다.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인준은 맹세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의 끝을 보기로.
그 맹세의 끝이 코앞이다.
“내가 해.”
중얼거리며 한 올의 힘도 남기지 않고 끌어올렸다.
자신이 할 일은 저 빌어먹을 형님과 다른 새끼들이 싸우게 하는 거다.
잔챙이는 자신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 가진 힘이다.
딸깍.
그는 작은 캡슐을 까서 입에 넣었다.
마약이나 진통제 따위는 아니었다.
세주의 에너지 바를 보고 연구하고 만든 거다.
평소에 에너지를 따로 끄집어내 보관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급한 순간 먹는 걸로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다.
가능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아팠다.
그것도 많이.
‘끕.’
신음을 삼킴 인준은 전신에 차오르는 에너지를 느끼며 다시 공중에 떠서 빛의 구체를 띄웠다.
꽈과과광!
방금 있었던 일의 리와인드다.
그리고 바닥으로 훌훌 떨어진다.
실버가 다시 그를 받았다.
세주가 앞을 보니, 남은 이들의 눈에 공포가 어린 게 보였다.
저들도 인간이다.
감정 없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다.
“그만!”
치용의 격투와 유진의 격투.
그리고 인준의 폭력 그사이다.
보슬이 외쳤다.
그 한 마디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의 손을 멈추게 했다.
-에너지 파장 감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재주도 좋네.’
보슬은 세주를 보고 앞으로 걸었다.
“행성에서 분탕질 치고, 통일은하정부 사단 병력은 박살 내고, 그리고 여기에 포격하는 것도 부족해서 내 호위대도 거즘 죽였네.”
1사단과 2사단은 그의 호위대를 겸하는 병력이다.
“그래서 ”
세주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재밌었어 ”
“그럭저럭. 네가 알아서 죽어주면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꽈르르르르릉!
둘 사이로 벼락이 내리친다.
펑, 하고 바닥이 파이고, 푸른빛이 잔상을 남긴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는 둘을 젖게 할 수 없었다.
보슬은 양손을 펼쳤다.
그를 감싼 보랏빛 장막이 비눗방울처럼 늘어났다.
-상대 의도 파악 불가.
피할까 아니면 덤빌까
세주는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그 사이 보랏빛 장막이 단숨에 둘을 사이에 두고 원형 형태로 변했다.
“음.”
짧은 신음을 흘리자, 보슬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왜 주저했어, 덕분에 너 후회하겠다.”
무슨 헛소리인가 싶다.
“산, 존. 다 죽여라.”
쿠왕!
그 말과 함께 장막 너머로 강대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런 빌어먹을.
리미트리스 급이라 하지만 그것도 차이가 있다.
저 밖에서 김산이라는 녀석이 보이는 힘은 적어도 자신 이상이었다.
“안나! 치용 서포트!”
외침과 동시에 존 쪽도 바라봤다.
유진은 도울 사람이 없다.
인준은 쓰러졌고, 남은 건 팽하고 실버다.
전력 차이가 있다.
아니, 월등하게 열등하다.
-내가 틀렸어.
‘아니야.’
적이 장난친 거다.
“계산이 틀렸지 쿡쿡.”
입가를 가리며 웃는 보슬이 보인다.
놈의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오한이 돋았다.
“알았나 ”
“어드바이저가 어디서부터 만들어져 왔는지는 알아 ”
“알 게 뭐야.”
“처음에는 계산기, 그다음은 컴퓨터, 갖은 전자기기들, 인간을 돕는 AI.”
유진이 위험하다.
얼핏 보면 치용의 상태가 더 안 좋겠지만.
반대다.
리미트리스 급까지 성장한 건 유진이지만, 잠재력은 치용이 위다.
지구력, 재생력 모두 치용이 위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유진이 먼저 뛰지만 골에는 치용이 먼저 들어올 거다.
더구나 안나가 곁에서 돕는다.
‘장막 깨자.’
-성질 파악 중.
전신에 힘을 끌어올리려는 순간이다.
“네 어드바이저, 양쪽 전력을 계산했겠지 그리고 승산을 점쳤을 거야. 더구나 네 어드바이저는 엄청나게 뛰어난 물건이었을 테니까. 이제까지처럼 넌 믿었을 거고.”
정답이다.
프로비던스는 계산했다.
작은 전투부터, 대규모 전장까지.
모든 걸 계산하고 파악했다.
프로비던스는 말하곤 했다.
자신의 계산 밖에 있는 인간은 세주뿐이라고.
그래서 취한 작전이다.
주황 행성에서의 작전도.
남은 인간을 돌려보내는 것도.
다수의 싸움보다 소수 대 다수의 싸움이 유리하니까.
김산과 존을 잡는다.
그리고 힘을 합쳐 보슬을 잡는다.
단순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전법.
“무슨 짓을 한 거냐 ”
세주는 쓴웃음을 흘렸다.
에너지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EMP 쇼크 맞아봤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여기는 논 에너지 에어리어야. 너도나도 에너지를 쓸 순 없지.”
“하.”
빌어먹을.
꽝! 꽝!
폭음이 연달아 터진다.
치용 쪽이다.
[내가 돕는다!]
찢어지는 팽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멍청한 여자.
유진의 싸움에 끼어들면 안 되는데.
그럼 죽는다.
“자,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
보슬이 웃으며 묻는다.
시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주는 불쾌한 감각이 가슴을 채우는 게 느껴졌다.
그건 절망이라 부르고 좌절이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
부서진다.
압도적인 힘 앞에 치용은 자신의 아머가 깨지는 게 보였다.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꼈다.
수많은 경험치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시파, 나보다 세네.’
근거리 산탄 수법도 막히고.
깜짝 놀라라 타는 칼 수법도 막힌다.
숨기고 찌르고 베는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적은 치용보다 능숙했다.
미친 듯이 싸우느라 주변 상황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저 치고 박는다.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세를 올린 김산이란 인간은 변했다.
에너지 화력뿐 아니라 겉모습도 함께다.
구현된 에너지가 하얗게 뭉치더니 야수의 모습을 그린다.
“영광으로 알아. 나의 뇌수에 죽는걸.”
에너지 컨트롤이 극에 달하면 구현된 에너지는 모양을 만든다.
김산의 수준이 그랬다.
짐승의 발톱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피하기에는 너무 강하다.
타이밍도 늦었다.
내줘야 할 건
어깨 아니면 팔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꽝!
고통을 상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앞, 황금빛이 가로막는다.
안나 휴이츠다.
그녀가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머리를 쓰자.’
“멍청이.”
안나가 말했다.
“싸워.”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치용은 생각을 포기했다.
콰우우우우우!
동시에 등 뒤에 날개가 돋았다.
절벽 끝에 선 순간, 인간은 아찔함을 느낀다.
치용은 스스로 리미트를 풀었다.
리미트리스, 에너지가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간다.
“우아아아아아!”
그는 그대로 김산이라는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짐승의 모습을 한 이에게 날개를 단 괴수가 덤빈다.
꽈과과광!
다시금 폭음이 터졌다.
***
계산이 틀렸다.
세주의 계산도, 보슬의 계산도.
“이런.”
한쪽은 절망했으나, 다른 한쪽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
치용이 분전한다.
놀라운 모습으로 싸운다.
‘브로 ’
프로비던스도 답이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새끼가 한 게 무엇이든, 에너지가 한 올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 맞은 EMP보다는 상위의 기술이란 걸 알겠다.
프로비던스도 잠들었으니.
어깨에 놓여 있던, 작은 기체를 잡아서 내려놨다.
“어드바이저를 소중히 다루네 ”
여전히 똑같은 자세다.
쇼파에 앉은 여유로운 모습.
세주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어떻게 보면 특기.
어떻게 보면 발악.
잠시만, 저들의 싸움을 잊자.
유진도, 치용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아, 그리고 말 안 한 거 있는데, 인간들 안 죽인다는 거 다 뻥이야.”
시파, 믿지도 않았다.
훙.
보슬이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킨다.
적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리는 일이지만,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적도 에너지를 쓰지 못한다면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쳐 쓰러진 인준의 옆이다.
실버의 뒤쪽.
빛이 모이더니 칼날이 떨어진다.
서걱!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동시에 실버의 팔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칼날의 끝이, 인준을 향한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세주는 몸을 돌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개싸움뿐이다.
세주는 그대로 보슬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