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 괴물과 괴물
“통일은하의 군주라는 새끼가 한가하냐 ”
“인류의 구원자라는 너도 한가하디 ”
먼저 분탕질을 친 건, 세주다.
받아치는 보슬을 보고 세주가 피식 웃었다.
두둥!
보슬의 머리 위 빛이 터진다.
동시에 확 하고 보랏빛 장막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기습 싸울까 ”
보슬이 묻는다.
등 뒤로 몰래 유도탄을 한 방 몰래 쐈다.
“설마, 인사야 인사.”
“나도 그럼.”
-왼쪽!
프로비던스의 목소리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왼쪽 팔을 훑는다.
팍!
피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파아악!
잘린 팔뚝에 피가 흐른다.
“어이쿠, 못 피했네.”
보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리릭.
빛으로 만들어진 채찍 같은 것이 보슬의 손으로 돌아간다.
잘린 팔뚝에서 극통이 밀려든다.
‘브로.’
-진통제 투여.
퓨슉.
프로비던스가 앉은, 어깨부터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온다.
고통이 밀려나고, 쾌감이 찾아온다.
어금니를 깨물고 앞을 보자, 보슬이 어깨를 으쓱한다.
“아파 ”
저 미친 새끼가.
가능하면 패주고 싶다.
“인사가 과해.”
“내가 원래 좀 진한 걸 좋아해서, 거기에 확실한 것도 좋아하지. 인사도 꼭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여기서 또 다른 모드를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안 죽었지 ’
-셋 모두 살아 있어. 적어도 지구인은 한 명도 안 죽었지.
보슬이 있는 곳과 더불어 8은하 인간이 쳐들어온 곳을 통틀어, 죽은 이가 없다.
셋 중 하나는 간신히 숨만 붙은 모양새지만, 죽진 않았다.
적어도 김보슬은 여기에서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거다.
의도한다면 여기 셋뿐 아니라 수천, 수만 단위를 단숨에 죽일 놈이다.
놈이 온 목적이 적어도 대량 학살은 아니라는 뜻이다.
“일단.”
주변을 둘러본 세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모드를 켰다.
‘모드 온, 재생의 성역Sanctuary of Regeneration.’
회복과 치유력에 있어선 최고의 모드다.
일반, 레어, 유니크를 넘어서는 레전드 모드이기도 했다.
몸 안에 찬 에너지가 뭉텅이로 쑥 빠져나가며, 주변에 흰빛이 어렸다.
세주를 중심으로 반경 50m.
그 안에 속한 인간은 절대 죽을 수 없다.
머리가 터지지 않는 한, 심장이 꿰뚫려도 안 죽는다.
‘아무리 봐도 좀비 모드가 더 잘 어울리지 않냐 ’
재생의 성역보다 그 이름이 낫다.
세주가 투덜거리자, 프로비던스가 답했다.
-하지 마.
단호하고 명확한 답이다.
잘린 팔이 자라난다.
이전 이모탈 엔젤스보다 상위 모드다.
그보다 회복력은 느려도, 일단 이건 범위형 모드다.
보슬에게 습격을 당한 셋이 꿈틀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따뜻해.”
티셸이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어드바이저가 만든 모드지 ”
보슬이 입을 연다.
단숨에 핵심을 꿰뚫는 말이다.
맞다.
재생의 성역은 애초에 프로비던스가 보유한 모드가 아니었다.
세주가 바라는 걸, 프로비던스가 재조합해서 구축한 모드다.
“아닌데.”
그렇다고 얌전히 맞다고 해줄 순 없으니, 최대한 얄밉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입술을 쭉 내민다.
그 사이 고속 재생을 마친 왼팔을 들어 주먹까지 흔들어 준다.
완벽한 도발이다.
스스로 점수를 주자면 10점에 9점 정도는 줄 만한 태도였다.
이전 분탕질도, 지금의 도발도 보슬은 웃어넘겼다.
적어도 세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 아무도 안 죽였다. 자꾸 깝치면 누구 하나 죽인다.”
적지에 혼자 쳐들어온 놈이 분명한데, 제가 무슨 상산 조자룡이라도 되는지 당당하기 그지없다.
자세를 바로 하고 세주가 그를 직시했다.
“그럼 이제 어른답게 주먹 말고 말로 대화를 나눠 보자.”
“어른을 대할 때는 예의 바르게 해. 동방예의지국이잖아.”
저 새끼는 8은하의 대한민국, 이쪽은 9은하의 대한민국.
흔히 말하는 평행우주론이다.
그 은하라는 게 9개가 있는 거고.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네. 늙은 양반.”
그래도 성격은 어디 안 간다.
세주가 툭 내뱉자, 보슬도 더는 토 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너 여기 사람들 죽는 거 싫지 ”
“그렇다면 ”
“안 죽일 게.”
악마의 유혹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다 죽어가던 티셸도 살아났으니.
그가 죽인 사람은 없다.
그건 사실이다.
도리어 반격으로 8은하의 사람들이 죽었다.
세주의 눈이 시신으로 향했다.
이전 이곳에 남은 마크, 티셸, 상찬의 조가 죽인 적이다.
“무슨,”
개수작이냐고 말을 하려는데, 보슬의 손에서 다시 빛이 머문다.
아까의 그 채찍이다.
대강 재생이 돼서 모드도 끈 상태다.
“뜻으로 하는 말이시온지 ”
-뭐해 형
‘있어 봐.’
냅다 들이받기에는 장소도 위치도 안 좋다.
문제는 저 김보슬이란 새끼의 저력의 끝이 안 보인다는 거다.
3개월을 놈의 정보를 모았고, 종합한 결과는 하나였다.
정면 승부는 절대 무리.
“말 그대로.”
“안 죽인다고 ”
“안 죽여.”
“왜 ”
“내 마음.”
‘브로, 계산기 돌려 봐. 저 새끼 죽빵 한 대만 때리자.’
-100%.
‘불가능하다고 ’
-아니, 가능해.
‘그래 ’
-그 대신 형 뒤에 있는 저 경찰 양반들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몰살당하겠지. 명심해. 형. 저 새끼는 형만큼이나 쪼잔하고 소심한 놈이야.
‘…시바.’
이해가 되면서도 기분이 나쁘다.
프로비던스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좋아. 죽이지 마.”
“약속하지. 참고해. 내 약속은 은하에서 제일 무겁다.”
“네…,”
똥 굵다고 말하고 싶다.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놈의 양손에 빛이 머물고 채찍 같은 게 흔들린다.
“잘나셨네.”
라고 순화해서 말을 끝냈다.
딱.
보슬이 손가락을 튕겼다.
깜짝 놀라 방어 자세를 취한 세주다.
하지만 어떤 불길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이다.
보슬의 뒤편이다.
홀로그램이 펼쳐지며, 한 행성을 가리킨다.
“주황이라 부르는 행성이다.”
“그래서 ”
“네가 원하는 시각,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와라. 저기서 기다리마. 기회를 주겠다.”
“무슨 기회 ”
“날 죽일 기회.”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3개월의 스파이 생활을 통해 얻은 정보를 종합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통일은하정부는 김보슬이었다.
통일은하정부는 김보슬이 만들었고, 꾸몄으며, 관리한다.
유일한 통치자이자, 그 정부의 조물주다.
그가 없으면, 통일은하정부도 없다.
그가 없으면.
‘우리를 위협하는 적도 더는 없겠지.’
-사탕발림일 수 있어.
‘그렇다고 해도 거절은 무리야.’
“내 쪽의 병력은 다 파악했지 ”
“조금.”
“재주가 좋다. 딱 그 타이밍에.”
“운이 좋았지.”
“매드는 어디로 갔지 ”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
그 말에 보슬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유심히 보던 세주 외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할 정도다.
“우리 싸움은 양쪽 은하가 지켜볼 거다. 이 싸움이 끝나면 둘 중 하나는 무너질 테니, 그 과정을 모른 채 살아가란 건 가혹한 처사겠지.”
얘기를 듣다보니, 이 자식의 말의 저의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지구의 사람 누구도 죽이지 않을 거고.”
“으응.”
보슬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널 죽이고 싶어 할 테니, 싸워도 주고 ”
“으응.”
세주의 표정이 굳는다.
손아귀를 쥐었다 펴며, 적을 직시한다.
확인해야 했다.
확실하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큰 문제가 될 테니.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자.
이놈은 세주가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괴물이자, 변태일 수도 있다.
“하나 물어도 될까 ”
탁한 목소리다.
그 순간 긴장감에 땀이 흐를 정도니.
“물어.”
보슬이 유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 있는 태도, 싱글거리는 얼굴.
생각하자.
분탕질을 치고, 어떤 도발을 해도 저놈은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 이유를 짐작한 세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너.”
“응 ”
“나 좋아하냐 ”
침묵이 흐른다.
찌지지직!
잠시 후, 보슬의 양손에 빛이 머물다 못 해 터질 듯이 솟구쳤다.
“그냥 죽자.”
-그냥 뒈져라.
프로비던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거든다.
“아, 시바, 아냐 ”
“미친 새끼.”
웃지 않는 보슬이 손에서 빛을 뿜었다.
“야!”
단숨에 커버링 광체로 전환, 에너지 배리어를 겹겹이 쳤다.
꽈과과과광!
폭음이 흘렀다.
“아차차.”
앞에서 보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죽을 뻔했네.”
배리어 뒤에서 세주가 입을 열었다.
“살았네 ”
보슬의 놀란 얼굴이 보인다.
“간신히.”
그 얼굴에 보슬이 묻는다.
“아까는 왜 안 피했냐 ”
“네가 너무 빨라서.”
서로가 가진 걸 전부 보일 리가 없다.
둘은 적이다.
“아니지 ”
그 위로 세주가 다시 묻는다.
콰아아.
보슬의 양손에 빛이 다시 모인다.
“한 방 더 먹여 줘 ”
“아니, 아니면 됐지.”
보슬은 그걸 보며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 새끼는 확고하게 미친놈이라고.
-난 가끔 형 머릿속이 궁금해. 나에게 형의 뇌를 해부할 영광을 줄 수 있을까
‘뭐래, 이 미친 기계 새끼가.’
세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 제일 무서운 변태는 아니다.
그 점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무서운 이를 굳이 단어로 표현하자면.
힘센 게이였다.
그리고 저 김보슬이 남자를 특히 자신을 좋아했다면 어마어마하게 힘이 센, 관두자.
손가락을 들어 홀로그램을 가리키며 세주가 물었다.
“저기서 싸우자 이거지 근데 사람들한테는 왜 보여준다는 거야 ”
“자신들의 생사를 가늠할 싸움을 어떻게 모르게 할 수 있지 더구나, 넌 왜 인간을 위해 싸우는 거냐 ”
“그건 알 거 없고.”
그래. 서로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나랑 싸워 준다고 ”
“그리 할 거다.”
보슬이 고개를 끄덕인다.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형님!”
치용의 목소리다.
그뿐 아니라, 인준과 유진도 함께다.
보지 않아도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기세는 남다르다.
“오호, 얼굴로 여자를 꾀어낸 기생오라비 새끼가 저기 있구나.”
보슬이 유진을 가리킨다.
딱!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빛이 허공에 나타나 화살처럼 쏘아진다.
꽝!
놈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세주는 벼락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펑!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서로의 공격이 상쇄된다.
“안 죽인다며 ”
“죽이려고 안 했어. 고자 만들려고 했지. 버릇이 아주 안 좋은 놈이니까. 그리고 전 은하를 통틀어 저런 얼굴을 가진 남자는 없는 게 평화로운 일일걸 ”
동의할 뻔했다.
유진의 얼굴은 남자의 적이다.
“그래도 안 돼.”
자신의 사람을 죽게 놔둘 수 없다.
“고자만 만든다니까.”
또 혹할 뻔했다.
“그것도 안 돼.”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 그게.
타다닥
뒤에 셋이 붙는다.
“죽입니까 ”
“쏴 ”
“커버할게요.”
치용, 인준, 유진이 한 마디씩 던진다.
“다들 아서라. 인사하러 온 손님이다.”
“안녕, 반가워. 인사는 말로 아니면 우리 식으로 ”
“말로.”
보슬의 말에 세주가 끊어 답한다.
“말로 아니면 뭐 ”
치용이 그 말에 사납게 상대를 노려봤다.
“물려 볼래 ”
치용이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달려들진 않는다.
“사양하지.”
보슬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한다.
“빈손으로 오는 게 예의가 아니라, 선물 하나 들고 왔는데.”
보슬이 손을 들자, 허공에 홀로그램 형상이 뜬다.
퉁.
곧 그가 불러낸 물건이 바닥을 구르며 유진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사람의 머리다.
그것도 잘린.
즉, 죽은 이의 머리다.
“…이 새끼가.”
얼굴을 확인한 유진이 상소리를 뱉는다.
명백한 분노다.
세주도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3개월 전, 통일은하정부에서 유진이 작전을 통해 알았던 사이.
밤을 함께 보내고, 같이 시간을 보낸 여자.
김소혜 박사의 머리다.
“배신, 반란, 싫어하는 단어라.”
유진의 손이 무섭게 움직이며 기관단총을 꺼낸다.
두두두두둥!
세주가 말릴 새도 없이 광탄이 그의 배리어를 때렸다.
보랏빛 장막이 다시 그걸 막았다.
“이건 인사로 치지. 선물은 마음에 드나 ”
그 말과 함께다.
빛이 머물며, 보슬의 전신을 감싼다.
워프다.
곧 빛이 솟구치며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유진의 눈이 붉어진 게 보였다.
“형님!”
“참아.”
유진이 어금니를 악무는 게 보였다.
취향이 개 같은 새끼구나.
세주는 놈이 사라진 자리를 훑었다.
괴물.
보슬은 괴물이었다.
육체를 바꿔가며 긴 세월을 살아온 괴물.
자신 또한 괴물이다.
끝없는 회귀로 정신이 마모되어 결국 스스로 기억을 지운 괴물.
“참아.”
세주는 한 마디를 더 읊조리고 말을 이었다.
“꼭 죽여 버릴 테니까.”
“네.”
감정이 솟구쳐 흔들린 유진의 모습이다.
치용과 인준이 말없이 유진과 세주를 바라봤다.
“싸우자.”
그런 이들을 보고 세주가 말했다.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