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90. 그 새끼, 뭐하나
“어디?”
안나 휴이츠가 묻는다.
처음에 그녀가 한국어를 배웠을 때, 귀엽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욕부터 시작했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어는 욕을 먼저 배우면 편한 법이다.
그리고 하나둘 한국말이 늘어나면서, 그녀는 꽤 많은 군인의 이상형쯤이 됐다.
금발의 푸른 눈, 잘록한 허리와 적당한 볼륨은 누가 봐도 절세미녀다.
그 와중에 털털하기까지 해 여군들에게 미움도 받지 않는다.
안나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은 매력의 극점을 찍었다.
거기에 전투력으로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견줄 만한 사람도 드문 존재다.
호필은 자기가 여자라도 덤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남자라도 덤빌 수가 없다.
자신의 집무실에 쳐들어온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어디?”
“모른다니까.”
똑같은 질문만 몇 번째인지.
지겨울 만도 한데, 그녀는 지치지 않았다.
“왜 몰라?”
“나한테도 말 안 하고 갔다고.”
“연락은?”
“없어.”
“3개월 내내?”
“연락 오면 먼저 알려준다니까.”
“머저리.”
그 말과 함께 안나가 나갔다.
존댓말을 못 배운 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맨 처음 안나에게 욕을 알려 준 놈을 찾아서 주리를 틀어버리겠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솟았다.
“후.”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한국군의 총지휘관이자, 대통령 수석비서에게 직통으로 연락을 받는 몸이다.
거기에 지구방위대의 총사령관도 겸직 중이다. 하지만 일은 대부분 책상에 앉아서 처리하는 편이었다.
전투는 세주에게, 보고서는 호필에게.
싫은 건 아니었다.
호필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쪽이 잘 맞는 인간이었다.
[뭐해?]
안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면, 팽은 은근슬쩍 몸을 들이밀었다.
[대장이 날 버린 걸까?]
일과 중 하나였다.
반세주가 부대원을 데리고 떠난 지 1달이 지난 뒤부터다.
안나가 찾아오고 나면 팽이 찾아왔다.
어느 날은 팽이 먼저 오기도 했다.
둘의 목적은 같다.
[왜 대장은 날 두고 갔을까?]
몹시 우울한 얼굴로 묻는다.
“나라고 알겠냐?”
[몰라?]
“몰라!”
버럭 화를 낸 호필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세주는 눈에 차지 않아 전투 요원이 아니라 수송선 파일럿쯤으로 쓰지만.
호필의 입장에서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외계 인류다.
저 여자가 갑자기 미쳐서 달려들면 5초 이내로 자신의 목숨은 없다.
뒤에 호위가 상시 대기 중이지만.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크롬 팀 몇 명으로 막을 수는 없다.
장왕이나 나기주 정도는 있어야 했다.
[왜 몰라?]
한 번만 더 같은 질문을 들으며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모르니까 모르지.”
차분하게 그녀를 달랬다.
우울증이 극심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호필이 보기에 지금 팽은 정상이 아니었다.
손을 덜덜 떠는 건 금단 증상으로 보인다.
[대장이 보고 싶어]
어디 있는지 알면, 익일 특급으로 쏴주고 싶다.
안나든, 팽이든.
하고 많은 사람 중 자기만 괴롭힌다.
이유는 짐작한다.
자신은 총사령관이고 세주의 거취를 알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포지션에 있다.
하지만 정말 모른다.
‘이 새끼는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지, 말없이 째서 왜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드냐고.’
그저 말없이 원망의 화살을 돌릴 뿐이다.
팽에게 화를 낼 순 없다.
그렇다고 안나에게 성질을 낼 수도 없다.
뚜르르르.
그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바빠서, 찾아볼게.”
팽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수화기를 들자, 익숙한 부관의 목소리다.
“또 연락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세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지켜야 할 이들을 알려줬다.
가족과 그의 친척.
거기에, 한 명 더 강 닥터다.
호필도 안면이 있는 여자다.
능력 있고 발도 넓은 여자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대형병원의 이사장인 건 비밀이다.
아마 세주도 모를 것이다.
자존심이 센 강슬은 아버지와 관련된 일들을 전부 거부해왔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힘까지 이용해 군 내부 연락 수단을 찾았다.
어지간하면 공개되지 않지만, 정부 수뇌부 쪽에는 당연히 알려져 있다.
그 연락처로 강슬은 물었다.
세주 씨는요?
“아니, 염병. 여기가 개인 사서함이야? 그딴 연락이나 받게?”
“시정 하겠습니다!”
“적당히 끊어!”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강하게 나갔다.
그랬더니 대통령 수석비서관이 직접 연락을 해왔다.
어떻게 힘을 쓴 건지, 저기서 연락이 오는지.
반세주의 실종 사실이 진짜냐고 수석비서관이 물었다.
염병이다.
아주 제대로 염병이다.
호필은 직접 강슬을 만나, 중요한 작전 중이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래도 안나와 팽 보다는 양반이다.
매일 찾아오는 둘에 비해 강슬은 2주에 한 번 연락한다.
“아직 작전 수행 중이라고 해.”
“네.”
‘내가 무슨 개인 비서야?’
미친 구국의 영웅께서 자리를 비운 탓에 호필의 흰머리가 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3개월째 실종이다.
호필은 대외적으로 중요 작전 수행 중이라고 전했다.
나호필도 궁금했다.
가기 전에 잠깐 뭐 좀 가져온다고 했던 미친놈의 생사.
살아는 있는지, 고작 넷이서 뭘 하고 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나도 묻고 싶다. 그 새끼 뭐하나.’
*
“정호 씨.”
“응?”
“나 자기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그 말에 보기 드문 미청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백의 침대 위, 나체로 얇은 이불만 덮은 남녀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너무 빠지지 마. 나 좋아하면 끝이 안 좋아.”
“치. 또 그 말이다.”
“잘 생기고, 유머러스하며, 신비스러운 남자는 위험한 법이라니까.”
“그러니까 본인이 잘생기고, 유머러스하며, 신비스럽다?”
“아냐?”
여자가 남자의 가슴 위를 쓰다듬다,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출렁이는 가슴이 이불 위로 드러났다.
“맞지. 우리 결혼할래?”
“프러포즈를 침대 위에서? 낭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중요해?”
“난 문과라서 낭만이 중요해. 이과 나온 김 박사님과는 다르지.”
“풉!”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다시 불꽃이 튀었다.
“아.”
정호의 손길이 얇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가 신음을 흘린다.
짧고, 강한 불꽃이 침대 위를 휘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게 공기를 데웠다.
“정말, 밝혀.”
“싫어?”
싫기는 김 박사는 눈을 감았다.
만난 지 30일, 그녀는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았다.
한바탕 일을 치른 정호는 몸을 일으켰다.
적당히 자란 검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넘긴 그는 침대 위 협탁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
꿀꺽! 꿀꺽! 꿀꺽!
“하아.”
갈증이 가신다.
일어난 김에 발을 뗐다.
방문을 조용히 열며, 침대 위를 바라봤다.
잠든 그의 연인은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용히 서재로 향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건, 그의 특기 중 하나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는 그녀의 노트북을 켰다.
위잉.
구동음과 함께 홀로그램 메뉴가 뜬다.
동시에 패스워드란 글자와 함께 여섯 개의 빈칸이 보였다.
홍채와 지문, 개인 DNA까지 감별하는 보안장치다.
패스워드라는 건 페이크일 뿐이었다.
본인이 직접 켜지 않으면, 바로 사이렌이 울린다.
정호의 손에 어느새 작은 구슬이 잡혀 있다.
그 구슬을 대자, 그대로 노트북의 보안장치가 풀린다.
개인 정보를 임시로 저장해서 보안을 뚫어내는 해킹 프로그램이다.
정호는 유유히 노트북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쏙쏙 빼냈다.
김 박사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어느 연구소의 직원이었다.
그것도 일반 연구직도 아닌 치프매니저 급이다.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곳은, 정부였다.
통일은하정부, 1연구소 팀장 김소혜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 김소혜는 두통을 느끼며 일어났다.
“…싫다.”
침대 위에서 멍하니 허공을 보며 읊조렸다.
싫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 했던 남자는.
스파이다.
노트북을 열고 정보를 빼내는 순간, 2차 보안이 발동된다.
그건 그녀의 뇌에 박힌 칩이고, 곧바로 그녀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이 있다.
보안이 뚫렸다.
벌써 세 번째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서른다섯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았다.
남자라고는 어릴 때 소꿉친구가 전부인 그녀다.
마약에 중독된 이가 그걸 끊지못 하듯, 그녀는 정호라는 폭풍에 휩쓸린 조각배였다.
그래도 이제는 알릴 때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은밀히 갈 필요도 없었다.
얇은 가운을 입고 서재 문을 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라고 생각했던 이가 자신을 속여 먹기 위해 쇼를 한 새끼라니.
“잘 잤어?”
서재에서 노트북을 켠 채, 정호라는 남자가 인사를 건넨다.
뻔뻔하다.
“뭐 해?”
“알잖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너 누구니?”
냉정해지자.
그녀의 요청으로 적어도 이곳에 서른 명의 정부 요원이 대기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눈앞의 남자는 죽는다.
강정호,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뒷조사는 이미 끝났다.
“정유진.”
그 남자가 배시시 웃으며 이름을 말한다.
저 웃음을 좋아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얌전히 잡힐래?”
“당신이 원하면.”
“이 자리에서 죽을래?”
“당신이 원하면.”
미친놈이 분명하구나.
이제 와, 자신에게 애걸한다고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당신을 대한 건 전부 진심이었어. 오해는 하지 마.‘
“개소리.”
눈물이 날 것 같다.
그의 말이 진짜 같이 들린다.
“당신이 본 나는 진짜였어. 하지만 지금 하는 짓도 진짜이긴 하지. 어지간하면 하기 싫은 짓이긴 했어.”
“잡혀.”
죽이진 말자.
구금하고 죄목을 따져서 형을 살게 하자.
그리고 출소하면.
‘그때 다시 만나자.’
그녀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최선의 방안을 생각하는 건, 그녀의 버릇이자 특기다.
“그럴 게.”
말과 함께 그의 손에 있던 홀로그램 문서가 사라진다.
어딘가로 전송했을 것이다.
찾는 건 그녀가 할 일이 아니었다.
정호, 아니 정유진은 얌전히 잡혔다.
2시간 후, 홀로그램 문서가 전송된 곳을 찾은 곳에 기동타격대가 출동했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젠장, 발 빠른 놈들이네.”
기동타격대장이 혀를 차고 돌아갔다.
허름한 4층 건물이었다.
그 바로 옆, 고층 빌딩이 있어 대비되어 더 초라해 보인다.
고층 빌딩 12층 사무실, 젠 엔터테이먼트라는 간판을 단 곳이다.
두 남자가 창가에 서서 혀를 찼다.
“잡혔네.”
“이 자식 미친 거 아니냐?”
곰 같은 덩치의 남자와 인상 사나운 남자다.
“남자의 로망이란 거지. 여자와 사랑을 하다 스파이로서 본분을 지키고 목숨을 버리는.”
치용이 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
“그 신박한 주둥이 좀 닥쳐라.”
인준이 이를 갈았다.
“…살려주세요.”
그들의 뒤, 십여 명의 사람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고 있다.
“우리가 무슨 살인마야?”
세간에는 살인마이자,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김치용, 이인준.
둘은 현재 통일은하정부의 현상금 리스트 가장 최 우위에 올려져 있다..
3개월 만에 이룬 쾌거였다.
“살려주시면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책임자인 듯한 남자다.
“좋아. 넌 살려준다. 남자답네.”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둘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간절해졌다.
저 미친놈은 이곳에 와서 모두를 감금하더니, 말싸움을 수없이 하고 있었다.
제대로 미친놈들이었다.
테러리스트라더니, 정신병자에 가깝다.
“이 새끼 여기 형님도 없고, 유진도 없다.”
“죽고 싶단 말을 길게도 하는구나.”
“오냐. 네 놈 무덤에 소주나 찐하게 뿌려주마.”
“제발! 싸우지 말고 살려주세요!”
대표가 외쳤다.
둘의 눈이 동시에 그를 노려봤다.
“넌 빠져!”
*
보슬은 9은하에서 세주가 없어진 걸 알고 그를 찾았다.
‘설마 어디로 샌 건 아니겠지?’
우주는 아직도 자신이 풀지 못한 숙제가 많다.
그중 하나에 걸리면 자신도 답이 없다.
보름동안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을 샅샅이 뒤진 그는 여러 가지 추론 끝에 매드를 호출했다.
그리고 매드가 잠적했음을 알았을 때.
‘이 새끼들 봐라.’
통일은하국, 5행성 ‘푸른’에 테러리스트 둘이 나타났다.
김치용과 이인준이었다.
“내 집 앞마당이네.”
“잡아 오겠습니다.”
감히 군주의 터전에 온 놈들이다.
산이 나섰다.
“경찰들이 알아서 하게 놔둬.”
지금 당장은 손 쓸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7행성 ‘보라’에 있었다.
원로원이 준비한 반란군이 집결한 곳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군복을 입은 보슬은 이 기회에 뿌리 깊은 반란 분자를 일시에 소거할 작정이었다.
“우린 여기부터.”
“네.”
산이 부동자세로 답했다.
넷이 해봐야 뭘 하겠냐 싶다.
보슬은 자신이 이룬 국가의 힘을 잘 알았다.
고작 넷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분탕질 정도다.
‘마음껏 즐겨라.’
준비한 것들이 대강 끝난 시점이다.
그게 끝난 즉시, 보슬은 세주를 잡으러 갈 생각이었다.
“반란군은 어떻게 한다?”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소거합니다.”
보슬의 말에 산이 답한다.
“시작해.”
곧 보슬의 눈앞에 화려한 광선이 터졌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아니, 보슬의 입장에서는 징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