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 물론
적의 목적을 알고, 캐릭터를 파악했다고 해도 할 일이 변하지는 않았다.
시뮬레이션 모드 안, 세주는 인준에게 책을 선물했다.
말이 책이지,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사방에 홀로그램 문서가 펼쳐지는 압축파일 같은 거다.
“어쩌라고.”
“특기 살리라고.”
그 말에 인준은 자신의 특기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답은 그가 아닌 옆자리의 곰 같은 남자, 치용에게서 나왔다.
“사내새끼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부뿐이니. 공부나 하란 말이다. 이제 싸움은 관두고, 얌전히 책이나 파라. 이 말이죠? 형님?”
뭔가 목적은 관통하지만, 심하게 뒤틀린 해석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그 말에 인준이 사납게 세주를 노려봤다.
“이 새끼는 눈빛도 오만불손하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치용의 언어 능력을 칭찬해야 하는 걸까 싶다.
“넌 좀 빠져.”
“네.”
치용을 뒤로 하고 톡 하고 홀로그램 문서를 펼쳐 준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본 인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쩌라고?”
“외워.”
“이걸 전부?”
“자신 없어?”
인준이 피식 웃었다.
“외우지. 형님.”
그 형님이란 호칭이 부담스럽다.
꼬박꼬박 대들면서 용케 형님이라 말한다.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기로 한 순간부터, 그 말은 지키는 거다.
‘참 순수한 놈이야.’
-저 얼굴이?
물론 외모만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치용이 아주 별나게 인상이 사나운 거지, 인준도 만만치 않은 얼굴이다.
항상 치용 곁에 있기에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것뿐이다.
세주는 훈련에 매진했다.
치용과 인준, 유진에게는 각각의 과제를 줬고.
자신도 종일 바빴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풀고, 기초 체력 훈련을 했다.
물론 일반 병사들의 훈련과는 상상을 초월한 강도였다.
중력 강도를 높여서 하는 훈련.
눈 감고 줄을 타는 훈련.
에너지 컨트롤만으로 사이킥 에너지를 흉내 내는 짓 등.
할 수 있는 일.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세주는 맨땅에 헤딩하듯 해냈다.
쉬는 날에는 강슬을 만났고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따로 냈다.
훈련에 매진하면서 일상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해치우는 사람처럼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치용!”
“네!”
“서핑해 봤냐?”
“그게 뭡니까?”
“가자!”
나호필 몰래 비틀 쉽을 꺼내, 발리로 놀러 간 넷은 종일 서핑을 즐기기도 했다.
“이런 데, 시커먼 남자들이랑 오다니 씁쓸하네요.”
유진이 투덜거렸다.
“그게 싫으면 현지 조달해.”
세주가 말하자, 유진이 고개를 젓는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말만 그렇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걸 본 치용이 만면에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형만 믿어라.”
“하지 마세요.”
유진이 정색을 했지만,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치용이 지나가는 금발의 미녀에게 다가갔다.
무리다.
절대 무리.
통역기를 아예 목 뒤에 심어둔 이들이기에 언어의 장벽은 없었다.
휘이익!
휘파람을 분 치용은 88올리픽이 한참이던, 수사반장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던 시절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는 건들거리며 말했다.
“놀자.”
“꺄아아악!”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멍청한 놈.
“네가 해보든가.”
인준이 나섰다.
물론 결과는 대동소이하다.
“제가 해요?”
“해.”
세주가 유진을 강하게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발발거리며 걷던 유진은 여자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해변을 몇 번 거닐더니, 뭘 줍는다.
그리고 여자에게 다가가자, 해맑게 웃는 이들이 보였다.
금발 미녀다.
헤벌쭉 웃는 치용과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인준의 얼굴이 보인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들은 전부 신체 건강한 남자들이다.
욕구는 당연한 거다.
“놀자.”
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치용을 경계하던 여자도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걸 보고 유야무야 어울렸다.
밤새 술 마시고, 흥청망청 노는 시간이다.
치용은 술에 취하면 의외로 젠틀했으며, 인준은 말이 많아졌다.
세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해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보인다.
‘저 위 별들에 생명체가 살고 그중 하나쯤은 나를 노린다고 생각하니까 전혀 낭만적이지 못 한데.’
-일단, 보이는 모든 별에 생명체가 있을 확률은 소수점 이내고, 형을 노리는 생명체는 다른 은하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아.
아마도 프로비던스는 평생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못 만날 거다.
‘괜찮은 안드로이드 여자 나와도 넌 소개 안 시켜준다.’
이렇게 낭만이 없어서야.
-무슨 헛소리야.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아마존 밀림에 비하면 한결 낫다.
이 정도쯤은 쾌적하다고 할 수 있었다.
“형님.”
인기척이 느껴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 놀고 왜.”
“저야 뭐.”
돈 많은 재벌 놈보다 부러운 게 여자 많은 기생오라비다.
-그건 형만 그런 거고.
‘시끄럽고.’
평소에 여성과의 관계가 돈독하고 사귀는 여자가 손가락 발가락 합쳐도 다 못 새는 유진에게 하루 유희보다는 세주와의 시간이 더 중요한가 보다.
풀썩.
옆에 앉은 유진이 물끄러미 위를 보다 입을 연다.
“형님.”
“왜?”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봤을 때 참 다루기 쉬운 타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조금 졸음이 몰려온다.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동정심을 유발하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는 거,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 보였다.
앞에 나서서 빛을 보는 자가 있다면 배후에 서서 그걸 조종하는 게 취향에 맞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유진은 명백히 후자였다.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가까이 지내려 하는 걸 적당히 멀리하고, 제가 필요한 사람만 가까이하는 게 제 특기였는데.”
말을 끊던 유진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눈감고 누운 세주를 바라본다.
“형님한테는 안 되네요.”
고해성사 시간은 아닐 것이다.
“왜 거리를 두세요?”
“내가?”
“아닌가요?”
예민하기에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일까?
세주는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를 갖고 얘기를 나눌 재주는 없었다.
“몰라. 무슨 소리야.”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형님은 뭐랄까, 참 특이한 사람입니다.”
유진이 궁둥이를 털고 일어났다.
“전 한 잔 더 하러 갑니다. 아주 오랜만에 술이 받네요.”
“오냐.”
“들어오실 거죠?”
“봐서.”
세주는 눈을 감고 잤다.
아주 간만에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노숙이었지만,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몸뚱이는 이 정도로 끄떡도 없었다.
*
훈련을 거듭하는 시간이 다시금 이어졌다.
다시 6개월, 보슬은 어떤 도발도 하지 않았다.
이때쯤 인준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동안 수없이 싸우던 이들이다.
갑자기 근 1년의 휴식은 갈증을 느끼게 했다.
스푼을 들어, 영양소가 듬뿍 담긴 식사를 하던 셋이다.
달그락.
수저를 식탁 위에 두고 인준이 자신의 심경을 말했다.
“니가 나냐? 싸우고 싶다고 하게?”
그러자 치용이 비웃는다.
“치욕스럽군.”
인준이 치용을 보고 말한다.
“여자를 만나.”
치용이 진지하게 조언을 했고, 인준은 진지하게 욕을 했다.
“꺼져라. 무뇌 인간아.”
“안 지겨워요?”
그걸 본 유진이 묻는다.
“뭐가?”
둘이 동시에 유진을 본다.
“싸우는 거요.”
치용이 턱을 내밀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다. 구경만 해도 그렇게 재밌는 건데, 직접 하면 얼마나 재밌겠냐?”
치용의 개똥철학에 유진도 결국 웃음을 보였다.
“형은 진지해지지 마요. 진짜 안 어울려.”
“얘들아!”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의 고개가 돌아갔다.
“일이다!”
식당 입구에서 세주가 신난 얼굴로 셋을 보고 외쳤다.
*
앞장선 세주를 셋이 따라온다.
“여긴 왜?”
비틀 쉽을 타고 기껏 온 곳이 경동시장이다.
굳이 시장까지 행차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거다.
“할 일이 있어서.”
장비도 전부 벗어던진 채, 검은 코트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그들이다.
“누가 보면 더 의심스러운 복장인 건 알죠?”
할 일이 뭔지 궁금한 참이다.
“얼굴만 가리면 돼.”
세주는 유명인사다.
가는 사람마다 그를 알아보니, 불편하지만 이게 낫다.
사람이 북적거린다.
인류의 위기라고 해도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개인의 땀이 없다면, 사회도 국가도 없는 거다.
골목길 사이로 들어간 세주가 한 상회 앞에 멈췄다.
낡은 간판이 곧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허름한 상점이다.
[내가 못 산다]
허름한 상점 안, 자라난 팔을 단 매드가 기다렸다.
“못 살게 해줘?”
위협이 위협으로 안 끝날 수 있는 걸 사람들은 협박이라고 부른다.
[협박이지?]
“정답.”
접이식 캠핑 의자 위로 세주가 앉았다.
“다들 뭐해? 일단 앉아.”
치용이야 애초에 별생각이 없으니 매드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앉는다.
세주가 앉은 의자와 비슷한 걸 끌어왔다.
인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나무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청소 좀 하지?”
[내 집이야. 네가 뭔 상관이야?]
“너 괴롭힌 저 새끼랑 동급이다.”
치용을 가리키며 세주가 말하자, 매드가 고개를 젓는다.
신기하게도 그의 모습은 일반 지구인과 다를 바 없었다.
눈썹 무신을 한, 여느 50대 초반쯤 중년 여인의 모습이다.
“너 여자였냐?”
[아니, 자웅동체야. 필요할 때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역시 얄밉고, 약았다.
유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다.
“근데 정말 뭐 하러 갑니까?”
매드가 유진을 봤다.
[설명도 안 했어?]
“준비는?”
세주가 대답 대신 매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끝났어. 내 목숨 걸고 하는 일이야. 걸리면 난 끝장인데, 저런 어중이떠중이 데리고 간다고?]
어중이떠중이 삼형제가 그를 동시에 바라봤다.
지난 1년간, 겪은 훈련은 그들이 이제까지 했던 어떤 훈련보다 고됐다.
자연스레 전신에 에너지가 퍼지며 기세가 달라진다.
“그 주둥이 찢어줘?”
“말이 좀 그러네요.”
“크르르.”
인준, 유진, 치용의 순서다.
[취소]
태세전환이 빛보다 빠르다.
말과 함께 매드가 몸을 일으켰다.
세주라도 저 셋의 기세를 동시에 받는 건 부담스럽다.
그렇게 훈련 시켰고, 키워 낸 이들이다.
“모습을 바꾸는 재주는 홀로그램?”
[맞아. 이것도 탐내?]
아니, 필요 없지.
-흥, 그까짓 하등 홀로그램 구현장치로 유세라니.
멀쩡해진 프로비던스다.
그놈의 기계에게 먹히는 몰핀이 뭐였는지, 근 이틀을 정말로 미쳤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네가 너여서 행복하다.’
-형은 또 왜 이래?
‘아니, 그냥.’
매드가 한쪽 벽에 손을 대자, 훙 하고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그 안, 동그랗게 원을 그린 기계장치가 보였다.
기계장치는 세 겹의 원을 그렸고, 허공에 동동 떠 있어 신비롭게 보였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원 사이사이가 비어 있고, 빙글빙글 돈다.
매드가 그 앞에서 몇 가지 조작을 하자, 원형 기계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에너지는?]
“내가 공급해준다고 했잖아.”
세주가 그 앞에서 손을 펼쳤다.
검게 물든 빛이 손에 모이고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나간다.
[이쪽]
기계 밑이다.
맨홀 구멍으로 막아 둔 걸, 매드가 치우자 전선이 엉킨 에너지 플랜트가 보였다.
-조잡해.
‘직접 만들 거 아니면 쉿 하지?’
프로비던스가 만들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다.
그러니까 저건 매드, 그 종족만이 할 수 있는 전매특허 기술이다.
기계는 조잡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전파를 다루는 능력이다.
그걸 발전하고 탐구한 매드는 차원문을 열 수 있었다.
말이 거창하다.
그가 열려는 건, 통일 은하로의 입구다.
바로 김보슬이 있는 곳.
세주의 전신에서 검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충분해!]
고작 메시지 몇 개, 정찰 어드바이저 날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생명체 넷을 통과시켜야 하는 거다.
[용케 날 믿네?]
차원문을 잘못 열면 저 넷은 그대로 죽는다.
세주는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실버.”
매드는 자신의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자다.
철컥.
그 앞으로 은빛의 안드로이드가 주먹을 들고 매드를 겨눈다.
“잘못되면 죽여.”
[그건 협박이지?]
“아니,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팩트지.”
협박이란 말보다 더 무섭다.
“그래서 우리 뭐하러 가는 데요?”
어디로 가는지는 방금 들었다.
유진은 거기에 왜 가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도둑질하러.”
“…도둑질요?”
유진이 황당해 되물었다.
치용이 그런 유진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싸움은 합니까?”
머릿속에 싸움밖에 없는 인간이다.
“물론!”
“내 기술도 시험해볼 수 있겠지?”
“물론!”
세주가 쾌활하게 답했다.
어쨌든 따라갈 거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유진은 둘이 묻는 걸 보고 자신도 궁금한 걸 물었다.
“예쁜 여자는 있습니까?”
세주도 말문이 막혔다.
그 답은 매드가 대신했다.
[물론!]
우우우웅!
그와 동시다.
그들의 눈앞에 푸른빛이 뭉쳐 원 사이를 가득 채운다.
웅-!
작은 진동이 그들을 감쌌다.
호수처럼 물결이 이는 원형이 보였다.
“가자.”
모두 그 원형을 바라보는 순간, 세주가 앞으로 발을 디뎠다.
치용이 겁이 없다지만, 세주만큼이나 할까.
혼자서 일개 군단과 맞붙는 또라이가 바로 반세주다.
그리고 그 또라이가 지금 1은하부터 8은하까지가 합쳐진 통일 은하로 발걸음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