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 놈이 원하는 것
“안 가십니까?”
“먼저 가.”
세주가 말하고 몸을 돌렸다.
방금까지 전장이었던 곳이다.
적들이 놓고 간 전리품을 몽땅 수거하고, 시신을 한곳에 모아 치우자,
이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흔적이 금세 보이지 않는다.
유진을 보내고 세주가 쪼그려 앉았다.
패인 구멍에 흙을 손가락으로 들어 비볐다.
검은 흙이 붉게 보였다.
여기에 뿌려진 피가 그만큼은 될 것이다.
-찾았어.
프로비던스의 말에 세주가 눈을 돌렸다.
허공에 둥둥 뜬 반투명한 구슬이 보였다.
[네 어드바이저 능력 있는데?]
구슬 너머, 김보슬의 목소리다.
“관음증이냐?”
뭘 이렇게 숨어서 보는지.
[그런 경향도 좀 있지]
“스스로를 인정하는 변태라니.”
세주는 빤히 구슬을 바라봤다.
[안 부숴?]
적의 정찰을 찾았고, 마주했다.
그런데 빤히 구경만 하니 당연히 물어볼 법도 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
대뜸 물었다.
바라는 게 없다면 이렇게 할 리 없다.
프로비던스와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이다.
놈은 바라는 게 있다.
다만, 세주가 짐작조차 하지 못할 뿐이다.
[말하면 주게?]
“내 여자를 제외하고 다 줄 수 있지.”
[사귀는 여자도 없잖아?]
썸 타는 여자는 많다.
“바라는 거나 말 하시지.”
[너의 동정]
“그건 이미 아주 오래전에 팔렸어. 솔드아웃이야.”
숨도 안 쉬고 답하자, 보슬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거슬리진 않았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다.
[역시 넌 재밌어. 인정해.]
잠시 구슬이 점멸하더니, 목소리가 이어진다.
[내가 원하는 건 네 기억이야.]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추억을 곱씹겠다는 건 아닐 거고?”
[당연히 그런 종류는 아니지]
“계속 싸움을 걸고, 재수 없게 굴면서 기억은 무슨 기억?”
[내가 재수 없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화의 초점을 흩트리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무슨 기억?”
세주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이유.
언제나 이유를 모른다.
적은 세주를 죽이려 하고, 인류를 위협한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가려져 있다.
콴은 인간을 자원으로 봤고.
메카니모스는 실험체로 봤다.
바이탄은 격멸해야 할 악으로 봤다.
하지만 이들은?
겉보기에는 같은 인간이다.
지배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싸움은 진즉에 끝났겠지.
프로비던스의 예측이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9은하를 청소했다면 끝이다.
더구나 세주는 저놈의 배려인지, 장난인지, 농간인지 모를 것에 빠져 시간을 되돌리고 회귀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 기억은 현재 없다.
기억을 못하지만, 사실은 남아있다.
즉, 저 김보슬이란 변태 새끼의 목적이 궁금했다.
[그런 게 있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두리뭉실한 대답의 적이다.
“시파.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세주가 중얼거리며 손짓했다.
팡 하고 작은 구슬이 터졌다.
적의 정찰기는 얼마나 최신예 기술인지, 프로비던스가 아니면 모습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거 못 얻었으면 못 찾았을 거야.
프로비던스가 말했다.
이번 전투의 전리품 중 하나.
프로비던스가 탐낸, 적의 레이더다.
그래서 보자마자 냉큼 날름한 거고.
-놀라워! 새로워!
두 마디의 감탄사로 프로비던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대로 꿀꺽했다.
말 그대로였다.
빛을 뿜어 레이더를 삼키고, 분해.
그대로 그 시스템을 자신에게 적용했다.
그 이후 바로 찾은 것이 이 작은 구슬이었다.
‘그동안 이걸로 날 쭉 관찰한 거겠지?’
-보는 정보를 그대로 일정 방향으로 날리고 있어. 엄청 웃긴 거 알려 줄까?
‘뭔데?’
-이 정찰기의 이름은 패러사이트야.
‘기생충?’
-지구의 에너지와 전파를 이용해서 신호를 쏘고 그 신호는 다시 지구의 인공위성을 이용, 타 차원에 넘어가는 건…, 누군가의 손을 거쳤어.
‘누구?’
-모르겠어. 방해 신호가 강하고, 직접 가지 않고서는 모르겠어. 하여간 여기서 웃긴 점은 전부 지구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정보를 넘겼다는 거야.
어디서 웃겼다는 건지.
기계 놈의 개그 감성 따위는 모르겠다.
‘미쳐도 좀 적당히 미쳐.’
-내가 왜 미쳐? 난 안 미쳤어. 파쳤어.
우뚝.
몸을 멈추고 차분하게 프로비던스를 살폈다.
렌즈의 빛이 깜빡거리고, 휙휙하고 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얘는 또 왜 이러나 싶다.
이 미친 기계의 말투와 태도는 이미 물릴 만큼 봤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타락한 적은 없다.
구슬을 괜히 부쉈나 싶다.
놈한테 물어보며 쉽게 답이 나올 거다.
감으로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말하지 않아도 이런 질문들은 쉽게 답해 주리라는 걸.
뒤를 돌아보자.
그와 비슷한 작은 구슬이 또 떠 있다.
“관음증 그거 병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어드바이저 괜찮아?]
“네 짓이지?”
듣자마자 놈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프로비던스가 먹은 레이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특별한 건 안 했어. 인간으로 치자면 몰핀 2g 정도 맞은 정도라]
“…그 정도면 치사량 아냐?”
[인간이 아니니까]
-후헤헤헤헤. 세상은 아름다워!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쾅!
두 번째 눈알 구슬을 부수고, 몸을 돌렸다.
이외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놈의 시선은 있을 거다.
다 부술 수 없다면, 놔둘 수밖에.
그래도 시뮬레이션 모드 안쪽이나, 함선 안쪽까지 침투는 어려울 테니 그나마 안심이다.
-으헤헤. 행복하다!
…프로비던스가 정신 차리면 정찰기의 눈 따위는 금세 속일 테고.
*
‘무지 잘 싸우네.’
잘 싸우는 정도가 아니다.
사단 병력.
좋게 말해서 일개 사단 병력이지 8은하를 통일한 군대의 사단이다.
그 사단 병력을 본인 손도 아니고 부하만 보내서 깔끔하게 털어냈다.
거기에 날아온 군수 물품을 날름 먹고.
인간은 역시 욕심이 많다.
그건 백 년이 지나 건, 천 년이 지나 건 변하지 않는 거다.
‘그리고 나도 인간이고.’
보슬은 많은 걸 가졌지만, 아직도 갖고 싶은 게 남았다.
홀로그램 영상에 팔짱을 끼고 전투를 관망하는 인간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 원하는 건, 저 인간에게 있었다.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반세주란 이름으로 인류의 영웅으로 살아가는 자.
보슬은 그를 원했다.
*
우주는 넓다.
은하라는 개념으로 나뉜 우주는 총 아홉 개.
수많은 종족이 상상하지 못할 생명체가 사는 곳이었다.
최초 은하를 통일했을 당시, 보슬은 무자비했다.
은하 통일 후 그의 정책 중 첫 번째.
인간이 아닌 자 모두 노예가 되리라.
8은하에서 그의 눈에 띄는 생명체 중 살아남은 무리가 드물었다.
노예가 돼서 살아남은 무리보다 반항하다 죽은 무리가 몇 배는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완벽할 순 없는 법이다.
그를 피해 살아남은 무리가 저항 조직을 마련, 반항의 기틀을 삼았다.
그게 2은하가 통일되기 직전이었다.
1은하 레지스탕스가 발각된 건 그때쯤이었다.
용서는 없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인 보슬의 두 번째 정책.
반항하는 자, 누구를 막론하고 살려두지 않는다.
그 반란군에는 자신의 연인이 있었고 보슬은 그녀를 죽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정책….
“그래서 언제까지 얘기할 건데?”
[내가 나올 때는 8은하가 무너졌을 땐데]
“장난치면 손가락 날아간다.”
말과 함께 세주가 놈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잠깐, 스톱!]
딱딱한 돌덩이 같은 피부에 손가락을 억지로 박아 넣자, 그가 급하게 외쳤다.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쓴 이였다.
이 자가 바로 김보슬의 끄나풀이었다.
세주의 정보를 잡아서 넘기는 놈이다.
“일단 팔 하나 잘라놓고 시작하자. 튼튼해 보이는데.”
말과 함께 에너지 블레이드를 꺼냈다.
[잠깐, 잠깐, 우리 종은 신경이 전신에 퍼져 있어서 통증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아프라고 하는 거야.”
[아니, 물어보는 거에 다 대답한다니까!]
“짧게.”
[그러니까 우리 종과 인간의 문화 차이로 인해서 대화의 길이가 다를 수 있다니까…]
파각!
겉이 암석처럼 보였는데, 자를 때도 돌을 자르는 것 같은 감각이다.
팔뚝이 뚝 하고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걸쭉한 회색 피가 흐른다.
피는 금세 멎었지만.
[끄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른다.
경동시장 뒷골목, 코앞에 있는 놈이었다.
깜빡이는 가로등 밑, 세주는 코웃음을 쳤다.
“아프냐?”
[그걸 말이라고 해!]
“처음부터 다시 할까? 이름?”
시싱!
블레이드가 다시 빛을 발한다.
[매드! 매드야!]
“우리 매드 이제 말 좀 잘 들으려나?”
[처음부터 말했잖아!]
“짧게.”
[알았어. 짧게]
“김보슬의 목적은?”
[나도 몰라]
그가 고개를 젓는다.
-진짜네.
프로비던스의 스캐닝이 실시간으로 놈을 확인한다.
심장은 두 개, 기관은 인간과 흡사하다.
피부가 암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내가 알아야 할 게 많을 텐데.”
[내가 아는 건 없어]
-이건 거짓.
“너 진짜 죽고 싶은 거냐?”
[살고 싶어서 이러지]
아프다는 놈이 잘도 웃는다.
굳은 피부가 달그럭 거리며 구겨진다.
‘웃는 거 맞지?’
-아마.
긁적.
머리를 긁고 놈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까지 들은 내용이 전부라면, 이놈 가치가 없다.
매드.
김보슬이 멸망시킨 은하 어딘가의 소수 종족.
전파를 다루는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이 임무에 차출된 것.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게 전부 일리가 없다.
세주는 정보가 필요했다.
김보슬에 대한 모든 것!
“아는 거 전부 말해. 좋게 말할 때.”
[이미 좋게 말한 거 아니잖아.]
“내가 진짜 나쁘게 말하는 거 보고 싶어?”
[…아니]
‘이 자식 굉장히 능글맞다.
그런 놈한테는 또 맞는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김치용.”
“네.”
뒤를 지키던 치용이 앞으로 나온다.
“네가 맡아.”
“네.”
말없이 치용이 놈의 앞에 섰다.
[안녕]
매드가 인사를 건넨다.
치용은 만면에 미소를 보이며 주먹을 쥐었다.
“오른쪽? 왼쪽?”
[그게 뭔데?]
“일단 오른쪽.”
꽝! 빡!
[우악!]
다시 매드의 비명이 터졌다.
*
천 년을 산 놈이라.
-이제 어쩌게?
매드를 지지고 볶은 치용이다.
뽑아먹을 만큼 뽑아 먹은 정보를 토대로 세주는 김보슬이란 놈을 그렸다.
얼굴은 안다.
키도, 몸무게도 대략은 안다.
가진 에너지 보유량은 잘 모르겠다.
세주가 알고자 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성격.
놈의 행동 패턴, 그게 궁금했다.
어떤 싸움에서든 가장 중요한 건, 누구와 싸우는 가다.
‘놈은 어린애야.’
-그런 면이 있지.
‘놈은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아. 동시에 변덕쟁이지.’
-형이랑 닮은 부분이 있네.
‘욕하냐?’
-그렇다고.
‘거기에 놈은 욕심이 많지.’
욕심이 없는 놈은 8은하를 통일하지 않는다.
거기에.
‘확실히 나한테 바라는 게 있지.’
-그건 동의해.
변덕쟁이에 어린애.
과연 그 모습만 있을까?
그런 놈이 우주에서 유일한 놈이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처음부터 다시다.
놈은 치밀한 계산을 하는 타입의 인간이며.
자신의 본 모습을 주변에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에 매드가 말한 놈의 역사를 통해 세주는 또 하나를 알았다.
놈은 언제나 목적이 있다.
과거의 놈의 삶을 통해, 현재를 추측한다.
거기에 현 상황에서 세주를 통해 놈이 얻을 수 있는 것.
‘놈이 바라는 것.’
-높은 확률로.
프로비던스가 세주의 말을 대신한다.
-그 블랙홀을 원하는 거지.
뫼비우스의 띠라 부르는 그 블랙홀.
놈이 원하는 건 그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