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 싸우지 말자
-목표 포착
동시에 양손에 벼락 두 개를 꺼낸다.
밑을 향한 총구.
세주의 눈이 판라를 향했다.
-적중 확률 99%
피할 수 없다.
프로비던스가 내놓은 결과다.
어지간해서 90% 이상을 말하지 않는 고약한 성격의 로봇이다.
그래서 세주는 믿었다.
팔 하나가 날아간 채다.
세주는 외팔로 벼락을 들었다.
지지대가 되는 팔이 없지만, 임기응변이다.
‘브로.’
철컥.
곧바로 아머 밑에서 총열을 받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판라가 고속 이동을 하며 치용의 어깨를 발로 차는 게 보였다.
쩡!
“염병!”
맞으면서도 용케 입을 여는구나.
인준이 그사이 광탄을 갈긴다.
두두두두둥!
금세 탄막이 만들어져 판라의 앞을 덮친다.
그녀는 고개를 밑으로 수그렸다.
이마를 앞으로 내민 자세다.
눈만 감고 발그스름한 볼만 구비 된다면 누군가의 볼에 입맞춤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다.
붕!
하지만 그런 로맨틱한 일은 없었다.
그녀의 이마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배리어가 생긴다.
터더더더덩!
인준의 광탄이 허무하게 막혔다.
그 틈을 타, 유진이 몸을 숨긴다.
그리고 갑자기 판라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그 또한 팔을 휘둘러 가볍게 막아내는 그녀다.
떡!
기묘한 소리를 내며 유진의 몸이 휘리릭 돌며 날아갔다.
바닥에 처박힐 것 같던, 유진은 공중에서 밸런스를 잡아 바닥에 섰다.
훌륭한 반사 신경과 제어능력이다.
이 모든 게 가르간을 죽이고, 밑을 향해 벼락을 겨누며 생긴 일이었다.
주변 일반 병사들의 눈에는 빛이 번쩍이고, 부딪히는 광경만 눈에 비칠 뿐이었다.
그리고 셋이 판라와 거리를 벌린 순간.
판라가 손을 들어 주먹을 뻗으려는 그 시점에.
세주는 방아쇠를 당겼다.
꽝!
폭음과 함께, 빛이 번쩍인다.
오닉스 에너지를 담은 탄은 아니다.
진청색의 광탄이 날아가 그녀의 팔뚝 위에 박힌다.
쩡!
하지만 그녀의 피부는 놀랍게도 그걸 튕겨냈다.
-단단한 솜털!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프로비던스가 입을 연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단단한 솜털은 레이퍼의 피를 먹고 생긴 특수한 것 중 하나였다.
그것도 세주와 프로비던스가 찾은 우연의 산물.
그걸 판라라는 메카니모스가 가지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꽝꽝!
두 발의 벼락을 더 뿜었다.
쩡! 쩡!
판라는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배리어가 배는 두꺼워진다.
그리고는 세주의 탄을 손쉽게도 막았다.
‘단단하네.’
어떻게 할까?
단단하다고 그냥 놔둘 순 없다.
‘이모탈 엔젤스.’
치료 모드를 켜서 머리 위에 하얀 고리를 터트린다.
우드드득.
끔찍한 고통이 잘린 팔 부위부터 느껴졌다.
고통을 참아내는 건 이골이 났다.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관우처럼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진 못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순 있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세주는 공중에서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무에서 싹이 자라듯 우드득 거리며 팔이 재생을 시작했고.
그 틈에 벼락을 두어 번 더 쐈다.
판라는 그 또한 가볍게 막아냈다.
굉음이 사위에 울렸다.
저 멀리, 치용이 지친 표정으로 칼을 들고 서 있다.
콴의 3대 신기라는 타는 칼을 쥔 그의 표정은 꽤 볼 만 했다.
패배감?
아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치부가 들켜버린 얼굴이랑 비슷하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인준과 유진은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저 셋도 최선을 다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저 밑에서 벼락의 탄을 막아내는 저 메카니모스는 뭘까?
골드보다, 가르간보다, 전투력만을 보자면 우위에 선 게 분명한 존재다.
찢긴 아머 위로 맨살의 팔뚝이 돋았다.
아직 붉은 기가 감돌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손을 쥐었다 펴본, 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신경이 멀쩡하다.
동시에 푸른 빛이 팔을 감싸, 아머를 본래의 형태로 돌려놨다.
그리고 벼락을 한 자루 더 부른 세주는 공중에서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까?
그녀의 존재가 궁금하지만, 과연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생포하자.
탐구욕이 솟구친 프로비던스다.
‘그럴 수 있다면.’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류의 감은 언제나 잘 맞는 편이었고.
그래서 세주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을 줬다.
양손에 든 벼락, 그 안에 광탄이 가득 찬 탄창을 끼운다.
텅! 텅!
하늘에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행하는 묘기다.
동시에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양 탄창에 들어 있는 탄, 그 이름을 천둥이라 지었다.
벼락이란 이름에 어울릴 법도 했다.
유치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누구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세주는 그 이름에 걸맞은 위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총 스무 발.
연발로 전환한 벼락의 방아쇠를 멀쩡한 손가락과 새롭게 자란 손가락이 당긴다.
꽈과과과과과광!
밑에서 그걸 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그뿐 아니다.
엄청난 굉음에 귀가 쩡 하니 울렸고,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귀 안쪽이 망가져 피가 흘렀다.
거기에 뿜어져 나온 빛은 순간 시력을 앗아가기 충분했다.
그 덕분에 순간, 주변 전장의 싸움이 멎기도 했다.
그래서 안나를 비롯한 모두는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 오던 김보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꽈과과과과광!
연발로 바꾸고 벼락의 방아쇠를 당기자 생긴 폭음이다.
동시에 하늘 위에서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스무 발의 광탄이 만든 현상이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광탄은 실제로 신이 노해 토하는 번개 같아 보였다.
물론, 그 분노를 고스란히 맞은 지상은 흔적도 없이 박살났다.
땅이 움푹 파인 것도 부족해 금이 갔다.
애초에 이 공간 자체가 우주 한복판에 만든 방과 같았다.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든 세주가 바닥에 내려섰다.
쿨럭!
기침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틀린 걸까?
오른 어깨부터 시작해서 왼쪽 옆구리까지.
상체를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찢기고 날린 판라가 보인다.
“하나만 물어보자.”
세주가 대뜸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너 누구냐?”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쿨럭!
그저 기침을 한 번 더하며 피를 토해내는 거로, 자신의 목숨이 다함을 알렸다.
고통을 겪는 이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
고문도 의미가 없을 정도의 상처다.
세주는 벼락을 회수하고 침묵을 들었다.
그걸 그녀의 이마에 겨눴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
대신, 죽고 나서 프로비던스에게 맡기자.
메카니모스 또한 바이탄과 같이 저장 장치를 보유한 종이다.
굳이 나누자면 콴은 생물에 가깝고, 메카니모스는 기계에 가깝다.
개조를 거듭하며 완성에 가까운 육체를 만드는 그들의 가치관은 사실상 완성체가 이미 있었다.
바이탄의 안드로이드.
그들이야말로 메카니모스의 완성체다.
끼리릭.
둥.
짧은 소음과 함께 침묵의 총열에 머문 한 발의 광탄이 그녀의 이마를 향해 날아갔다.
발악해서 배리어를 펼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인간에게 심장과 노블 패스가 있듯.
메카니모스와 바이탄에게도 플랜트라는 기관이 있다.
그건 인간의 심장과 노블 패스가 합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플랜트가 부서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을 머금지 않은 벼는 자라지 못 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끝났어.
프로비던스가 판라를 향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
지지지직.
그 타이밍에 통신기에서 소음이 귀를 찔렸다.
그리고.
훅!
바람이 불더니, 누군가 판라와 세주 사이에 선다.
팡!
침묵에서 뻗어 나간 광탄 또한 막혔다.
기가 막힐 정도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광탄을 막은 수단이 세주의 눈을 끌었다.
배리어가 아니다.
그저 손등으로 튕겨내듯 막았다.
세주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이상한 장갑을 낀 손의 주인 때문이다.
치용보다도 머리 하나가 크다.
신장이 2m 중후반대는 되는 것 같다.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진 몸이 진녹색 옷 위로 선명하게 보였다.
근육 돼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무슨 헛소리야?
‘그냥.’
자기소개도 제대로 안 하는 놈을 상대하기 질렸다고나 할까나.
“넌 뭔데?”
세주가 물었다.
전투에서 입을 열고 대화를 나누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은 너무 특이한 이들이 많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남자도 굳게 입을 다문다.
“오늘 무슨 날인가.”
휙휙.
팔을 허공에 돌린 세주다.
어차피 적이라면.
시간 끌 것도 없이, 상대하면 그만이다.
“자자, 산아. 물으면 답을 해줘야지.”
“벌레와 대화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허, 벌레라니.”
‘저건 또 뭐야?’
근육 돼지 뒤다.
말끔한 인상의 재수 없게 생긴 남자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기생오라비란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한 명 더 다.
금발의 푸른 눈, 뾰족한 턱이 인상적이다.
“안녕.”
기생오라비가 말을 걸었다.
“재수 없게 생긴 놈일세.”
세주가 입을 열었다.
“외모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그래?”
“설마.”
“아냐?”
“아닌데.”
“너, 거짓말이 능숙하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를 하네. 내 어릴 때 별명이 정직의 반세주였다.”
남자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세주는 순간, 자신이 어떤 언어를 써서 대화했는지 깨달았다.
‘잠깐.’
-한국어야.
차갑게 벼린 칼날이 목을 슥 하고 긋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지나간 게 아니라 아직도 목에 대어져 있는 것 같다.
한국말을 한다.
지금 보니,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누가 봐도 동양인이다.
아니, 거기서 끝이 아니다.
동양인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특유의 느낌.
이 남자, 한국 사람이다.
그리고 근육 돼지 뒤.
금발 남자가 허공에 손을 뻗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빛이 뿜어져 나와 판라의 전신을 덮는다.
나노킷 광선과 비슷해 보였지만.
-이런 빌어먹을.
‘왜?’
-저거, 지금 인간이 가진 기술보다 최소 서너 단계 위야.
굳이 비교하자면 이모탈 엔젤스의 재생 모드와 같다.
판라의 몸에 살이 자라난다.
“으음.”
그녀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수고했다.”
금발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세주의 시선을 느낀 기생오라비가 눈을 부릅떴다.
“야.”
“왜?”
“날 봐야지. 왜 다른 데 시선을 둬.”
그 사이 그녀의 전신이 거의 재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놀라운 속도였다.
흔히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트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야.”
다시 기생오라비가 세주를 부른다.
“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 그전에 자기소개부터 하면 안 되냐?”
“안 돼.”
다시 세주의 시선을 뺏은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는 지금 뭘 하자는 걸까.
딱.
그 틈,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뒤쪽 허공이 쩍하고 입을 벌린다.
하얀 구멍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빛무리가 뭉친 덩어리가 나왔다.
아니, 처음에는 덩어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런 시….”
욕이 절로 나온다.
방금까지 세주와 싸웠던 놈이다.
가르간.
그가 다시 빛의 칼을 들고 서 있다.
“너, 뭔데?”
“안 알려줄 거야. 처음 만났을 때 알려주면 재미없으니까, 다음에 만났을 때 알려 줄게.”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침 뱉고 싶게 생긴 얼굴이기도 했다.
“퉤.”
세주는 본능을 참지 않고 침을 뱉었다.
그러자 근육돼지가 손을 뻗었다.
탁하고 그의 손바닥에 세주의 침이 튀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정작 분노를 보인 건 뒤쪽 금발의 남자다.
“아, 미안. 실수다.”
세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나저나 가르간이 살아 있다면, 아까 죽인 놈은 뭘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또 보자.”
그 남자가 손을 들어 흔든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얌전히 이곳에서 보내 줄 거라고 믿는 걸까?
-싸우지 말자.
움직이려 한순간, 프로비던스가 세주를 말렸다.
칼큐레이팅 모드를 풀로 사용하던 프로비던스다.
그리고 곧 그 시야를 공유한다.
세주의 눈에 빨갛게 변한 세상이 보였다.
‘하하하.’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죽는다.
도주도, 싸움도.
장내의 주도권은 세주에게 있지 않았다.
오닉스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했다.
-형, 싸우지 말자니까.
프로비던스가 다시 말한다.
기생오라비는 눈을 반달처럼 휘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어드바이저는 상당히 똑똑하네.”
말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세주의 어깨를 가리킨다.
…브로가 보인다고?
이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세주의 눈에도 희미하게 그의 어깨 위의 물체가 보였다.
“집중하면 보일 테지.”
그가 말한다.
그의 말대로다.
그의 어깨 위, 렌즈에서 백은의 빛을 뿜는 기묘한 물체가 보였다.
아니, 기묘하다고 할 수 없다.
조금은 다르지만, 자신이 아는 것과 너무 닮았다.
세주는 진심으로 놀라 프로비던스에게 말했다.
‘너, 배다른 형제라도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