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 나를 따르라
“전방!”
적의 함선 오십 척이 앞을 채운다.
하나하나가 전부 인류의 그것보다 배는 크다.
그리고 앞쪽에 자리 잡은 둥근 포신을 본 순간, 나호필은 짧은 신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적은 곧바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전 고등 안드로이드의 습격 이후, 잠잠하더니 대군을 이끌고 대치할 뿐이다.
“칠형포 준비.”
그렇다면 선제공격이다.
어쨌거나 인류에게 여유란 없다.
우우웅.
세주가 임의로 채워 준 에너지가 칠형포 포신을 채운다.
“공격합니까?”
차라리 습격이 낫다.
기껏 연설로 끌어 올려둔 사기가 급격하게 깎여 나갈 거다.
누구라도 눈앞의 대군을 보고 전의를 불태우긴 힘들다.
‘아니, 김치용 그 불곰 새끼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는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삼국지처럼, 누군가 나서서 일기토를 하고 그걸로 승부를 보면 좋겠다.
잡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호필은 일부러 부관을 보고 짧게 말을 끊어 뱉었다.
“그럼? 구경이라도 하게?”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적은 적이다.
눈앞에 있다면 공격 외에 다른 수단은 없다.
위이잉.
함선의 앞쪽 포신이 머리를 들이민다.
“칠형포 준비 완료.”
들려오는 보고다.
호필은 기다릴 것도 없이 손을 들었다.
귀를 시끄럽게 하는 사이렌은 껐다.
이제는 모두 알 거다.
눈앞에 적이 나타났다는 걸.
막 손을 내리는 찰나다.
뒤에서 본 조르노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바로 옆에 선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호필은 할 일을 했다.
슥.
“발사.”
위잉.
함선의 추진 장치가 앞쪽으로 돌아선다.
추진 장치가 불꽃을 뿜으며, 칠형포가 달궈진다.
“3, 2, 1. 발사!”
콰우우우우!
죽음의 오로라, 한 행성을 난도질한 힘의 재현이다.
그 뒤 본 조르노가 뭐라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생물을 노리는 병기지만, 함선에도 타격은 줄 수 있다.
에너지를 무지막지하게 씹어 먹는 포다.
그 정도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콰우우.
함선의 모든 이가 칠형포의 빛을 따라 눈을 돌린다.
콰우우.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줄기다.
각각 적을 찾아 쏟아지는 죽음의 비.
그게 바로 죽음의 오로라다.
하지만 그 순간, 메카니모스 함선 열 척의 포신에서도 빛을 뿜었다.
검게 칠한 공간에서 빛이 어울린다.
살아 다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빛이 뭉치고 뭉쳐 네모난 담을 쌓는다.
흰빛을 뿜는 커다란 벽이다.
쩌-엉!
칠형포의 빛이 그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허무하다?
아니, 허탈했다.
호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다 참았다.
자신은 사령관이다.
약한 모습 따윈 보일 수 없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이유가 뭐겠어?”
본 조르노의 건방진 말투가 들렸다.
“다 준비를 한 거지.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상대할.”
호필도 짐작은 했다.
하지만 너무 큰 격차가 아닌가 싶다.
[팔형포다]
언제 온 건지, 벤이 와서 입을 연다.
[절대방어, 그게 팔형포의 별명이지]
구형포는 행성을 하나 파괴하는 괴물.
칠형포는 살아있는 것을 몰살하는 사신.
그리고 팔형포는 칠형과 구형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어벽이었다.
빌어먹을.
호필은 욕을 속으로 삼켰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놈들과의 전투는 너무도 불리했다.
적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무기를 들고 온다.
동시에 적의 함선 오십 척의 포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전 함선! 후퇴!”
호필이 외쳤다.
콴의 행성을 침공했을 때와는 다르다.
이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
[멈춰라]
팔형포가 칠형포의 포격을 막아낸 순간이다.
써드는 그 목소리에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네]
조용히 고개를 숙여 수긍을 표한, 써드는 조용히 렌즈를 빛냈다.
뜻을 전할 필요도 없었다.
써드의 능력은 다른 안드로이드와는 다르다.
그는 ‘지휘’의 안드로이드.
아군을 통솔하며 적을 분쇄하는 지휘관이었다.
에너지를 머금은 오십 척의 함선이 멈춘다.
[칠형포까지 쓰다니, 너무 컸어]
다가온 남자가 말한다.
써드는 이 인간을 모른다.
하지만 따라야 했다.
골드의 명이었다.
절대복종.
써드는 안드로이드였으며, 그의 아버지이자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안드로이드에게 그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말했다.
[무대를 만들어주겠다]
써드가 골드의 명을 따르듯, 인간 또한 따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명령받은 대로 움직였다.
함선 밖으로 나간 인간은 손을 뻗어 명령했다.
“초원.”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뻗어 나간다.
정방형의 모양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방금 본 팔형포는 잊을 정도의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허공에 초원이 생겨난다.
말 그대로, 함선 밑으로 갑자기 초원이 깔린 거다.
쿠우우.
짧게 자란 풀들이 함선이 내뿜는 바람에 흔들린다.
고작 지상에서 20m.
함선이 가득 채운 초원의 하늘이다.
손짓으로 지형을 만든 이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눈치다.
그는 그대로 다시 함선으로 돌아갔다.
전신이 빛에 휩싸인다.
워프다.
돌아온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명령했다.
[자, 나가서 싸워 죽어라. 아둔한 피조물 들아]
*
“형님은?”
치용이 물었다.
인준과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대장님 보고 싶어]
팽이 툴툴거리고, 실버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바이탄입니다]
적이 메카니모스만 있다는 건 아니란 소리다.
“준비하죠.”
유진이 눈을 빛낸다.
장난감을 받은 아이의 눈빛이다.
유진 뿐 아니었다.
“크르르.”
치용도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후.”
인준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팽이 그 셋을 바라본다.
대장이 뭘 주었길래, 저렇게 신나 할까?
그 틈, 밖에서 초원이 펼쳐진다.
“지저스!”
누군가 외친다.
갈색 머리의 미군이다.
사이클롭스 부대원 중 하나다.
“신이시여.”
“빌어먹을.”
“뭐, 이런….”
병사와 장교, 부사관 가릴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함선 외부, 분명 검게 칠한 스케치북이었던 곳이 초원으로 변했다.
“시발, 이게 뭐야!”
“꿈인가?”
볼을 꼬집는 병사까지 보인다.
그 꼴을 보자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전부 싸울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유진이 중얼거렸다.
작은 굴곡조차 없게 탁 트인 평야가 보인다.
인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신이라도 되는 듯, 주변 지형을 바꾼다.
“야, 표정 풀어.”
치용이 툭하고 말을 내뱉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을 푼다.
“저런 건 우리 형님도 할 줄 알아.”
“…저런 건 아무리 그 형님이라도 못 해.”
인준이 핀잔을 준다.
“아니, 너도 해봤잖아. 새끼야. 그 훈련소.”
훈련소.
인준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했던 훈련이 떠오른다.
훈련했던 곳들.
시뮬레이션 센터.
분명 없던 건물이 하루 만에 생겼다.
갑자기 적이 만든, 신비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물론 세주가 한 일도 엄청난 일이지만.
경험한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은 많이 달랐다.
그 사이 치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일동 차렷!”
우렁찬 외침이다.
어찌나 큰 소린지.
귀가 아플 정도다.
유진이 바로 옆에 있다가 찔끔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400데시벨]
실버가 무감정하게 소리의 단위를 말한다.
어쨌거나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어쭈?”
그 뒤에 이어진 말에 흩어져 있던 이들 모두가 착하고 자세를 잡는다.
반세주 부대에서 가장 더러운 성격을 고르자면,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인준도.
탕탕이란 별명의 유진도 아니다.
안 돼? 될 때까지 하자.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 곰탱이 대령이야말로 모두가 기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무식했으며,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듣질 않는다.
벽창호란 말은 이 곰을 위한 말이다.
“쫄지 마라. 쫄면 뒤지는 거야.”
멋진 연설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야말로 막말 수준이다.
인준이 이마를 툭 집고 고개를 젓는다.
“야.”
그리곤 유진을 부른다.
이럴 땐 역시 유진이 나설 수밖에 없다.
세주가 없을 때 이들의 대변인이 아닌가.
“에효.”
작게 한숨을 내쉰 유진이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다.
“말 잘했네.”
셋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 중 가운데에서 들리는 높고 곧은 목소리다.
[대장]
팽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실버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오셨습니까?]
척! 척! 척!
알아본 주변 이들이 그에게 경례를 붙인다.
“됐어. 경례는 무슨.”
유연하게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온 세주의 모습이 보인다.
“음?”
치용이 먼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가장 예민한 유진이 놀란 눈을 했다.
“뭐죠?”
뭔가 변했다.
하지만 뭐가 변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이전에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세주지만.
이번에는 뭔가 많이 다르다.
“자자, 집중해.”
짝짝 손뼉을 친 세주가 모두의 시선을 모은다.
“언제부터 저 새끼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놀라면서 싸웠어?”
하지만 이런 걸 보고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나.
“어차피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모두의 시선을 모아서 세주가 입을 연다.
“싸워.”
침묵이 주변을 감싼다.
“그리고 이겨.”
말을 잇는 세주다.
무슨 말을 해서 이들을 설득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
이제까지 이들이 받은 훈련은 가볍지 않다.
전장에 나서면, 다시 싸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전장에 선 장수처럼 세주가 팔을 들었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냅다 달려나갔다.
“…쪽팔려서 그냥 뛰는 것 같은데.”
인준이 말한다.
“네. 정답이네요.”
유진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어쨌든 따라들 와!”
마지막, 치용이 외친다.
와아아아아!
“개자식! 개자식!”
“반세주를 따르라!”
“다 죽여 버리자!”
“킬 뎀 올!”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다.
그 사이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밖으로 나선 세주다.
-쪽팔려?
‘아, 시파. 다른 대사를 쳤어야 되는데.’
-너희는 군인이다.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뒤로 물러설 곳이 있다면 돌아가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ㅡ 지금 내 뒤를 따라 적의 심장에 차가운 비수를 꽂으라! 는 어때?
마찬가지로 부끄럽다.
무슨 말을 했어도 탐탁지 않았을 거다.
‘소설 쓰냐?’
-가끔 읽는데 재미는 있더라.
미친 기계 녀석.
탁.
뛰어가면서 중사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나호필한테, 전 병력 내려오라고 해!”
사령관 이름을 어디서 마구잡이로 부르나 싶었다.
하지만 그 중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채,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필승! 예 알겠습니다!”
인류의 영웅의 말이었다.
세주가 함선 밖으로 내려섬과 동시다.
전신에 들끓는 에너지를 한 스푼 떴다.
검은 물결이 손끝에 모인다.
새까맣게 변한 벼락이 손에 들린다.
‘중압.’
탄의 종류 중 하나다.
이미 양도로 프로그래밍 해둔 기술이었다.
우웅.
관통 대신 맞는 순간 충격을 전체로 퍼트리는 탄이다.
일명 저지력을 높인 탄인, 중압탄이다.
짙은 푸른빛이 노리쇠 위를 흐른다.
빛은 점점 뭉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까맣게 변한다.
이전에 정신을 반쯤 놓고 쓴 건 애교였다.
진짜 오닉스 에너지를 다루는 순간, 세주는 신세계를 봤다.
그리고 지금 그 성과의 첫 번째를 적에게 선사했다.
뛰다가 멈춰, 서서 쏴 자세로 상공에 뜬 적의 함선을 노린다.
꽈드득.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쩡!
까만빛을 내는 탄이 허공을 난다.
아니, 이곳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눈으로 쫓을 수도 없다.
탄속이 빨라, 그저 검은 선이 허공에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탄이 날아간 목적지.
적의 함선 밑부분이다.
꽈아아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함선 밑이 거인이 주먹질이라도 하듯이 꺼진다.
배리어는 종잇장이었다.
함선에 두른 젤라틴의 이중 배리어까지 무시했다.
동시에 박살 난 함선을 본 세주가 입을 열었다.
“내려와. 이 씹x들아. 한 판 붙자!”
자신감이 충만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