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 무쇠 팔
매끈한 금빛의 머리.
두꺼운 팔다리, 우주 최강의 안드로이드란 이름을 가진 골드다.
그는 적의 전력을 보고 받았다.
[반세주, 김치용, 이인준, 정유진]
그리고 실버.
포가 가져온 정보는 훌륭했다.
모든 싸움에서 적을 아는 건 중요하다.
골드는 예전 인간에게 배운 걸 잊지 않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아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기본이다.
[파이브]
[네]
인공 피부를 지닌 인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다.
전투력은 열 명의 안드로이드 중 최약.
하지만 암살 능력은 최상이다.
[가서 죽여라]
이 싸움의 승패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반세주.
가장 중심이 되는 전력을 죽인다.
골드의 지능은 그 결론을 도출했다.
[네]
파이브는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 포가 묻는다.
[메카니모스는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있는 곳.
탁 트인 방, 가구 하나 없는 곳이다.
딱.
골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새하얀 벽에서 빛이 나온다.
실처럼 흘러나온 빛이 허공에 엉킨다.
홀로그램 형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변한 이는 열두 개의 렌즈를 단, 메카니모스다.
모든 메카니모스의 대표이자, 의회의 통솔권을 갖춘 자다.
두케이.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본명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본래의 이름이 있었다.
그를 만든 아버지이자, 안드로이드가 지어준 이름이다.
써드.
그가 바로 세 번째 안드로이드였다.
[메카니모스의 주력으로 침공해 온 적을 쳐라]
골드는 명쾌한 명령을 내렸다.
[전력으로]
더는 인간을 얕보지 않는다.
아니, 이미 얕볼 수준은 지났다.
만들어진 생명체였지만 골드는 자존심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존재들, 열 명읠 안드로이드.
아니 이제는 몇이 남지도 않은 그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골드는 반세주란 인간이 싫었다.
‘신’이 관심을 갖는 인간이라니.
끔찍이도 싫었다.
*
실버는 조용히 함선에서 휴식을 취했다.
안드로이드에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인간의 수면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의 휴식도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간의 수면이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라고 봤을 때.
실버는 자신의 휴식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디테일해.’
어째서 안드로이드에게 이런 기능을 넣어놨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의 주인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친구가 필요했을까?
모르겠다.
지금에서야 알고 싶어도 알 도리가 없다.
실버는 눈을 감는 행위로 휴식을 시작했다.
함선은 이미 출발했다.
적, 메카니모스 모행성을 향해서다.
위치는 외계 인류가 알고 있었다.
실버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우리가 그들과 싸운 게 몇 년이라고 생각하나? 위치 정도야 진즉에 알았지]
이전까지는 알아도 함부로 덤빌 엄두가 안 났다는 말과 같았다.
‘대장의 출현으로 승산을 본 걸까?’
정작 실버는 이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지 못했다.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무장 된 안드로이드지만, 이 전쟁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전력은 열세.’
하지만 변수는 이쪽에 있다.
반세주와 그 일행들.
자신조차 대장이라 부르는 그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다.
[네가 실버냐?]
휴식을 취한 직후다.
누군가 실버를 부른다.
휴식 모드를 끈 실버가 눈을 떴다.
팟.
밝은 빛을 뿜는 그의 시야에 처음 보는 자의 얼굴이 보인다.
[맞군. 안드로이드 실버]
두 개의 동공을 가진 남자다.
실버는 그의 이름도 알았다.
벤.
팽의 아버지이자, 외계 인류의 대표다.
가진 에너지도 특출 날 정도다.
하지만 반세주와 그 부대원에 비하면 너무 약하다.
실버는 그를 대장 일행과 비교했다.
반세주는 무슨, 치용이나 인준의 상대로도 어렵다.
[맞습니다. 제가 실버]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실버는 환희에 전율이 흘렀다.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감동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냉정한 프로그램은 그들을 이미 자신을 만든 이들과 분류했다.
감정은 끓어올랐지만, 냉정한 이성이 억누른다.
이들은 자신을 만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만든 이들은 전부 죽었다.
그들의 후손임은 알지만, 자신을 만든 이들은 아니다.
실버는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놀랍군. 아군 바이탄이라니]
그가 말한다.
실버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전 안드로이드, 바이탄이 아닙니다]
[그런가?]
젠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입장에서 바이탄은 어떤 존재일까?
실버는 궁금했다.
[너는 인간을 증오하나?]
때마침 그가 묻는다.
증오라.
실버는 증오라는 감정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느낀다.
그의 증오는 인간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바이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알았다.
적의 적은 아군이며, 적어도 실버는 바이탄을 적이라고 규정했다는 거다.
[전 인간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긴 시간 교육과 프로그래밍 된 인공지능이 적절한 답을 내놓는다.
실버는 그 답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적절한 답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런가?]
벤이 되묻는 사이.
실버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벤은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적입니다]
그의 레이더에 적의가 잡힌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적의가 아닌 자신과 다른 안드로이드의 반응이다.
이곳에 자신을 제외한 안드로이드는 있을 수 없다.
퉁.
실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달렸다.
모든 바이탄은 자신의 적이다.
증오.
두 글자가 떠오른다.
전부 죽이고 싶은 유일한 종을 말하자면 실버는 단연코 그걸 바이탄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을 만든 이들을 죽인 바이탄은 실버의 입장에서 결코 용서해서도, 그럴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텅!
바닥을 박찬, 실버가 함선 밖으로 치솟았다.
‘중력제어.’
중력 제어 장치와 에너지 보존 장치를 동시에 가동한다.
그리고 위로 솟아오르자.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적이 보였다.
인간과 동일한 외모를 지닌 안드로이드다.
가장 인간다우며,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는 안드로이드.
파이브다.
[죽고 싶어 왔나?]
실버가 물었다.
[매너가 없네]
파이브가 유려한 말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실버는 양팔을 흔들었다.
텅!
손목이 뜯겨 나가며, 총구가 튀어 나온다.
가진 증오를 숨길 필요가 없는 상대다.
더 말을 나눌 필요도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두두둥!
자체 전력으로 이형포, 즉 레이저 포 연사가 가능한 실버다.
그의 양손 앞에 빛이 뭉쳐, 수십의 레이저 포를 뿌린다.
두두두두둥!
터더더더덩.
파이브는 그저 손을 앞으로 뻗는 것으로 배리어를 만들었다.
실버는 최초의 안드로이드.
출력 자체는 골드가 만든 안드로이드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싸움의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그때, 그때 모든 것을 맞춰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 실버의 장기는 그런 점에 있었다.
“내 손님인 것 같은데.”
그 타이밍에 누군가 뒤에 선다.
레이저포와 배리어가 부딪쳐 생긴 난반사의 빛이 사방을 휩쓴 뒤다.
반세주다.
아니 그뿐 아니다.
김치용, 이인준, 정유진.
그의 부대원과 안나 휴이츠와 각국의 초인이 함께다.
[초대가 과하군요]
파이브가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녀가 안드로이드란 걸 모른다면, 누구라도 매력적이라고 볼 만한 태도다.
이 정도 전력에 포위되었지만, 그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실버는 이 오만한 바이탄이 우스웠다.
[죽고 싶어 왔구나]
실버의 말에 파이브는 두 손을 내밀어 쥐었다 폈다.
박장대소다.
실버가 손을 쓰려는 순간이다.
초인 전부가 에너지를 개방했다.
전력 자체만으로 이미 일군과 비교할 만하다.
그 순간, 파이브가 가슴 옷깃을 연다.
“미인계에는 약한데.”
세주가 중얼거렸다.
[걱정 말아요. 전 미인계를 쓸 줄 모르니]
파이브가 조용히 말한다.
옷깃의 안쪽, 남자의 기대감이 섞인 그것은 없었다.
쩍!
하얗고 크고 부드러운 무엇이 아닌, 딱딱한 렌즈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뒤늦게 따라 나온 젠이 눈살을 찌푸린다.
[피해!]
익숙한 에너지 파장이 젠에게 느껴졌다.
EMP다.
둥!
아련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모두를 감싼다.
“젠장.”
이곳에 있는 전부가 동시에 전투력을 잃는 순간이다.
[EMP다!]
말하지 않아도 알법했다.
실버조차도 전신에 흐르는 에너지가 순간 사라져 당황할 정도다.
“이런 염병할.”
치용이 외치고, 자신의 그립을 뽑는다.
우우웅.
가까스로 에너지를 불어 넣지만, 무용하다.
에너지가 충족되지 않아, 블레이드가 솟지 않는다.
파이브의 능력.
그녀의 능력은 하나였다.
자신 외에 모든 에너지 능력자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
그녀를 최고의 암살자로 만든 힘이다.
모두가 당황할 때다.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 것 같아.”
세주가 입을 연다.
“그리고!”
눈길이 파이브의 가슴으로 향한다.
렌즈의 모습이 마치 무엇과 닮았다.
“취미 한 번 진짜 욕 나오네.”
골드란 새끼의 낯짝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EMP 쇼크는 이미 경험했다.
그리고 그 대비책도 준비했다.
팡.
세주의 왼팔 가죽이 터진다.
피부가 찢기고, 그 안에 은빛으로 빛나는 팔이 보였다.
파이브의 손끝이 세주를 겨눴다.
둥.
일형포 끝자락에도 못 미칠, 작고 약한 빛줄기다.
에너지를 잃은 채였다면 그 한 방에 치명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앞으로 구른다.
팡! 지지직!
땅을 헤집은 레이저다.
한 바퀴 구르고 은빛으로 빛나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프로비던스 스폐셜이다.
‘오냐. 마음껏 애용해주마.’
왼팔을 잃었던 시점에서 세주는 팔을 재생하지 않았다.
이건 그 대신이다.
에너지를 조금도 쓰지 않고, 개조했다.
이 시대에 와서는 구시대의 무기라고 할 수도 있다.
퉁!
화약이 듬뿍 든, 미사일이 팔뚝에서 튀어나온다.
파이브의 두 눈이 커진다.
인간과 닮았기에 그 반응까지도 닮았을까?
그렇다고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파이브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세주의 눈에는 보였다.
프로비던스와 시야 공유를 한 그의 눈에는 적의 모습이 명약관화하게 비췄다.
뼈대만 남은 쇳덩어리.
가진 무기도 뻔했다.
프로비던스는 세주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자, 히든 웨폰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적의 존재를 알았고.
적의 정체도 알았다.
다급하게 파이브가 다시 손끝으로 세주를 가리킨다.
다섯 개의 손가락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능력이 일천한 대신 가진 무기라고는 하나뿐.
그 또한 알고 있다.
몸을 비틀어 자리를 피한다.
정적인 상태에서 단숨에 동적인 움직임으로 변하자, 파이브의 손끝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 사이.
슈우우웅!
미사일이 하늘을 난다.
팔뚝에 붙은 초소형 폭탄이다.
봄버맨 모드, 즉 에너지를 소모해서 만든 게 아니다.
폭약으로 구성한 수제 미사일이다.
파이브는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다.
하지만 미사일은 그대로 그녀를 쫓았다.
타겟 고정형 미사일이다.
꽝!
폭발음이 경쾌하게 터진다.
터지기 직전, 부릅뜬 파이브의 눈이 보였다.
[끄아아아아!]
비명이 대기를 울린다.
폭발이 지나간 자리, 매캐한 폭염과 함께다.
그사이 자리 잡은 반쯤 부서진 뼈만 남은 안드로이드가 보인다.
[네 놈!]
그녀는 분노를 보였다.
세주는 굳이 그 장단에 맞춰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바이탄의 쓰레기 따위.
세주는 관심조차 없었다.
팔에 붙여 놓은 기계만이 대비책의 전부는 아니었다.
놈이 EMP를 쏘기 직전, 프로비던스는 작은 수작을 부렸다.
전체 노블 에너지를 유지하게는 못 해도.
‘샷 건.’
무기 정도는 지킬 수 있다.
애초에 프로비던스는 EMP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의 작은 재주 덕에 세주의 손에 홀로그램 형상이 뜬다.
총열이 두 개 붙은 샷건의 형태, 일명 더블 배럴이라 불리는 모양이다.
끼리릭.
반쯤 타버린 적을 향한 총구, 세주의 검지가 방아쇠를 뒤로 당긴다.
바짝하고 당겨진 방아쇠와 동시다.
뻥!
소음이 귀를 때렸다.
퍽!
바이탄의 머리가 터진다.
녹색 체액 대신, 전선과 윤활유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연노랑의 액체가 세주의 옷깃에도 튀었다.
기름 냄새가 진하게 났다.
퉁.
[놀랠 노자군]
통역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다.
벤이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안 당해.”
[걱정마라. 다시는 너에게 우리 쪽 EMP를 쏠 일은 없다]
세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왼팔에 다시 피부가 돋아난다.
그건 돋아난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유심히 그걸 본 치용이 입을 연다.
“저도 하나 달아주십쇼. 치사하게 혼자만 달지 말고.”
-미친놈.
프로비던스의 평가에 세주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거 주마.”
안 그래도 이들에게 줄 물건이 있었다.
“에이, 전 기계 팔이 좋습니다! 무쇠 팔! 기계 팔!”
미친 치용을 무시하며 세주는 뒤로 돌아섰다.
안드로이드, 파이브의 마지막 비명이 귀에 남는다.
이들도 고통을 느끼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