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 믿음
지지지직.
노이즈가 좀 끼긴 했지만, 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영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기술은 두 종류다.
하나는 완전 동화.
감각을 같이 느끼는 것.
다른 하나는 불완전 동화.
마치 제3자처럼 그때 일어난 일들을 보는 것이었다.
어두운 방, 파랗게 빛나는 구슬이 빛을 뿜는다.
순간, 주변이 변한다.
꽝!
처음 들린 건, 벼락이라도 치는 듯 귀를 찢는 소음이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씰룩인 남자는 곧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전장이었다.
레이퍼가 날뛰는 지구의 한 전장.
비무장지대라 불렸던 곳이다.
그곳에 한 남자가 총을 들고 방아쇠를 연신 당긴다.
총격 음은 언제 들어도 귀가 시끄럽다.
하지만 영상에 흥미가 생겨, 귀에 거슬리던 소음을 잊을 수 있었다.
“호오.”
허공에서 남자가 풀썩 앉자, 뒤에서 의자가 생겨난다.
팔걸이에 기대서 왼손을 위로 들자, ‘착’ 하고 하얀 종이봉투가 손에 들린다.
팝콘이다.
아그작, 아그작.
경쾌한 소리가 그의 입안에서 울린다.
쭈우욱.
어느새 반대쪽 손에는 탄산음료가 가득 든 종이컵이 들려 있다.
“꺼억!”
시원하게 트림을 한 시점에서 영상은 정글로 변해 있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미국, 그다음엔 정글로, 그리고 우주로 배경이 변한다.
그가 보는 건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한참을 보던 그는 왼손 검지를 들어 왼쪽으로 그었다.
그러자 쭉 하고 영상이 뒤로 돌아간다.
꽝!
처음 들었던 총성과는 다른 소음이다.
물건이 부딪칠 때 나는 충돌음.
그리고 남자는 차에 치여 날아가는 아이와 그걸 지켜보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비바람에 휘날리는 반들반들한 천의 보자기를 목에 두른 아이다.
울지도 않고, 그렇다고 놀라지도 않는다.
그저 눈을 뜨고 참상을 지켜볼 뿐.
“창의력 없는 놈.”
그는 팝콘 봉지를 뒤로 던져버리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검지와 중지를 쥐고 밑으로 긋는다.
팟.
주변에 비추던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흔들리던 빛이 마지막 홀로그램을 그린다.
한 남자와 그 어깨 위에 놓인 기계의 모습이었다.
*
“함선 한 척, 돌려보내자.”
콴의 모행성, 퀸즈 네스트의 전투가 끝난 직후다.
“…뭐라고?”
황당한 얼굴로 나호필이 묻는다.
“부상자가 많잖아. 시신도 많고.”
죽은 이가 한 둘이 아니다.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죽은 시신을 버리고 올 수도 없었다.
“곧바로 그 행성에서 빠져나오자고 한 의견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여기서 함선 한 척을 빼자고?”
“그건 진짜 놀라운 의견인데.”
이탈리아의 본 조르노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호필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이상하게 얄미운 얼굴이다.
“넌 뭔데?”
“본 조르노입니다.”
묻는 말에 쉬지도 않고 답한다.
머릿속에 기억을 뒤진다.
-전에 말했잖아.
프로비던스가 핀잔을 줬다.
전장의 승부사.
그런 별명이 떠올랐다.
승부사는 무슨.
말 안 듣게 생긴 꼬맹이다.
“넌 빠져.”
“내 부관의 자격으로 있는 거다.”
나호필이 말을 받는다.
본 조르노가 뭘 원해서 이곳에 있든지 간에.
그 덕분에 지휘권이 온전히 호필의 손에 들어왔다.
유럽의 본 조르노, 미국의 안나 휴이츠.
이 둘이 지휘권을 삼분하는 주요 인물이었는데.
안나 휴이츠야 그렇다 쳐도 본 조르노의 협력은 호필에게 큰 힘이다.
“일단 원하는 대로 대피했으니, 물어나 보자. 왜 저기서 빠져나오자고 한 거냐?”
-아둔하기는.
프로비던스의 핀잔의 화살이 이번엔 호필에게 향했다.
“왜긴.”
손가락을 가리켜 마침 퀸즈 네스트 주변에 뜬 정찰기가 보내는 화면을 가리켰다.
슈우우우우우우웅!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다.
전투가 끝난 후 이틀.
이 시간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휴식을 취한 이들이었다.
굳이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한 이유다.
-메카니모스 놈들이 구경만 할 것 같아?
바이탄에게 조종당한 여왕.
그렇다면 메카니모스는?
그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면.
지금 뜨거운 화살이 돼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인류의 함선을 구경만 할까?
프로비던스의 합리적인 의심이다.
물론 동의할 만한 일이다.
그건 빛의 기둥처럼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밝은 빛에 모두가 순간 고개를 돌릴 정도다.
“끝까지 봐.”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고 적이 보낸 ‘선물’을 봤다.
기둥과도 같은 빛줄기가 퀸즈 네스트에 꽂힌다.
쩍하고 행성에 꽂힌 기둥이다.
그리고 둥근 구 형태의 행성이 찌직 하고 쪼개지기 시작한다.
갈라진 피부를 보는 것처럼 쪼개지는 행성.
그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칠형포를 죽음의 오로라라고 하지? 구형포의 별명이 뭔 줄 알아?”
일형부터 구형까지.
나호필도 이전에 세주한테 얻은 정보가 있었다.
“…행성파괴포.”
말 그대로였다.
쩌어어어엉!
한참이나 후퇴한 곳인데도, 진동이 느껴진다.
드드드드드!
함선이 순간 밀려난다.
웨에엥!
사이렌이 울린다.
지지직.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공중에서 행성이 폭발했다.
그 여파가 함대를 흔든다.
본 조르노조차 혀를 내두른다.
“저걸 보고도 함선을 돌려보내자고?”
나호필이 입을 연다.
“저게 무슨 상관인데?”
우왕좌왕까진 아니더라도, 난리가 난 이들을 위해 나호필은 세주를 한 번 노려보고 통신망을 열었다.
“모두 제자리에서 맡은 임무에 충실하라. 습격이 아니다.”
그의 말을 부관이 세 번 반복해서 통신했다.
“이유가 뭐냐?”
나호필은 솔직한 심정으로 죽은 시신과 부상자 따위는 무시하고 곧바로 적을 치고 싶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갈 생각은 출발할 때부터 없었다.
그의 눈은 결의에 차 있었고,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용기도 있었다.
그는 지휘관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패배가 용서될 수 없는 종류의 싸움이었다.
“너무 심각하게 가지 마.”
쿡 하고 호필의 이마를 찔렀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크리스마스잖아.”
“…뭐 이 미친놈아?”
나호필이 질린 눈빛을 하고.
그 말에 본 조르노가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쳤다.
“맞네. 크리스마스구나.”
시간과 날짜를 잠시 잊고 살았다.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
오늘은 12월 23일이었다.
“지구에 승전보를 전하라고 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줘야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미 죽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산 사람을 살아야 한다.
“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지친 나호필이 고개를 저었다.
*
콴은 여왕을 잃었다.
그건 그냥 우상을 잃은 것과 달랐다.
퀸즈 네스트는 모든 콴이 태어나는 곳.
인간에게 마치 더는 출산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다.
모든 콴이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멸망이 꼭 죽음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미래’를 강탈당한 종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다른 종에게도 비슷한 타격을 줘야 했다.
그게 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나호필과의 대화를 상기하며 세주는 함포실로 내려갔다.
이 함선은 다른 함대에는 없는 포가 한 대 있다.
칠형, 죽음의 오로라라고 불리는 포다.
콴의 행성, 그것도 모성의 모든 콴을 몰살시킨 전쟁이다.
‘넘쳐나는 에너지 좀 써 보자.’
손을 충전구에 댄 세주다.
빛을 잃은 정방형의 엔진 형태다.
총 열다섯 개.
그의 손끝에서 가는 실이 나온다.
푸른빛을 뿜는 실이다.
프로비던스의 재주다.
지직.
가벼운 스파크가 가로막는다.
-어딜.
보안 시스템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그리고 세주는 먹은 에너지를 뿜어냈다.
우우우웅!
곧 열다섯의 상자가 밝은 빛에 휩싸인다.
함포실에 자리 잡고 있던 대령 중 하나가 놀라 입을 쩍하고 벌렸다.
“…함포실에 이상 발견.”
칠형포 충전은 지구로 돌아가 한 달 이상의 체류가 필요했다.
우주 한복판, 그것도 함선 내에서 충전할 수 없는 종류다.
그런데 그게 단숨에 풀로 에너지가 차오른 광경이다.
“무슨 일인데?”
나호필의 통신이 들어온다.
“칠형포 에너지가 충전됐습니다.”
“아아. 알았다.”
알았다?
김수찬 대령은 자신의 귀를 후벼 팠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령관님?”
“너무 당황해하지 말고, 언제든 쏠 수 있게 준비나 해둬.”
나호필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세주는 함포실에 나와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힘이 넘쳐흐르는 날.
눈을 뜨니 전신에 활력이 넘치는 날.
콴의 행성을 습격한 직후, 세주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때 바이탄.’
여왕을 죽인 놈을 말함이다.
-놈이 도망간 기술, 파악 완료. 어렵게 설명해도 돼?
‘아니, 단순하고 쉽고 명쾌하게.’
-워프.
워프?
세주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응. 형이 생각하는 그거.
빛이 쭝 하고 나타나 사람이 사라지는 그것?
-그거 맞아.
“이 새끼들.”
혼잣말을 뱉었다.
바이탄 놈들에게 여력이 있었다.
궁금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오닉스, 검은 에너지를 쓰게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영화를 보듯 자신의 모습이 제3자처럼 보였다.
그냥 웃으며 넘길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하나다.
‘그 힘 다시 써야겠다.’
도움이 된다면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다.
그리고 오닉스는 앞으로 싸움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야겠지.
프로비던스의 분신이다.
홀로그램 소년의 형태가 나타난다.
세주는 문득 궁금해졌다.
프로비던스는 자신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인간을 배웠고, 자신과 함께 성장했다.
처음에 자신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준 건, 그럴 수 있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닉스를 포함해 몇 가지는 아니다.
몇 가지는 지금의 적들 수준보다 높다.
워프만 해도 보고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닉스는 왜 누가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아는 걸까?
‘오닉스라는 건,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락LOCK이야.
프로비던스는 짧게 말했다.
락이라.
생각해본다.
프로비던스의 비밀들.
아직도 있었나?
어지간한 건, 호기심을 발휘하기보다는 묻었다.
세주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싸우지 않으면 죽는 이들의 단위가 달라졌다.
스스로 영웅이라 칭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볼 수 없을 뿐이지.
-그게 중요해?
‘아니.’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다.
행성파괴포라는 구형포는 연사가 불가능하다.
그만한 에너지는 메카니모스든, 바이탄이든.
놈들도 모으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굳이 퀸즈 네스트를 부순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한 번 겪어봤다.
세주는 노블 패스를 달리는 에너지를 바꿨다.
이미지는 묵직한 쇳덩이.
손끝에 모인 푸른빛이 변한다.
점점 진해지며 진청색이 되어 간다.
-요령은 압축이야. 이미 에너지 탄에 써봤잖아.
하지만 몇 번이나 시도하고도 오닉스 에너지는 만들지 못했다.
그럼 퀸즈 네스트에서는 어떻게 했지?
세주는 순간 자신이 이제까지 싸웠던 과정이 머리를 스쳤다.
커버링 기예, 전이.
에너지를 컨트롤 하는 기술이 전부다.
그리고 다음이 양도.
프로그래밍이다.
스스로 모든 걸 조종하지 말자.
에너지에게 명령을 내리는 거다.
마치 에너지 탄을 만들 듯.
전신에 에너지를 압축한다.
-에너지 트랜스 플랜트 작동.
프로비던스가 넘쳐나는 에너지를 노블 에너지로 변환한다.
효율은 별로지만.
애초에 에너지의 총량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부르르르르.
전신이 떨린다.
노블 패스 뿐 아니라, 전신 근육이 찢길 것 같다.
하지만 큰 고통은 없었다.
이미 해 본 거다.
경험했던 건, 놀라울 정도로 습득이 빠른 법이다.
세주의 손끝에 검은 덩어리가 뭉친다.
오닉스 에너지다.
“야, 이거 왜 이렇게 만들기가 어렵냐?”
겨우 손끝에 뭉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초인프로젝트 오픈. 코드명 진화, 시행할까?
‘효과는?’
-노블 패스의 소멸.
‘해.’
비밀이 많고 빌어먹을 정도로 말투가 험한 기계지만.
세주는 프로비던스를 믿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이의 의도를 읽는 재주는 남다른 그다.
여전히 프로비던스의 투박한 기계음의 목소리는 조금의 적의도 없었다.
노블 패스의 소멸이라고 했지만, 그게 자신의 몸에 해가 아니라 이로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