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 포
위이잉.
이 기계음은 익숙하다.
가끔 실버가 들려준 것과 똑같다.
안드로이드에게서 나오는 기계음이다.
그 투박한 소음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여왕의 옆, 렌즈에서 빛을 뿜는 바이탄이 보였다.
[안녕하신가? 제군들]
놈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밝았다.
콴의 형태를 한 여왕은 입을 벌리다니, 침을 주르륵 흘렸다.
[아, 이쪽은 콴의 여왕이라네. 이름은 없지. 콴은 대대로 여왕이 되면 이름도 잊고 평생을 이곳에 매여 살거든]
둥!
쩌엉!
세주의 광탄이 적을 향해 쏘아졌지만, 앞쪽에 십 중의 배리어가 펼쳐져 탄환을 막는다.
부스스스.
배리어 몇 겹이 허물어지고, 광탄도 공중에서 산화하듯 입자로 흩어진다.
‘음? 브로?’
방금까지 쏘던 탄과 느낌이 다르다.
막 앞선 싸움에서 보였던 그 충만한 에너지.
검정의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
손을 쥐었다 폈다.
-무리야. 그리고 지금은 안 쓰는 게 좋을 거고.
‘어이어이?’
지금 당장 자세한 설명을 듣기에는 상황도 시간도 좋지 않다.
세주가 목을 옆으로 꺾었다.
우두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한바탕 제대로 드잡이질을 할 차롄가보다.
[그만두게. 난 싸움을 즐기지 않아]
바이탄은 손바닥을 내민다.
머리는 크고, 배가 둥그런 형태의 안드로이드다.
굳이 비교하자면 밤마다 맥주를 다섯 캔씩 먹은 50대 아저씨의 몸매다.
무엇보다 머리통 위, 정수리를 제외하고 양옆으로 길게 선이 그어져 있어 대머리 같은 느낌을 준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악취미네.”
[나도 내 취미를 즐기진 않네]
놈이 말하며 콴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아니, 그가 내려친 것이 보통 콴이던가?
여왕이라 불리는 모든 콴의 어머니다.
여왕이란 작자는 그걸 피하던지, 막던지 해야 했다.
지금처럼 허무하게 수박 터지듯 머리가 터지면 안 되는 이였다.
퍽 하는 소리의 여운만이 남았다.
안드로이드는 손에 묻은 녹색 체액을 왕좌에 걸린 천을 들어 슥슥 닦았다.
“무슨 짓이지?”
부지불식간에 공격하려던 손이 멈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여왕은 죽었네. 인간들의 손에]
이 새끼가.
세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개수작이냐고 물었다.”
[…바이탄의 네 번째 안드로이드다. 포다]
저 빌어먹을 자기소개.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스스로 이름을 되뇌고 처음 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소개한다는 바이탄의 습성이다.
여왕을 죽일 거다.
콴을 몰살시킬 거다.
물론 그럴 거다.
세주는 처음부터 그리 마음먹었다.
다만, 아군 쪽 피해는 최대한으로 줄이고.
여왕을 신처럼 섬기는 이들이 바로 콴.
그 신이 인간에게 죽었다면 저들은 항복할까?
아니면 미쳐 날뛸까?
-미쳐 날뛰겠지.
‘짜증 나네.’
프로비던스가 말하지 않아도 뻔한 답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라. 답해주겠다]
골드가 만든 자아를 가진 네 번째 안드로이드는 건방졌다.
적어도 세주가 보기에는 재수가 없는 쓰레기다.
“저게 진짜 여왕인가?”
뒤에서 장왕이 물었다.
당연한 물음이었다.
진짜 여왕인가.
아무리 그래도 신과 동급으로 취급받던 콴인데.
[그래요. 진짜예요. 물론 말조차 할 수 없는 정신박약의 병신 콴이었지만요]
여왕의 목소리다.
물론 죽은 이의 몸에서 난 건 아니다.
이미 머리가 터져 입이 없는 존재가 말을 할 순 없다.
목소리가 나온 곳은 포라는 안드로이드의 스피커다.
“너 취미가 엄청 고약한데.”
세주가 말하자, 그 안드로이드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모든 안드로이드는 돌출된 감정이 있고, 난 즐겁지 않으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네. 예능이야말로 최고의 쇼지]
콴에게도 미친 존재가 있고, 인간에게도 미친 인간이 있다.
바이탄에게도 있었다.
미친 안드로이드가.
“오냐. 그걸 네 유언으로 삼자.”
세주가 한 걸음 나섰다.
포라는 안드로이드는 두 손을 쥐었다가 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조금 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네]
지지지지징.
두두둥.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검지를 안으로 당긴다.
손에 쥔 벼락의 탄환이 놈을 노린다.
티디디딩
하지만 탄은 사방으로 튀었다.
방금 본 기술이다.
날아오는 탄환을 블레이드 칼날로 비껴치는 기술.
[콴의 기술을 누가 가르쳤다고 생각하나?]
포가 입을 연다.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 같다.
그의 앞에 여덟 개의 칼날이 떠 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니, 빛이 뿜어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측정되지 않은 기술의 흔적 발견.
-스캐닝.
-흔적으로 적의 기술을 파악.
프로비던스가 오랜만에 기계음을 내며 본연의 일을 한다.
세주는 놈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 위.
허공이 열리며 홀로그램 영상이 보인다.
싸우다 만 콴들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여왕님]
[아]
멍한 시선의 콴 놈들은 광탄이 머리를 뚫고, 블레이드가 목을 잘라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함이 가슴을 채운다.
‘쟤들 뭐 보고 있냐?’
-홀로그램 영상. 지금 콴 행성 위, 여왕의 시체와 우리 모습이 나오고 있어.
도망간 포라는 자식의 마지막 선물이다.
“지랄 맞네.”
[아아아아아아!]
“트레에에에에에!”
곧 귀가 멀 듯한 괴성이 터졌다.
부르르.
지하에 있는 이들에게도 진동이 전해진다.
팟.
홀로그램이 사라지며, 목소리의 여운이 그들에게도 들렸다.
트레에.
“유진, 장왕, 복귀한다!”
세주가 외치며 돌아섰다.
폭주다.
이 미친 새끼.
여왕을 죽이고 폭주한 콴의 반격이다.
애초에 병력의 질도, 양도 부족했다.
여왕을 잡아 싸움을 종결시키려던 계획은 대실패였다.
-전부를 구할 순 없어.
정론이다.
하지만 제일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알아.”
세주는 속이 아니라 입을 열어 말했다.
잘 알지만.
희생이란 어쩔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그게 싫다.
하지만 아무리 세주도 모든 이를 구할 순 없었다.
*
호데르나 쿠에르보.
멕시코의 초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이클롭스 안에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얘네 미쳤나봐아아아.”
그녀의 능력은 ‘음주’ 다.
드렁큰 이글이라 이름 붙인 그녀의 사이클롭스가 달려드는 콴의 머리통을 깨부순다.
퍽!
맨몸으로 부수지 않아 다행이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부수는 건, 상당히 끔찍한 촉감이니까.
모든 콴이 갑자기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덤볐다.
“트레에에!”
통역기가 작동하지 않는 걸 보니, 의미를 담은 언어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외치고 달려들었다.
붉은 눈에서 녹색 체액이 흘러나와, 보랏빛으로 물든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지만.
반쯤 취한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이.”
취했다지만 애초에 그녀는 취할수록 강해진다.
근접 전투 능력이 안나 휴이츠와 동수.
그게 세간의 평이다.
퍼버버벅!
쩍!
휘돌리는 팔꿈치에서 칼날이 튀어나와 목을 따고.
무릎에서 송곳이 솟아 골통을 꿰뚫는다.
휘몰아치는 주먹에 어깨가 부러지고, 정강이를 박살 낸다.
무지막지한 공격이다.
하지만 적의 숫자는 많았다.
그녀의 뒤로 호위대도 분전 중이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신진대사가 빨라진다.
동시에 노블 패스를 달리는 에너지도 가속한다.
만취한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고 강했다.
다만, 취한 건 취한 것.
명석한 상황판단은 절대 무리다.
그녀는 적을 쫓아 달렸고, 어느샌가 주변에 콴의 무리만 가득했다.
그중 하나가 그녀의 등에 달라붙는다.
방심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았을 뿐이다.
달라붙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의 사이클롭스 드렁큰 이글은 전투 스타일에 맞게 대전차 포탄에도 흠집이 나지 않는 강도다.
부글.
등 뒤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여왕에게 영광을]
트레이.
세 글자 소리와 통역기로 변환된 말이 동시에 들린다.
만취한 정신이지만, 쿠에르보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한 방 당했어.’
꾸왕!
그런 폭음이 들렸다.
동시에 콴들이 눈에서 보랏빛을 뿜으며 그녀에게 달려들어 외친다.
[여왕에게 영광을!]
트레이!
‘미친 새끼들.’
술이 조금 깬다.
그제야 놈들이 한 짓이 무슨 의도인지 알았다.
자폭이다.
전신의 에너지를 터트려 몸을 폭탄으로 삼는다.
등이 따갑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건, 사이클롭스 외장에 파손이 일어났다는 것.
쿠에르보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얼핏 달려드는 콴의 숫자는 수십이다.
저게 전부 터지면 살 수 있을까?
쿠에르보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이 새끼들이 진짜 미쳤나!”
콰아아악!
혼자서 수백의 콴을 죽인 치용에게도 보랏빛의 액체와 기체의 중간쯤 되는 기이한 걸 뿌리며 달려들었고.
하늘에 뜬 인준과 안나, 나기주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콴은 자폭을 감행했다.
꾸앙!
꽈아아앙!
퍼어어엉!
[여왕에게 영광을!]
트레이!
어디서든 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들은 초인, 이 정도에 죽음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초인이 아니었다.
*
“박하사!”
정중필은 짝꿍 같던 친구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빌린 돈…!”
무슨 마지막 인사가 저따위인지.
펑!
사이클롭스 옆구리에 손을 박아 넣은 콴이 터진다.
후두두둑!
보랏빛으로 변한 피다.
동시에 붉은색도 섞였다.
“꾸웩.”
마지막 인사도 개 같고, 지금 비명도 개 같다.
박호성은 죽었다.
신체의 반이 날아갔다.
사이클롭스의 외눈에 빛이 꺼진다.
“미친!”
정호필은 탄환의 남는 개수를 따질 수 없었다.
두두두두두두둥!
티디딩.
몇 분 되지도 않아 탄창이 빈다.
팅!
김이 나는 탄창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블레이드 그립을 쥔다.
남은 탄창은 없다.
이 싸움은 언제 끝나지?
정호필은 자신도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붙으면 죽는다.
놈들은 몸을 던져 폭탄을 사방으로 뿌렸다.
아니, 붙지 않아도 죽음은 바로 곁에 있었다.
다섯 놈이 한데 뭉친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개구리를 닮은 놈들의 몸이 엉킨다.
부둥켜안는 정도가 아니라, 분해되어 한 몸이 된다.
그리고 보랏빛의 기체와 액체의 중간쯤 되는 안개를 뿌린다.
‘시파.’
피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4시 방향 전속력!”
그때 들리는 목소리다.
누구인지 파악할 틈도 없다.
그는 달렸다.
동시에 뻐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의 여파가 정호필의 몸을 덮칠 때쯤이다.
달리던 방향에 추락한 서클 쉽이 보였다.
적의 전투기다.
그 뒤로 몸을 날렸다.
꽈-앙!
사방에서 일어나는 폭음이지만, 바로 옆에서 터지는 소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귀가 멀 것 같다.
정호필이 간신히 숨을 돌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유명한 얼굴이 보였다.
‘이인준?’
병신 이인준이란 별명이 있지만, 그의 앞에서 별명을 말하면 수명이 끝난다는 소문도 있다.
그는 사이클롭스도 없이 맨몸으로 눈을 빛내며 위에서 외쳤다.
“전부 내 명령에 따른다! 움직여!”
인준이었다.
적이 폭탄이라면.
인준에게는 봄버맨 모드가 있었다.
그는 폭발의 여파를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그가 할 일은 하나라도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일이리라.
‘이게 당신이 원한 일이겠지?’
형님이라 부르는 새끼라면 이렇게 했을 거다.
거기에 한명 더.
“솔직하게 좀 살아요.”
그녀가 떠오른다.
솔직하게.
그렇게 살려고 해.
‘난 지금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
전에 없이 강한 욕구가 가슴에 끓어올랐다.
“야! 이 새끼야! 멍 때릴래?”
방금 구한 남자의 머리 위로 인준이 격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