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 이제희
“끝나고 고기 먹자!”
치용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적을 베고 터트리고, 난장을 피울 때.
유진은 자신에게 배속된 이들을 데리고 전장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조용히, 그리고 눈은 멀리.
‘어디서 찾으라는 거야.’
놈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란다.
그런 곳을 찾는 게 쉬울 리 없다.
애초에 여기는 지구와 환경도 다르고, 지형도 다르다.
한쪽을 보면 바위산이 솟아있고, 그 옆을 보면 날카롭게 갈린 이상한 금속이 위를 향해 솟아있다.
‘천벌을 많이 받나?’
벼락이 쏟아지는 걸 막는 피뢰침이 수십 개는 있는 것 같다.
사박.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걷는 유진의 뒤로 한 여자가 붙는다.
그 옆으로 애꾸눈의 남자도 함께다.
“공기가 있어서 다행이죠?”
유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여자가 볼을 붉힌다.
“네에.”
수줍음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걸 본 애꾸 남자, 발해의 이무영이 눈을 부라렸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그냥 말 건 겁니다.”
“교관님 얼굴로 말 걸면 그게 개수작입니다.”
불쑥 뒤에서 한 명이 더 튀어나온다.
장왕이다.
“어쩌라고?”
“그렇다는 겁니다.”
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장왕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유해 보여도, 정유진 또한 반세주 급의 미친 녀석이다.
장왕은 그의 ‘교육’을 경험했다.
수틀린다고 총을 쏘는 미친 탕탕이에게 더는 도발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은데….”
여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셋이 초인 계열의 청각이 아니었다면, 명확히 듣지도 못했을 목소리다.
“또렷하게 말해라. 제희야.”
“네. 삼촌.”
이무영의 조카, 이제희.
신체 능력 평가 D급.
정신 능력 평가 C급.
멘탈도, 육체 능력도 수준 이하다.
여기에 모인 이들이 뛰면 그 뒤를 쫓아오지도 못한다.
훈련소였다면 낙오병이자, 낙제병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를 이곳에 합류시켰다.
얼굴이 귀여워서?
아무리 여자와 대화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걸 낙으로 삼는 유진이지만, 전장에서 그럴 여유는 없다.
귀여운 얼굴이 유진의 타입이긴 했다.
유진은 성숙하고 섹시한 여자보다, 작고 귀여운 여자가 좋았다.
하여간 외모는 이유가 아니다.
“넘어가죠.”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물론 이제희를 향해서다.
제희가 손을 잡으려 하자 무영이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데려간다.”
철벽의 골키퍼다.
아니, 그러니까 전장에서 연애질할 생각이 없다니까.
유진은 피식 웃어버리고, 앞을 가로막는 절벽을 뛰어넘었다.
이 행성의 지형은 어떻게 된 건지, 갑자기 땅이 푹 꺼지더니, 폭 5M가 넘는 절벽이 나타난다.
까마득한 높이는 아니지만, 후끈한 열기가 밑에서 올라온다.
용암이 흐르는 게 보였다.
빠졌다가는 아무리 유진이라도 노글노글 익고, 타서 형체가 없어지리라.
톡.
가볍게 땅을 박차고, 넘는다.
용암이 흐르지만, 겨우 폭 5M를 못 넘는 인간은 이곳에 없었다.
무영은 염력으로 제희의 몸을 가볍게 띄운 뒤 손목만을 잡고 넘었고.
장왕은 폴짝하고 뛰었다.
“전 저분하고 넘어도 되는데.”
제희가 다시 중얼거렸다.
무영이 눈을 부라렸다.
“저 새끼는 절대 안 돼.”
“다 들립니다.”
유진이 뒤를 향해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민간인이다.
하지만 가진 바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차출해서 데려왔다.
아니, 제희를 데려가니 무영이 따라왔다.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적의 왕을 찾는 일이다.
길을 찾을 때 모르면 물어야 한다.
유진은 지형을 찾지 않았다.
‘알 만한 놈 하나 정도 붙잡으면 되겠지.’
어떤 사회도 전투원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집단도 전투가 불가한 이를 내세우지 않는다.
후방.
그곳에 찾는 놈이 있을 거란 확신으로 왔다.
“보이네.”
유진이 먼 곳을 주시하며 말했다.
“대단해요. 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제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딴에는 용기 내서 말을 건 듯했다.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웃지 마.”
철벽의 골키퍼가 다시 둘 사이에 선다.
이무영이 눈을 부라린다.
“장왕.”
“네.”
무시한 유진은 장왕을 부른다.
옆으로 붙은 그에게 유진이 손가락을 들었다.
“보이지?”
장왕도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간신히 포착된 반구 형태의 기지를 봤다.
“저깁니까?”
“가서, 하나만 잡아 와. 대가리로.”
유진이 말했다.
“같이 안 가고요?”
“제희는 전투에서 최대한 배제한다.”
그녀는 지켜야 할 존재, 위험하게 잠입하는 건 전부 다른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진과 무영은 그녀를 지키고, 험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장왕의 몫이다.
“이러려고 저 데려온 겁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이다.
장왕은 한숨을 내쉬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장에 참여하지 못한 게 억울했다.
이 일이 더 중요하다는 유진의 말이 아니었다면, 장왕은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후. 그럼.”
그러니까 말은 가벼이 해도, 장왕은 이 일을 얕보지 않았다.
그가 몸을 추스르고 달려나간다.
소리 없이 바닥을 박차고, 곧 보랏빛 노을에 몸을 감춘다.
셋은 얌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제희의 능력은 희귀하다.
무영은 조카를 이런 곳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일순, 무영은 그녀가 입대를 신청한 날을 기억했다.
죽은 형을 떠올렸고, 그 순간.
“괜찮아요.”
제희가 무영에게 말한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영의 기억을 읽었다.
체력도 정신력도 빈약한 그녀지만, 이곳에 있는 이유다.
그녀는 아주 뛰어난 사이키커였다.
염동력 계열이 아닌, 텔레키네시스.
그녀는 붙어 있는 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거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대가 아니라면 무리다.
면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읽는 건 생각이 아닌, 기억이었다.
기억하는 순간, 느꼈던 감정까지 읽는다.
그게 이곳에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다.
적의 정보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제희만 있다면 적군의 동향과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의 능력이라면 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고로, 이제희란 여자는 이 전쟁을 단숨에 끝낼 최강의 패다.
그렇기에 그녀의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유진은 여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경이 바짝 곤두 선 채였다.
세주랑 같이 다닐 때와는 다르다.
이곳에서 벌어질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애초에 예민한 감각만큼은 치용과 인준을 포함해 셋 중 최고다.
그런 유진의 발밑으로 무언가 느껴졌다.
작은 진동이었다.
유진이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를 두 번 두드린다.
신호였다.
적 또는 위험을 감지했을 때의 신호.
무영은 아무렇지 않게 제희를 옆에 두고 사이킥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유진은 천천히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아무 연관도 없어 보였지만, 결론적으로 제희를 사이에 둔 포지션이다.
둥둥.
그제야 무영도 소리가 들렸다.
장왕이 간 쪽이 아니라 그 반대다.
[인간?]
콴의 총 숫자는 셋.
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에 띄기에 사이클롭스를 타고 오지 못 했다.
블라인드라 이름 붙인 자신의 사이크롭스가 있다면 모를까.
‘염력으로 셋을 때려눕힐 수 있을까?’
그리 자신 있는 상황은 아니다.
무영은 유진을 바라봤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이 자는 어떨까?
반세주의 능력이라면 신물 나도록 봤다.
김치용도 이인준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정유진은 아니다.
서포트 역할.
그게 정유진의 포지션이다.
무영은 한 번도 그의 활약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제대로 싸우는 것도.
무영은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가 한다.’
꿈틀.
셋의 콴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인간이 왜 이곳에?]
[잡자]
[생포해서 정보를 캐내야겠다]
되도록 피하고 싶던 상황이다.
작전 중, 적을 만나는 건 피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막겠다.”
무영이 호기롭게 나섰다.
“제희나 지켜요.”
그런 무영의 앞, 유진이 등을 보였다.
[난 일류 전사 프렉스다]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말하지 마. 외울 생각도 없으니까.”
그 말과 동시다.
무영은 유진을 놓쳤다.
아니, 그냥 눈앞에서 사라졌다.
‘투명화?’
그런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아니었다.
쩡!
제일 왼쪽에 있던 콴의 머리 위다.
블레이드가 교차하며 불꽃이 튄다.
동시에 유진은 왼손으로 기관단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두두!
광탄이 제일 앞에 나선 놈의 배리어를 두드린다.
무영도 도우려고 했다.
바로 염력을 일으키고, 적어도 팔다리라도 묶을 셈이었다.
첫 번째 놈에게 염력을 일으킬 때다.
프렉스라고 이름을 밝힌 놈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무슨!]
놀란 놈의 눈에서 녹색 피가 흐른다.
아니, 눈뿐 아니라, 전신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다.
‘언제?’
무영의 의문은 당연했다.
서로 격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한 번 칼질 했고, 직후 기관단총을 쐈다.
그리고 세 마리의 콴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녹색 피를 뿜으며 죽는다.
“후.”
유진은 숨을 내쉬었다.
세주가 전해 준 모드라는 것, 쓸 만한 걸 넘어섰다.
‘오버 페이스라.’
체감하는 속도가 달라진다.
마치 공기와 공기 사이를 누비는 느낌이다.
짧은 순간, 몸이 깃털만큼 가벼워진다.
유진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인젝션 탄.
1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건 세주와 다른 이들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세주의 도움을, 정확히는 프로비던스의 도움을 받아 인젝션 탄을 개량했다.
콴에게만 먹히는 특제 독약이다.
맞는 순간 죽는다.
광탄에 섞여 날아간 탄이 하나.
대부분 탄을 배리어에 막혔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정확히 발등에 꽂혔다.
나머지 두 놈 중 하나는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팔에 꽂았고.
가장 마지막 놈은 뛰기 직전 소리 없이 던졌다.
그게 싸움의 결과였다.
“보지 마라.”
무영이 제희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제희는 그런 무영의 손을 잡고 내렸다.
표정은 파랗게 질렸지만,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죽은 콴을 정확히 노려봤다.
“아버지의 원수에요. 그리고 지금 전 전장에 있고요. 어린애 취급은 그만하셔도 돼요.”
수줍은 많은 소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당찬 처녀다.
“그렇지.”
무영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 사이 장왕이 한 손에 콴 한 놈을 데리고 왔다.
딱 봐도 전사형이 아니다.
은빛에 파란 무늬가 있는 망토를 입은 놈은 양손을 모은 채 개구리 같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별일 아냐.”
유진이 일축하고 눈짓했다.
이곳에서 무언갈 할 순 없었다.
넷은 자리를 옮겼다.
아는 곳은 없었지만, 야전 경험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이들이다.
곧 자그마한 둔덕을 두고 뒤로 몸을 낮춰 숨겼다.
“그럼, 안녕.”
유진이 그놈을 향해 입을 연다.
[…죽일 테면 죽여라]
비장하게 말하지만, 이제까지 봤던 콴과는 다르다.
전투 민족이라지만, 모든 콴이 싸움에 미친 건 아닐 거다.
세주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이놈은 겁쟁이다.
유진은 한눈에 알아봤다.
승.
짧은 단검 형태의 블레이드 두 자루를 쥔 유진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제희 씨는 뒤로 물러나죠.”
“괜찮아요.”
제희가 다시 당찬 처녀처럼 말했다.
유진이 뒤를 돌아봤다.
“아뇨. 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부드럽지만, 강한 어조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몸을 돌렸다.
무영이 그녀를 데리고 물러났고.
유진은 콴의 볼에 대고 가볍게 칼날을 대고 그었다.
스억.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유진은 웃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자리에 칼을 대고 그었다.
스걱.
조금 더 깊었다.
[무슨 짓이냐]
대답은 없었다.
장왕이 뒤에서 염력을 일으켰다.
콴의 입을 힘으로 잡아서 누른다.
말을 할 수 없는 콴의 볼에 다시 칼날을 댄 유진이다.
스걱.
반복 또 반복.
고문이랄 것도 없었다.
놈은 죽는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고통스럽게 죽느냐.
편하게 죽느냐의 차이뿐이다.
볼 다음에는 어깨, 팔, 허벅지, 다리.
어디랄 것도 없이 그었다.
말없이 한 시간을 슥슥 칼을 놀리자, 놈의 눈에 어린 공포가 커진다.
‘너희도 겁을 먹는구나.’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사실이 유진은 어색했다.
[원하는 걸 말해다오]
놈의 눈이 까맣게 죽었다.
“말할 필요 없어.”
정신이 죽은 자다.
놈의 몸이 녹색 체액으로 도배가 됐을 때쯤, 제희가 다가왔다.
그녀는 조용히 손으로 놈의 머리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그녀의 눈이 눈꺼풀 안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찾았어요.”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 대답에 유진은 바로 통신을 연결했다.
이제는 세주가 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