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 천 번
가르간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몇 번 정도는 싸움의 형태를 상상했을까?
적의 무기가 무엇인지, 특기가 무엇인지.
이런 고민을 했을까?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적어도 수백, 아니 천 번이 넘는 전투를 했다.
1년 동안, 가상의 세계에서 세주의 주적은 가르간이었다.
팽에게 들은 정보와 본 것들을 취합해서 만든 가상의 적은 강했고, 잔인했으며, 가차 없었다.
쩌저정!
바이탄의 함선은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했다.
칼날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에 굉음이 터졌고.
셋은 검은 공간을 배경으로 춤추듯 어울렸다.
두 줄기 은청색 빛이 진청색 빛 하나를 쫓는다.
벌써 수십 번을 넘어선 칼질이 세주의 몸을 노렸다.
-1시, 30도.
방향과 각도를 계산한 프로비던스의 말이다.
대부분 공격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계산이 끝나지만, 사각에서 날아오는 공격이다.
드드득!
뒤편에 블레이드의 넓은 면을 대서 적의 공격을 흘렸다.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한칼을 먹인 가르간은 멀찌감치 떨어진 후다.
고속이동 참격, 세주가 흉내 냈던 기술이다.
그 오리지널의 위력이다.
보이는 건 칼날뿐이고, 반격은 꿈꿀 수도 없다.
거기에 뻗는 칼, 쿠인은 어떤가.
그의 칼은 얇고 길었으며 휘어졌다.
영활한 뱀과 같았다.
츄아아악! 카가가각!
목덜미를 스친 칼날이다.
각도와 방향을 계산해서 예측하지만, 시시각각 변한다.
한쪽은 빠르고, 한쪽은 유연하다.
쩌쩡!
그 사이 가르간의 참격을 한 번 더 막았다.
오른손에 든 블레이드 날이 이번의 방어로 깨졌다.
배리어를 펼치면 틈이 생긴다.
세주는 블레이드를 휘둘러서 무기로 무기를 막는 신기를 보였다.
방어 일변도.
핵 & 슬래쉬 모드로 오로지 방어에만 힘쓴다.
말을 할 틈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있었다면 가르간과 쿠인은 세주를 비웃어도 무방했다.
같이 덤비라고 해놓고, 정작 위기의 연속이다.
피하고 막는다.
그 단순한 반복에 힘이 빠질 만도 했다.
위기라고 생각된 건 세 번.
모두 적절하게 막았다.
최소 천 번, 이 콴이라는 빌어먹을 새끼들을 상상하며 싸웠다.
세주는 수없이 싸우며 인간보다 전투에 특화된 놈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약점을 강점으로.
모든 전투의 기본이다.
그리고 전술과 전략은 일대일이든, 다대다든 필요한 법이고.
세주는 생각 했고, 고민했으며,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르간은 세주를 중심으로 태풍처럼 몰아친다.
쩡!
대신 놈은 일격을 가한 후 지나친다.
튕겨 나가는 방향은?
지지지지징.
세주가 가진 가장 강력한 전술은 프로비던스의 존재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뜨고, 일격을 가한 후 가르간이 머물 곳이 보인다.
세주가 몸을 비틀었다.
튕겨내는 각도를 조절하면, 전방에 쿠인과 가르간 둘을 나란히 세울 수 있다.
쿠인의 칼은 빈틈을 파고든다.
기회라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그곳을 찔러 들어왔다.
당연하다.
적의 공격은 일종의 원거리 공격이다.
가르간은 몸을 날려 베는 쪽, 쿠인은 거리를 벌리고 뚫는 쪽이다.
비유하자면 칼과 화살.
효율적인 합동 공격이다.
쩌정!
세주는 근거리로 짓쳐들어오는 가르간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고.
쿠인의 칼날은 대부분 피했다.
칼큐레이팅 모드가 아니었다면, 보이지도 못할 묘기다.
그 대신 뇌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사각의 공격은 프로비던스가 계산해준다지만, 나머지는 세주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혹사당하는 건, 몸이 아니라 머리였다.
전술과 전략.
그 첫 번째, 공격 수단을 숨긴 것이다.
쩡!
가르간의 칼날을 막아내고 튕긴다.
비틀.
허점을 보인다.
함정이라고 해도 원거리, 세주가 쿠인을 공격할 수단이 없기에, 놈의 뻗는 칼은 어김없이 날아왔다.
-목.
옆으로 간신히 목을 꺾는 모습이다.
누가 봐도 위기였고, 결국 일격을 허용하는 모습이었다.
가느다란 줄타기의 끝이 최악의 결과로 보일 지도 모를 순간.
세주의 등에서 손이 솟았다.
프로비던스의 존재는 세주가 가진 최강의 카드다.
그리고 흉몽 모드는 둘이 하나 된 힘이고.
기계 손이 솟고, 벼락을 꺼낸다.
단숨에 이뤄진 일이었다.
카가각!
쿠인의 칼날이 목을 스치고.
흉몽 모드의 커다란 동체로 가려진 벼락의 총구가 세주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온다.
‘모드 온 불릿 마스터.’
꽝!
이번 방아쇠는 프로비던스가 당겼다.
쾅!
더구나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흉몽 모드 안에서 또 하나의 모드를 개방.
세 번 압축해, 작은 광탄의 형태가 된 애비탄이 쿠인의 상체를 맞춘다.
꽈-앙!
벼락의 두 번째 울음이 쿠인을 삼켰다.
동시에 세주는 몸을 바로 하며, 뒤로 물러났다.
흉몽 모드 안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모드 오프.’
순간, 두 개의 모드를 껐다.
혹사당한 뇌도, 몸도 아주 잠깐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그 상태로 앞을 주시했다.
적의 공격을 예상했으나, 가르간은 우두커니 멈춘 채였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개인 전술의 결과도 보였다.
어느새 날아와 몸에 맞은 녹색 물방울이다.
무중력 상태에서 적의 체액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멀리 흩어져 버렸다.
쿠인은 하체, 그것도 다리 두 쪽만을 남긴 채 폭사했다.
[총?]
그 사이 벼락은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뭐, 내가 본래 저격수거든.”
코앞에서 저격 총을 당기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방 먹었다]
가르간이 손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한 방 더 먹을 거야.”
세주의 말에 가르간은 패배를 예감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고민했다.
콴의 대군을 끌고 왔어야 했을까?
일인 군단, 가르간과 쿠인, 벤텀까지 셋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들이 바로 콴의 핵심이며 힘이다.
그 최강의 전력이 하나 꺾였다.
슈우우웅!
주변에 남은 함선도 몇 개 없었다.
더구나 인준도 놀지 않았다.
셋이 어울리는 동안 나머지 함선에 광탄 폭격을 퍼부었다.
그사이 들리는 추진음이다.
실버였다.
품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끌어안은 채다.
“죽었어?”
그걸 본 유진이 묻는다.
세주와 가르간에게도 들렸다.
둘은 다른 이유로 그들을 주목했다.
가르간은 벤텀이 죽이려 했던 적인 인간임을 알기에 멈췄고.
세주는 치용의 생사여부가 궁금했기에 멈췄다.
“이 새끼가, 형을 왜 함부로 죽여.”
입만 살았다.
몸을 어찌나 험악하게 굴렸는지, 너덜너덜하다.
적어도 눈먼 칼과 진짜 큰 칼 정도는 썼다.
보지 않아도 어떤 전투를 했는지 알겠다.
힘겨웠으리라.
하지만 이겼다.
고로, 적은 죽었을 거다.
[벤텀도 당했나?]
가르간의 눈에 실버의 손에 들린 블레이드 그립이 보였다.
콴의 삼대 신기 중 하나다.
타는 칼, 벤텀이 죽기 직전까지 손에 놓을 리 없는 물건이고.
“너 하나 남았네? 항복 하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세주를 향해 가르간은 칼을 들었다.
[믿을 수가 없군. 우주 최강의 콴, 그중에서도 제너럴 급이 둘이나 당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봐봐. 종종 믿을 수 없는 일이 주변에 일어나곤 한다니까.”
[내가 무기에 의존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모르는 게 많으면, 너 공부 좀 해야겠다.”
가르간은 세주의 말을 무시하고 왼팔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우두둑.
듣기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혈관이라도 잡아 뜯나 싶었다.
가르간의 손에 들린 건, 얇은 막대기였다.
파삭.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콴 놈이 그걸 꺼내자마자 부순다.
부러진 막대기에서 은청색의 뿜어졌다.
가르간은 기다리지 않고 그 빛에 손을 넣었다.
[빛의 송곳니, 지금 널 물어뜯을 이름이다]
천 번을 넘게 싸우며 세주는 프로비던스에게 항의했다.
“야, 좀 창의적으로 캐릭터 못 짜냐?”
-또 뭐가?
“이 새끼 죽어도 근접 공격만 하잖아.”
-팽에게 들은 정보와 모든 걸 종합한 결과야. 거짓을 넣을 순 없다고.
“아니, 가짜로 만들라는 게 아니라, 이 정도 전투력이면 무조건 근접전을 펼칠….”
말을 하다말고 세주는 입을 다물었다.
콴은 바이탄과 메카니모스를 포함 소수 정예를 표방하는 최강의 종이다.
단일 전투력으로는 최강이란 소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져 본 적이 없는 존재.
그게 가르간이라면.
굳이 새로운 것들을 개발하지 않았을 거다.
적과 거리를 붙이는 다리가 있고, 손에는 무엇이든 베는 칼이 있다.
근접전을 포기하고 원거리에서 적과 싸울 이유가 없다.
혼자서 바이탄 일개 대대를 박살 낸 일화는 은하 전체에서 꽤 유명한 이야기다.
세주는 생각을 정리했다.
가르간은 싸움을 즐기고, 이제까지 져 본 적이 없다.
그는 근접전만을 고집한다.
그리고 칼은 아무리 잘 들고, 날카롭다고 해도.
붙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가르간의 손에 들린 칼도, 놈의 빠른 다리도 다 필요 없었다.
‘모드 온 봄버맨, 불릿 마스터.’
색다른 형식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모드 창조, 봄버 마스터.’
파바바바바밧.
이제까지 전투의 무대가 된 곳, 가르간과 세주 사이에 빛이 번쩍인다.
싸우며 뿌려 둔 세주의 에너지다.
프로비던스가 정형해서 만든 에너지 구체.
모두 애비탄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폭탄이다.
달려들던 가르간의 몸이 멈추고, 세주의 손에는 어느새 벼락이 들렸다.
“굿바이 개자식아.”
꽝!
벼락이 울었다.
꽈과과과광!
곧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났다.
세주는 한 발의 탄환을 쏘고, 그대로 모든 모드를 해제했다.
모드 창조라니, 말만 그럴 싸 할 뿐.
억지로 두 개를 이어 붙인 거다.
콰우우우!
폭발로 일어난 열 폭풍이 사방을 휘몰아쳤다.
몇 기 남은 바이탄의 함선이 배리어를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실버가 날아와 세주를 안고 비틀 쉽으로 날았다.
“조종은 내가.”
“저도요.”
인준과 유진이 조종간을 잡았다.
그나마 둘이 가장 멀쩡했다.
치용은 반죽음 상태였고, 팽도 바이탄의 에잇에게 당한 뒤 골골댔다.
실버도 팔을 잃었다.
하물며 세주는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꺽꺽댄다.
“에고, 나 죽네.”
그래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아직은 멀쩡하단 소리다.
“어디로 가죠?”
열 폭풍의 여파에 피하며 유진이 묻는다.
“어디긴.”
세주는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전장이지.”
겨우 무너지는 댐의 한쪽 면을 막았을 뿐이다.
아직도 전면에서는 무지막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콴과 바이탄의 예봉은 꺾었지만, 메카니모스가 남았다.
인류의 전력은 처음부터 열세였다.
콴의 제너럴 급 전사가 없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바이탄의 부대를 물리쳤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남은 메카니모스의 전력만으로도 인류는 질 수 있었다.
아니, 이기기가 더 힘들었다.
나호필도 세주도, 인류를 이끄는 수뇌부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
콴이었던 메카니모스의 1급 전투원 미라는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겉모습은 콴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녀도 실험을 거듭해 새로운 몸과 힘을 지닌 메카니모스였다.
[세타필]
[네. 미라 님]
[이번 전투 포인트가 얼마지?]
메카니모스의 공적은 포인트로 환산되고, 포인트가 높아지면 그만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노예도, 실험도구, 실험에 도움이 될 연구원도 전부 포인트가 필요하다.
[높지 않습니다]
세타필은 그녀에게 귀속된 2급 전투원, 단순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미라는 그녀를 좋아했다.
‘속이 검은 메카니모스 사이에 드문 녀석이지.’
[직접 손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적어도 몇 명 정도는 처리해야겠네]
콴의 세 말썽꾸러기가 떠났고, 바이탄은 같이 싸우지 않는다.
이 전장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미라는 딱 한 명, 직접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
황금빛을 뿜는 거체다.
안나 휴이츠, 골든 피스트라는 사이클롭스에 탄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