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 일류
장기든, 체스든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다.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수를 두는 것.
싸움에서 중요한 건, 뒤를 치는 거고.
전장에서라면 적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한 수였다.
무엇보다 세주는 상대가 생각하지 못한 일격을 가할 때, 가장 즐거웠다.
터터더더덩! 콰광!
실버의 전투인지, 아니면 치용의 전투인지.
굉음이 울렸다.
아무것도 없다면 그저 막막한 공간이지만, 사방에 함선이 빛을 뿜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배경이었다.
가르간과 쿠인은 세주의 말을 듣고 웃지도,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나 혼자]
가르간이 나선다.
쿠인은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너, 후회한다.”
번쩍.
아머의 얼굴 부분, 마스크 위로 쭉 뻗은 선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푸슉.
증기를 한 번 뿜은 프로비던스가 중얼거렸다.
-형이랑 합체하는 건 정말 불쾌해.
‘미친 녀석.’
세주도 남자랑 한 몸이 되는 건 사양이다.
흉몽 모드는 어깨가 허전하다.
세주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허전한 대신,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콰드드득.
주먹을 쥐었다.
가르간이 고작 팔 하나 거리만큼 다가왔다.
허공에 둥둥 뜬 그가 자기보다 커진 세주를 바라본다.
가르간의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실제로 떨린 건 아니었다.
칼큐레이팅 모드의 힘이다.
에너지의 흐름과 근육, 몸짓 모든 걸 종합해서 계산하는 모드.
그게 칼큐레이팅 모드였다.
세주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훙.
단 1초.
적의 공격을 예측한다.
흉몽 모드가 가진 힘이다.
어느새 뽑아 든 가르간의 칼날이 목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뒤로 물러나며 세주가 발을 올려 찼다.
텅!
묵직한 굉음이 터졌다.
휙!
가르간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했다.
후우우우웅!
은청색 칼날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쿠인은 그 사이 옆으로 돌아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퉁!
그는 뻗는 칼이라 불리는 몸.
그 이름을 붙여 준 기술이었다.
은청색 빛이 쏘아져 나간다.
아머 안에서 세주는 그 모든 걸 예측했고, 봤다.
인지했다면, 그다음은 움직이는 일뿐이다.
흉몽 모드는 그 자체만으로 흉기이자,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가르간을 상대로는 조금 질긴 장난감일 뿐이다.
세주도 프로비던스도 알고 있었다.
가르간을 만난 이후, 그를 상대하기 위해 고민했다.
오닉스로 부르는 검은빛의 에너지 농축은 실패했다.
하지만 최선이 없다면, 언제나 차선은 있는 법이다.
‘듀얼 모드.’
동시에 두 개의 모드를 켠다.
흉몽 모드 안에서 세주는 오버 클럭 모드를 발동했다.
단 2초뿐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첫 일격을 먹이기에는.
훅.
진청색 빛이 흩뿌려진다.
가르간은 순간 세주의 모습을 놓쳤다.
아주 잠시뿐이지만, 당황할 정도로 빠른 속도다.
쿠인이 아는 가르간은 우주 최강이었다.
겨우 인간 하나에 애먹을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세주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게 지금의 결과를 불렀다.
스악!
날카로운 기음이 들리고, 쿠인은 한쪽 팔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통증이 밀려왔다.
“둘이 동시에 덤비라고 했다.”
흉몽 모드를 켠 세주의 목소리가 쿠인에 귀에 들렸다.
팔꿈치에서 뿜어진 예리한 칼날이 보였다.
[…가르간]
쿠인은 비명과 신음 대신 가르간을 불렀다.
[놓쳤다]
옆으로 바짝 다가온 가르간이다.
[동시에 갈까?]
싫다.
가르간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펼치며 쥐었다 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인간 무슨 짓을 한 거냐?]
“열심히 훈련했지. 네놈들 골통 빠개려고.”
[같이 하자. 쿠인]
콴이란 종족의 특성이었다.
싸움을 좋아하지만, 명예는 없다.
그들에게 일대일의 전투가 주는 희열은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전투, 그것도 이기는 전투뿐이다.
치열한 전투를 바라면서도, 마지막에는 승리자의 자리에 서고 싶다는 거다.
빌어먹을 정도로 이기적인 새끼들이었다.
“진즉에 그래야지.”
세주가 빙그레 웃었다.
-알지? 최대라고 해도 58초가 한계야.
오버 클럭 모드는 여러모로 부담된다.
세주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을 위로 뻗었다.
쩌저정!
둥근 방패 형태의 배리어가 생겼다.
배리어의 앞쪽 쿠인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손끝, 얇은 블레이드가 이어져 있었다.
그게 배리어를 때렸다.
[팔 하나를 뺏겼으니, 전력으로 가주마]
작은 체구의 쿠인의 전신에서 넘실넘실 은청색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그 기세와 모습은 보는 순간 줄행랑을 치고 싶을 만큼 살벌했다.
그 옆, 가르간의 로브 사이에서도 비슷한 빛이 뿜어졌다.
퉁퉁.
세주는 양 주먹을 마주 부딪쳤다.
“덤벼. 이 개 같은 자식들아.”
지구에 우주 해적을 보낸 건, 콴이다.
그동안 행성을 부수고 정보를 수집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도.
부모를 잃은 아이도.
연인을 잃고, 광화문에 위령비를 세우게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새끼들이다.
이 모든 싸움의 시작이 가르간이란 놈이었다.
세주는 처음부터, 가르간을 살려 줄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
두 명의 바이탄을 죽이는 건 힘겨웠다.
치용은 기합 대신에 호흡을 가쁘게 뱉었다.
“후아, 후아.”
“후우우우우우. 하아아아아아.”
가쁜 숨을 쉬다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호흡을 가다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신에 퍼진 노블 에너지를 컨트롤 하며 주변을 살폈다.
‘많이 잡는 게 중요한가? 어느 놈을 잡느냐가 중요하지.’
인준이 난리를 쳐 둔 함대가 보였다.
다이아몬드와 돌멩이를 같은 종류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억해뒀다가 얘기해야겠다.’
다이아몬드와 돌멩이.
나중에 인준과 내기의 결과를 따질 때, 말하면 꽤 멋질 것 같다.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놈이 물어뜯어서 이두박근 쪽이 심하게 패였다.
아머도 반은 부서졌고, 가진 노블 에너지도 적다.
그래도 이겼다.
“어흥!”
치용은 그 기쁨을 전신으로 표현했다.
그 사이 바이탄 십여 기가 치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아무리 지쳤어도, 잔챙이에게 당할 정도로 지친 건 아니다.
치용은 제자리에서 몸을 360도 회전하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크게 베기.’
이름 짓는 재주는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부를 뿐.
후앙!
푸른 칼날이 공간을 휩쓴다.
퍼버버벙!
그저 한 번의 칼질에 다가오는 바이탄 무리가 허공에서 터졌다.
그 상태 그대로 치용은 발밑에 있는 함선을 박찼다.
쾅!
쏘아지는 인간 포탄이다.
아직도 적은 많았다.
어깨 끝에 에너지를 모아 원추 형태로 만든다.
콴의 전투 방법을 배워서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바로 그였다.
에너지를 이용해 전신을 무기로 만드는 기술은 치용의 마음에 쏙 들뿐 아니라, 활용도도 높았다.
“오라오라오라!”
어느 만화책의 대사를 흉내 내며 그는 칼날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쩍! 퍽! 쾅!
서슴없이 사방을 박살 낸다.
여긴 지구가 아니다.
아군의 함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족족 박살내면 그만이었다.
콰과광!
무섭게 휘몰아치는 치용을 막을 건 없었다.
그렇게 두 대의 함선과 수십의 바이탄을 작살 낸, 치용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지쳐서는 아니었다.
“커허허허헝!”
그는 위를 향해 울부짖었다.
이름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간을 가로지르는 쉽을 본 순간, 치용은 그곳에 막강한 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본래도 야생 짐승처럼 발달 된 감각이 노블 에너지를 활용한 뒤에는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외침과 함께 몸을 날리려는 순간, 비틀 쉽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은청색 빛이다.
파라락.
로브를 휘날리며 날아드는 놈이 보였다.
텅.
겨우 얼굴이 보일만큼의 거리, 함선 두 척 위에 선 둘이다.
“거, 새끼 폼 더럽게 잡네.”
치용이 중얼거렸다.
[인간은 품위가 없구나]
콴의 벤텀이었다.
그는 이 오만한 인간이 꽤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알아봤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는 게 정확하다.
“싸우고 싶냐?”
콴의 투쟁본능은 치용과 닮았다.
첫눈에 그는 괴상한 망토를 걸친 저놈이 자신과 싸우고 싶다는 걸, 았다.
[싸움이 아니라 처형이 되겠지]
재수 없는 새끼였다.
“내 앞에서 그렇게 입 놀린 새끼 중에 멀쩡하게 걸어서 나간 새끼가 없거든?”
[죽을 땐 죽더라도 품위를 지켜라]
같잖은 소리.
치용은 피식 웃었다.
아니, 우주에서 웃을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배웠었는데, 기억이 통 나질 않는다.
‘아.’
자신의 머리도 아직은 쓸 만했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니.
치용은 상대에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쫙하고 손을 펼쳤다.
그리고 쥐었다 폈다.
크게 비웃고 싶었다.
[후, 그냥 죽어라]
벤텀이 말하며 로브 안쪽에서 블레이드 그립을 꺼내 쥔다.
그 순간, 둘을 노리며 바이탄 몇 마리가 달려들었다.
파캉, 쩍! 쩍! 카가각.
둘의 손이 움직인 순간, 사방에 푸른빛이 번뜩였다.
벤텀은 은청색의 빛깔을 뿌렸고, 치용은 하늘빛을 뿌렸다.
둘에게 달려들던 바이탄이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내가 한 마리 많다. 바바리맨 새끼야.”
꽝!
말을 내뱉고 땅을 박찬 치용이 달려든다.
‘큰 칼.’
달려들며 그립을 쥔 손을 위에서 밑으로 내리친다.
후아아앙!
십 미터는 넘게 자라난 칼날이 함선을 반으로 쪼갰다.
그걸 피한 벤텀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쿠인님의 기술을 베꼈나?]
‘뭐?’
뭘 베껴?
“이 시키가.”
치용은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베끼는 건 안 한다.
그는 무식한 대신 우직했고, 정직했다.
벤텀은 치용을 상대하며 칼날을 두어 번 마주쳤다.
쩡쩡.
그리고 생각했다.
‘근력, 기술, 모두 뛰어난 편.’
벤텀의 목표는 가르간이다.
자연스럽게 그와 비교를 했다.
‘낙제다.’
콴의 전사 계급은 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삼류에서 이류, 이류에서 일류.
일류에서 진짜 전사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까지 벤텀은 지옥을 겪었다.
그는 딱 두 번 부딪치는 것만으로 눈앞의 인간을 판단했다.
[일류다]
딱 그 정도 수준이다.
“형은 원래 일류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떠드는 인간에게 줄 것은 하나뿐이었다.
씨이잉.
단숨에 속도를 높인다.
가르간과 싸우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로 훈련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속도다.
적어도 그의 칼날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본 직후 피할 정도의 속도가 필요하다.
벤텀은 가르간의 칼질을 흉내 냈 다.
고속이동 참격까지는 아니지만, 첫 일격만큼은 그에 준하는 속도다.
카가가각.
벤텀은 일격에서 이격으로 이격에서 삼격으로.
세 번을 베었다.
그의 예상으로는 적어도 팔 하나, 아니 목숨을 거둬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멀쩡했다.
이상한 표정을 짓고 마주 자신을 볼뿐이다.
벤텀은 평소에 인간에게 그리 관심이 없었다.
저 인간의 표정이 뭘 말하는 건지 몰랐다.
다만, 저 인간의 몸을 무언가 감싸고 있는 건 알았다.
‘여왕님의 호위와 비슷한 기술.’
몸에 에너지를 두르고 농도를 높여 갑옷처럼 활용하는 거다.
자신도 하려고 하면 하겠지만, 그리 쓸모 있는 기술은 아니다.
벤텀은 막고 버티는 건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좋다]
은청색 블레이드를 거둔, 그가 다른 그립을 꺼냈다.
검붉은 색의 짐승의 이빨을 닮은 모양의 그립이었다.
[타는 칼을 구경시켜 주마]
아마 인간으로서는 그가 최초일 것이다.
벤텀의 타는 칼을 보는 건.
[영광으로 알아라]
그가 그립을 쥐고 힘을 주입하려는 순간, 치용이 입을 연다.
“너 친구 없지?”
벤텀이 빤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뭐, 시불, 혼잣말을 미친 듯이 하고 지랄이야. 싸우러 왔으면 얌전히 칼이나 휘두를 것이지.”
벤텀은 단숨에 베어 죽이려다 계획을 수정했다.
[고통에 몸부림치게 해주마]
“중2병 걸린 애새끼도 아니고, 혼잣말은.”
죽이지 말자.
벤텀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포로로 데려가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너나 영광으로 알아. 시파, 아직 미완성인데.”
그런 그의 귀로 치용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동시에 자신이 상대하던 인간의 기세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