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 위기와 기회
세주는 프로비던스를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뜀박질도 제대로 못 하던 시절이다.
그때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더라?
최초 노블 에너지를 느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남과는 다른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웅.
전신에서 노블 패스가 느껴졌다.
동시에 도도하게 강처럼 에너지가 노블 패스를 타고 흘렀다.
폭음이 터지고 사방으로 모래 폭풍이 일어나는 순간, 얇은 배리어가 펼쳐졌다.
-이게 내 최선이야.
프로비던스의 재주다.
그의 배리어가 첫 번째 폭풍의 충격을 막아준다.
프로비던스가 만든 배리어는 얇았다.
이제까지의 전장이라면 그저 종잇장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폭발을 막아준 것도 고작 2초였다.
세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떴다.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구조가 보였다.
바이탄은 구조 자체가 에너지와 흡사하다.
그들이 만든 모든 건 에너지가 기반이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컨트롤 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다.
빙글.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우우웅!
프로비던스가 만든 배리어가 깨지고, 그 앞에 둥근 방패가 생겼다.
푸른 방패가 폭발의 충격을 완벽하게 막는다.
날자.
세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붕 하고 중력을 역전하는 감각이 들고, 세주는 하늘을 날았다.
아니, 치솟았다.
이 세계에서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 따위는 무시했다.
막히지 않아.
어떤 것도 자신을 막을 순 없다.
완벽한 자유를 느꼈다.
파라락.
생각하고 구현한다.
단순히 떠올리는 것만으로 등에 빛의 날개가 돋았다.
총탄을 쏠 필요도 없었다.
쩡!
하늘이 깨진다.
부스스스.
건물이 붕괴하듯 사방이 무너진다.
-보이지?
프로비던스의 목소리에 세주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입방체 하나가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그 안에 담긴 여덟 개의 얇은 기판도 보였다.
에잇의 본체다.
세주는 손을 흔들었다.
공중에서 푸른 칼날이 솟아 놈의 몸을 갈랐다.
파각.
파사사사삭.
반으로 쪼개진 에잇의 기판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턱.
바닥에 내려선 세주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 떠다니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건 공기고, 어깨에 앉는 작은 새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좀 더.
세주는 이곳에 있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다.
프로비던스는 세주의 반응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주인이라는 인간이 지금 하는 짓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신기다.
세주의 전신에 빛이 머물고, 반짝인다.
쩍.
그 순간, 푸른빛이 에잇이 만든 가상의 세계를 쪼갰다.
“…방해야.”
불쾌했다.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연 세주다.
프로비던스의 렌즈가 바깥을 향했다.
지지지징.
동시에 둘의 몸이 흐릿해진다.
-바깥에서 누가 에잇을 죽였어.
치용일까?
“어쩔 수 없지.”
기이한 감각이 아직도 전신에 남아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마치 처음 여자와 밤을 보낼 때만큼이나 흥분됐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햇볕을 느끼며 자는 것과도 같았다.
세주는 눈을 감았다.
테크룸과 비슷하다면 탈출하는 것도 비슷하리라.
다시 눈을 뜬 순간이다.
“진짜 잔 건 아니죠?”
유진이 대뜸 묻는다.
“상황 파악부터 하자.”
두두둥! 콰과광!
주변은 아직도 시끄러웠다.
폭음이 들렸고, 치용은 보이지 않았다.
유진과 인준, 그리고 몸이 팅팅 부은 팽이 보였다.
세주는 서슴없이 팽의 몸에 손을 댔다.
‘치료해.’
-12초 소요.
프로비던스가 광선을 쏘아내자, 곧 팽의 얼굴에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네요.”
유진이 그걸 보고 중얼거린다.
“그것보다, 앞쪽.”
인준의 말에 세주가 앞을 바라봤다.
“저 자식은 왜 여기 있냐?”
가르간이다.
흰색 바탕에 금색으로 치장된 로브를 입은 이가 둘이다.
하나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콴의 얼굴을 본다고 구별 할 수도 없다.
비틀 쉽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가르간의 시선이 세주에게 향했다.
“안녕?”
인사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흩어진 잔해와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본 순간 대강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쟤네. 쟤가 에잇 죽였나 본데.
[바이탄과 콴은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 바로 옆 함대에서 거친 음성이 터졌다.
가르간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칼을 들지 않은 손을 쥐었다 폈다.
눈은 세주에게 향한 채로 그가 입을 열었다.
[쿠인]
바로 옆에 동일한 복장을 한 콴이다.
체구는 가르간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가 움직인 순간 작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찌잉!
쿠인의 손이 움직인 순간, 허공에 커다란 청아한 푸른빛이 터졌다.
우주 한복판에서 보이는 단두대였다.
실제로 길로틴이라 부르는 쿠인의 기술이었다.
바이탄의 함선 네 대가 단두대에 걸렸다.
콰가가각! 퍼버버벙!
“인사치고는 거칠어.”
세주가 입을 열고 몸을 쏙 뺐다.
그러니까 장난이 아니다.
우주에서 온 이후로 여러 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지금이 최고가 아닐까.
상대는 콴의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제너럴이다.
[오랜만이다]
“가르간 맞지?”
저 기질과 힘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쿠인은 바이탄의 함선 두 대를 더 박살내고 가르간의 옆에 섰다.
[저거?]
손가락을 쭉 뻗어서 세주를 가리킨다.
“저 버릇없는 새끼가, 어디서 웃어른께 손가락질이야?”
세주가 말하자, 그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갔다.
[내가 죽여도?]
세주에게 묻는 건 아니었다.
가르간이 칼날을 거두고 양손을 쥐었다 폈다.
흥분한 가르간은 자기도 모르게 에너지를 운용했다.
그의 주먹 주변으로 은은한 푸른빛이 어렸다.
[절대 안 돼]
자신의 먹이다.
키워서 먹기 위해 죽이지 않고 살려둔, 아주 값비싼 과일이다.
저놈에게 콴과 메카니모스 행성 기지 두 개가 아작났고.
바이탄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에잇은 자신의 손으로 베었지만, 그 외에는 넘버링을 받은 바이탄이 없다는 건.
‘이놈이 죽였다는 거겠지?’
인간 중에서 으뜸이다.
싸울 가치가 있을 거다.
얼마나 컸을지.
생식기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나머지는 내가 죽여도?]
쿠인이 묻는다.
[마음대로 해]
가르간은 저 자식 외에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일대일로 붙고 싶은 것도 아니다.
가르간의 안에 잠든 야수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전투에 미친 콴은 주변 모든 것을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광전사였다.
세주가 입가를 비틀며 올라섰다.
그때였다.
“제가 먼저 하게 해주십시오! 소장님!”
쿠우우!
우지지직!
저 밑, 바이탄의 병력을 헤치며 한 기의 사이클롭스가 올라온다.
양손에 에너지 블레이드를 쥐고, 외눈의 병기에 탄 남자다.
세주는 한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고, 누군지도 알았다.
-천둥벌거숭이네.
‘나기주?’
그의 사이클롭스가 세주의 곁에 선다.
“부탁드립니다. 저 씹센티 새끼들을 죽이게 해주십시오.”
나기주의 목소리에 살의가 깃든다.
현재 전장에서 그의 역할은 하나였다.
세주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그 역할을 위해서 버틴 나기주는 죽음을 각오했다.
콴의 강력한 세 괴물이 나올 때까지 나기주는 기도했다.
내 목숨이 인류에게 가치가 있기를.
목숨을 버려서라도 셋 중 둘은 죽인다.
필살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콴의 세 괴물은 그를 무시하고 떠났다.
“기주!”
장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기주는 몸을 비틀어 주변 적을 쳐 죽였다.
그의 사이클롭스의 별칭은 언브레이커.
가장 강력한 내구도를 가진 철벽의 사이클롭스다.
“정신 차려!”
장왕이 외쳤다.
기주는 장왕의 곁에 붙어 물었다.
“저 셋, 어디로 가는 거지?”
장왕은 그들이 가는 경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놈은 제주도에 찾아왔던 놈이다.
그 기질은 본다고 잊힐 만한 게 아니다.
“후방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셋이 빠진다면 승산이 높아질 거다.
장왕은 판단을 내렸다.
더구나 나기주의 전투력이라면.
“…왜?”
나기주가 되묻는다.
장왕은 그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왜긴]
순간 둘의 앞으로 흰 바탕에 금색 수가 박힌 로브가 보였다.
또 다른 적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가르간은 자신의 적수를 찾으러 떠나셨다]
“넌 뭔데?”
나기주가 물었다.
[가르간의 부관, 맥토다]
“쳇.”
장왕이 자세를 바로 잡는다.
나기주는 생각했다.
죽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 온 건 아니다.
세주에게 나가떨어진 이후로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감도 버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건 뭘까?
살면서 이렇게 무시를 받았던 적이 있던가?
가르간이라 불린 적은 자신이 눈에 차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
그건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온 전사의 자존심을 찢어발기는 짓이었다.
나기주는 살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며 비참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세주 일행은 고작 여섯이서 바이탄의 병력을 맞으러 갔다.
“5분 이내에 처리하고, 난 후방 지원 간다.”
나기주가 말하고 전투 자세를 취한다.
[그 5분 내의 처리가 날 말하는 건가?]
맥토가 물었다.
나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외계 괴물 새끼들은 언제나 재수가 없다.
여기저기 긁히고 터진 언브레이커의 전신에 에너지가 깃든다.
“제가 합니다!”
말릴 틈도 없었다.
나기주의 사이클롭스가 발진했다.
콰우우우!
‘많이 늘었네.’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
멋지게 날아가며 양손에 칼을 뽑아 휘두른다.
가르간은 그걸 보고 짜증이 솟았다. 단숨에 그를 가르려는 순간, 세주 쪽을 본 가르간은 칼날을 넓게 만들어 펼쳤다.
쾅!
어느새 날아온 애비탄 한 방이다.
“어이어이, 인사는 나랑 하고 누구랑 싸우려고?”
세주의 목소리에 가르간은 짜증이 가셨다.
역시나 찢고, 베고 싶은 욕구를 만드는 녀석이다.
나기주는 그 사이 쿠인을 노리고 날았다.
양손에 든 칼을 휘두른다.
짙은 푸른빛을 머금은 에너지 블레이드가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 위를 유영하며 쿠인은 몸을 뒤집었다.
놀라울 정도로 유연했고, 날쌨다.
쩡!
그의 칼날이 나기주의 등을 노렸다.
기주는 등에 힘을 모아 버텼다.
유진과 인준도 그 싸움을 지켜봤다.
둘도 아머를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빨랐다.
허공에 보랏빛 그을음 같은 것이 생겼다.
유진은 스텔스 기능을 켰다.
구해.
인준과 유진의 통신에 동시에 들린 목소리다.
반세주였다.
인준은 로켓을, 유진은 기관단총을 들었다.
쾅!
폭음이 들렸다.
“빌어먹을 자식!”
나기주의 외침이다.
그의 사이클롭스 등 부분에서 둥근 푸른 알이 솟았다.
펑!
근접전으로 유인해 등 쪽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는 수단이었다.
모르는 적이라면 당할 수밖에 없는 일격이다.
쿠인 또한 피할 수 없다.
보랏빛 선이 순간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허공에 점액질 피부를 가진 괴물이 보였다.
로브가 찢긴 쿠인은 두꺼운 세 손가락으로 블레이드 그립을 쥐고 밑을 내려다봤다.
[곱게는 안 죽이겠다]
반쯤 타 찢긴 흰 로브를 손으로 잡아 뜯어서 버린 쿠인이 말했다.
그의 몸에는 엑스 반도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반도에는 빽빽하게 블레이드 그립이 가득했다.
부우웅!
그 사이 팽이 비틀 쉽을 몰았다.
“잡아!”
인준이 외쳤다.
유진이 모습을 숨긴 채, 쿠인의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쿠인은 보지도 않고 칼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놀라운 반응속도와 끔찍한 힘이다.
가까스로 피한 유진의 가슴에 긴 상처가 생겼다.
아머가 버티지 못한다.
쿠인의 손에 들린 칼날에 은청색 빛이 머무른다.
유진은 몸을 비틀어 피하며 쉽 위로 내렸다.
쿠인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대신 몸을 비틀었다.
콰우우!
그의 바로 옆, 애비탄이 지나간다.
끼이이이잉!
그리고 진청의 그림자가 비틀 쉽 앞을 막는다.
맞은편, 가르간과 쿠인이 섰다.
“후아. 나기주 안 죽었냐?”
“…네.”
단 일격, 나기주는 적과 자신의 격차를 느꼈다.
죽지 않았다.
세주는 그걸로 만족했다.
“누가 명령도 없이 튀어 나가래?”
“죄송합니다.”
[싸우자. 인간]
가르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주는 가르간과 쿠인을 바라봤다.
‘수지타산이 안 맞아.’
-그래도 할 거잖아.
‘응.’
세주가 비틀 쉽을 뒤로 밀었다.
“물러나라.”
“형님!”
유진이 뒤에서 외친다.
적의 끔찍한 힘을 겪은 유진이다.
쿨럭하며 기침을 뱉었다.
세주가 전해 준 오버 페이스 모드 속도로도 잡을 수 없다.
그만큼 빠르고 강하다.
과연 일인 군단이란 말이 어울릴 괴물들이다.
“좋은 기회네.”
세주가 중얼거렸다.
“니들 콴 중에서도 꽤 유명한 놈이겠지? 강하고?”
[물론]
[무슨 뜻이냐?]
쿠인의 눈은 세주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둘 다 오늘 여기서 죽이겠다는 소리다.”
세주가 말하며 눈을 빛냈다.
동시에 둘을 잡을 기회다.
감당할 수 없다면 위기이나, 감당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찬스가 없지.’
-간다.
두둥.
동시에 프로비던스의 몸이 허공에 흩어진다.
그리고 세주의 전신에 붙는다.
‘모드 온 흉몽.’
둘 다 죽일 자신이 있었다.
처음 가르간을 만났을 때와 지금의 세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