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 인스톨
-훌륭해.
새로운 적이 출현하기 직전이다.
칭찬에 박한 프로비던스가 나호필의 전략을 인정했다.
‘나도 놀랐다.’
함선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곳곳에서 푸른 배리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반칙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반칙은 가장 훌륭한 전술이기도 했다.
개인의 판단에 의지한 초 근접전이다.
서로 창을 들고 싸우는 와중에 겨우 손바닥 한 뼘 범위로 들어와 펼치는 초 근접전이다.
창은 쓸 수 없다.
창 대신, 주먹과 발, 팔꿈치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인류의 주먹을 단단하게 만든 후 먹인 치명타였다.
-그래도 오십 대 오십이야.
프로비던스가 계산한 승패 확률이다.
적군에게 치명타를 가하고 물러날 확률이 50.
그 반대, 인류가 치명타를 입고 전멸할 확률이 50이다.
반반이라고 했지만, 승리와 패배의 조건이 다르다.
더구나, 적이 희생을 감수하고 인류와 싸운다면 인류는 필패한다.
지구에 남은 초인과 함선을 싹싹 긁어모아서 왔다.
이게 인류에게 남은 전부였다.
하지만 적들은 아니다.
오늘 이겨도, 또 비슷한 규모의 적이 나타날 거다.
-그 개구리를 닮은 새끼 중에서 살벌한 에너지를 품은 놈들이나, 저 반편이 실험쟁이들의 주요 인사가 나타나면 50대 50도 과해.
‘알지.’
인간으로 치자면 초인, 개인으로서 부대의 화력을 보여주는 괴물들.
세주도 그들을 기다렸다.
놈들을 잡아먹고, 역으로 적의 심장부로 향한다.
짧은 시간 세주의 머릿속에 한 장의 청사진이 떠올랐다.
*
나호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세주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새로운 적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적의 출현은.
“미확인 함선 발견!”
이 한 마디와 아군의 통신, 나호필은 진퇴양난임을 느꼈다.
“여기서 다 죽을 생각 아니잖아?”
뒤에서 다시 세주가 입을 연다.
“말해.”
“미친 소리 하지 마.”
나호필은 홀로그램에서 보이지 않도록 몸을 반쯤 틀어서 말했다.
미친 소리다.
아니, 보통의 미친 소리도 아니었다.
후방 쪽에 나타난 적 함선은 250척.
지금 이들이 막는 숫자보다 많다.
더구나 세 종족 중 전력으로는 최강이라는 바이탄.
‘잠이 부족해.’
침대와 포근한 이불에 쏙 들어가고 싶다.
현실도피다.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정신 차리자.’
나호필은 위기감으로 심장이 옥죄는 걸 느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이 자리의 사령관이자 인류의 보루다.
‘현재 전투를 빨리 끝내고 뒤를 친다?’
될까 싶다.
주륵.
언제부턴지 땀에 흠뻑 젖었다.
이마의 땀이 눈꺼풀을 지나서 흘렀다.
슥 하고 닦은 나호필은 반세주를 돌아봤다.
“자살 행위야.”
“해보지 않고는 모르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는 세주를 보고 나호필은 선택해야 했다.
인류냐, 아니면 그들을 구한 영웅이냐.
“사령관!”
홀로그램에 누군가 얼굴을 들이민다.
“차라리 후퇴합시다! 전열을 재정비하면 됩니다.”
후퇴는 패배다.
나호필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병력인 그들.
지는 순간, 이 싸움은 끝이다.
한 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라지만, 애초에 출전했을 때부터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호필은 여기에 있는 아군 전부를 죽일 셈이었다.
전부 죽더라도, 적만 궤멸시킬 수 있으면 된다.
투철하게 인류를 사랑해서 하는 건 아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한다.
의무감과 책임감이 복합적으로 나호필을 괴롭혔기에 여기에 서 있었다.
“멍청한 고민은 집어치워.”
세주의 말이다.
그러고 싶다.
나호필도 진심으로 그렇게 모든 걱정을 내려두고 싶다.
“그냥 시켜!”
결국, 세주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세주의 눈을 보며 나호필은 문득 궁금했다.
이자는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는 가?
자신에게 있는 게 의무감이라면.
반세주란 이 남자는 대체 뭘 위해 싸우지?
“숨겨둔 수가 있습니다.”
나호필이 홀로그램의 지휘관을 향해 말했다.
“후방은 걱정 말고, 전투에 집중하십시오.”
“무슨 생각입니까?”
“반세주 휘하 수호신 부대가 후방을 맡을 겁니다.”
“…겨우 넷이서?”
위이잉.
타이밍 좋게 작전실로 세주 부대원이 들어왔다.
“우린 언제 싸웁니까? 형님.”
치용이 성큼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연다.
홀로그램과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실버는 이미 레이더 시스템으로 적을 파악했는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를 포함해서, 여섯이야. 누가 넷 이래?”
세주가 말했다.
“이 여섯이 막습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혼자서 일군을 막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라는 건 압니까?”
“말 졸라 많네. 내가 한다면 해. 꼬우면 니들이 하던가.”
세주가 꽥 하고 외치자, 좌중이 침묵에 휩싸인다.
꽝!
타이밍 좋게 후방 배리어에 적의 포격이 날아왔다.
“적습입니다!”
“이들이 막을 거요.”
나호필이 다시 말했다.
“그럼 사령관 명을 받들어, 후방 적진으로 향한다.”
세주가 뒤를 돌아봤다.
치용은 흥분한 듯 콧김을 뿜었고, 인준과 유진은 태연했다.
백전노장이란 말이 아쉽지 않은 이들이다.
노장치고는 상당히 젊지만, 그 누구보다 험한 전장을 겪어왔다.
“가자!”
세주가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섯이 곧 지휘부를 빠져나갔다.
불현듯, 세주의 등을 바라보던 나호필이 입을 열었다.
지금 물을 말은 아니지만, 듣고 싶었다.
일군을 막으러 떠나는 그들이다.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왜 싸우지?”
나호필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고, 마치 내일 아침 날씨를 물어보는 듯 평온했다.
많은 것이 함축된 짧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세주는 그 질문에 답을 고민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인간을 위해.
프로비던스라는 행운을 가진 자의 의무로.
아니, 솔직해지자.
전부 아니잖아.
세주는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저 새끼들 졸라 재수 없잖아.”
그게 정답이었다.
아니 꼽고, 재수 없다.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 생판 난리다.
세주는 외계에서 침공해 온 개자식들에게 유감이 많았다.
*
-미친 짓인 건 알지?
‘뭐가?’
-여섯 명이 바이탄 여섯 부대를 막겠다고?
‘응.’
-하, 이 형이 진짜. 하지 마!
‘왜?’
-자살 행위니까.
‘진짜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프로비던스는 순간 말을 잇지 않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해도, 프로비던스는 어떤 질문에도 말문이 막히지 않는 초유의 인공지능이었다.
-아니, 꼭 죽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야.
진지해진 프로비던스의 목소리를 들은 세주가 소리 내어 쿡쿡 웃었다.
[재밌어? 대장?]
언제나 옆에 찰싹 달라붙은 팽이 묻는다.
“재밌다.”
세주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합리적인 방법은 이대로 비틀 쉽을 타고 적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거야. 놈들이 지구를 습격했듯, 우리도 적의 거점을 부수는 거지.
‘꼬시지 마.’
-적당히 넘어와. 우리 쉽게 가자.
‘싫어. 게임은 어려운 편이 좋고, 여자는 튕길수록 매력이 있는 법이다.’
-아, 그럼 꼴리시는대로 하시던가.
1년 동안 놀지만은 않았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도 죽지 않고 이길 거다.
세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1년을 그곳에서 버텼다.
물론, 세주만 그런 건 아니었다.
치용, 인준, 유진.
셋은 바이탄에서 입은 상처를 잊지 않았다.
치용이 이를 뿌드득 소리 나게 갈았다.
“다 죽여주어흥!”
인준이 그걸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는 이제 우리에 가둬야 하는 거 아냐?”
제대로 말도 끝마치지 않고, 울부짖는 짐승이다.
“개성이에요. 개성.”
은회색 금속으로 만든 짧은 군용 대검 두 자루를 손으로 돌리며 유진이 말했다.
“이게 개성이냐?”
“커헝!”
“아, 시끄러워.”
인준의 말에 치용이 그의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지른다.
그걸 들은 세주가 한 마디 나무랐다.
그렇다고 조용히 할 그들은 아니었다.
“…그냥 놔둬요. 치용이 형이잖아요.”
그럴듯한 말이다.
김치용이다.
“어흐흐흥!”
저럴 수도 있다.
아니, 저게 정상이다.
[복수의 시간입니까?]
바이탄을 죽이는 거에 인생의 목적을 담은 기계가 읊조렸다.
[난 실버, 적을 죽이는 킬러, 바이탄은 내 인생의 숙적]
“…얘는 왜 이래?”
-미안.
프로비던스가 툭 하니 말했다.
-내가 좀 답답해서 똑똑해지라고 프로그램 하나 건드렸는데, 애가 좀 이상하네.
‘뭘 넣었는데?’
-인간의 문화를 배우기 좋은 건, 역시 인터넷이니까.
“에이 씨.”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욕이 나온다.
그놈의 인터넷 때문에 애들 말투가 적응이 안 된다.
“명존세 하고 싶네.”
세주가 중얼거렸다.
“누굴요?”
유진이 말한다.
“아냐.”
[복수는 나의 것, 컴온 바이탄. 지금부터 실버 님의 원맨 쇼를 보여주지]
중2병에 걸린 실버를 보며 세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슥.
옆에서 누군가 이마를 짚는다.
팽이다.
[어디 아파? 대장?]
아니, 안 아파. 너만 보면 식겁해서 수명이 줄뿐이지.
절세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미녀인 팽의 스킨쉽은 부담스럽다.
“선두는….”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당연히!”
[내 칼이 피를 부르는군요]
치용과 실버가 일어난다.
둘이 눈을 마주쳤다.
눈싸움은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렌즈는 은은한 빛을 낼뿐이었다.
“고철, 바사버린다?”
돌격은 언제나 치용의 몫이다.
-먼저 죽여 달라고 고사를 지내라. 이 미친 개또라이들아.
프로비던스의 말을 양념 삼아 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가 먼저.”
“아, 왜! 또!”
-저거, 저거, 기어오르는 거 봐? 죽여 버려. 형.
‘닥치고 있어.’
기왕 싸우기로 한 거라면, 밝고 깨끗하고 자신 있게 싸우는 거다.
아무리 1년의 훈련이 있다고 해도, 치용, 인준, 유진은 인간이다.
더구나 저들은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대로 전장에 나가면 죽는다.
세주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팽.”
[응]
“사이킥 에너지 개방해서 백업.”
쉬이이잉!
비틀 쉽이 미끄러지듯 공간을 유영한다.
그 밑, 적선이 보였다.
“실버, 대기.”
세주는 시간을 체크했다.
-250척 함선, 주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은 50척. 나머지는 어중이떠중이야.
‘숫자 달린 놈들은?’
바이탄에서 죽인 건 일레븐에서 써틴, 셋뿐이다.
-셋 이상. 정확한 파악은 어려워. 재밍이야.
“나란히 서.”
세주는 치용과 인준, 유진을 앞으로 세웠다.
팽은 보조면 충분하다.
그녀는 다양한 방식의 전투를 소화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방식과 전투 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이 셋은 아니다.
-추정 바이탄 2500기.
‘염병, 많이도 왔다.’
1척당 100기.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 사람당 50척씩 부수면 된다.
“뭐 하는 건데?”
인준이 물었다.
“대기.”
두둥!
밑에서 비틀 쉽 위로 일형포가 박힌다.
배리어로 비껴 막은 비틀 쉽이 위로 떠 올랐다.
일자에 좁은 대형이다.
기동성에 무게를 둔 형태.
적의 함선이 위치한 자리를 본 세주는 전투 형태를 결정했다.
“굴 지키는 병정개미.”
만약 다른 이들이었다면 세주의 명령에 놀랐을 거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세주는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다.
적어도 전투에서만은, 그는 신이다.
‘모드 온 인스톨.’
새롭게 연 모드 중 하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모드지만, 세주는 꽤 마음에 들었다.
아무에게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기적인 효과밖에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게 어딘가?
“인스톨 한다.”
왼손은 치용의 머리에, 오른손은 인준의 머리다.
“뭘 한다고?”
“놀라지 말고.”
치용은 돌격 병, 붙어 싸운다.
모드 인파이터 인스톨.
인준은 그 반대다.
거칠지만 거리를 두고, 폭격을 가하는 인간 폭격기.
그 화력을 더해줄 것이 필요하다.
모드 봄버맨 인스톨.
마지막 유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유진의 아머는 적에게 모습을 숨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속도다.
‘인스톨 오버 페이스.’
순간, 세주의 테크룸에 모드 세 개가 복사돼서 아군에게 전송됐다.
-이런 식이면, 진다고 말할 순 없지.
칼큐레이팅 모드를 돌린 프로비던스가 말했다.
세주는 그런 프로비던스에게 말했다.
‘난 지는 싸움은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