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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병사 반세주-142화 (142/206)

#  142

142. 최초의 기억

써틴을 죽이고 수급한 에너지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만약, 세주가 멀쩡한 상태에서 그 에너지를 보유했다면 쓸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3개월 동안 프로비던스는 그 에너지를 몽땅 썼다.

실버 혼자만의 힘으로 이들을 숨긴 건 아니었다.

프로비던스는 세주가 정신을 잃은 동안, 자체 방어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부대원을 숨겼고, 보호했다.

에너지 소모를 아끼지 않았다.

세주가 죽지 않도록 영양분을 공급해야 했고, 오버 클럭 모드도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다.

프로비던로선, 최대한 에너지를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썼지만.

남은 에너지는 얼마 없었다.

세주는 그 설명을 듣고 칭찬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에너지보다, 사람 생명이 귀중하다는 건 프로비던스 입장에서 보면 장족의 발전을 보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넌 참 쓸 만해?’

-내 존재 가치를 고작 쓸 만하다고 말할래?

‘그래. 잘나서 좋겠다.’

-물론이지.

세주는 은신처 바깥에서 만나 놈들을 떠올렸다.

3개월 전 죽인 놈과 비견되는 괴물 안드로이드다.

프로비던스가 홀로그램으로 적의 모습을 띄우며 말했다.

-순수 에너지 2700만.

놈이 비축한 에너지다.

한 놈에 2700만, 어마어마한 수치다.

‘맛난 숫자네.’

-그러게.

문제는 지금 당장 처리할 수 없다는 것.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안 그래도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

그 사이 지구가 망하지만 않는다면.

여기 오기 전 벌여둔 일들이 그 방파제가 될 거다.

가능하다면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다.

“후.”

-왜 참으려니 좀이 쑤셔?

‘응.’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지했다.

“일하자. 일.”

[또 나갑니까?]

렌즈 불빛을 깜빡거리며 실버가 묻는다.

이 불쌍한 자식.

조금만 기다려라. 못된 프로비던스를 닦달해서 멀쩡한 몸을 만들어줄 테니.

“응. 갔다 온다.”

벌써 2개월.

60일을 꽉 채우며 세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하는 일이 뭔지는 몰랐다.

*

‘뭘 할까?’

세주는 요구했다.

개인 기량을 올리라고.

치용의 시뮬레이션 모드는 단순했다.

탁 트인 벌판,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치용 혼자뿐이다.

마음껏 뛸 수 있는 공간을 요구했다.

덕분에 이 무딘 치용도 외로움을 느낄 정도로 싸늘한 바람만 부는 공간에 덩그러니 남았다.

‘뭐 하지?’

차라리 적을 만나 싸우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이건 영 할 일이 없다.

“잘 안 돼?”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주였다.

“심심합니다.”

“심심해?”

세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치용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기 생각에 불쌍한 표정이지, 남이 볼 때는 돈 떼먹은 놈 잡으러 가는 표정이다.

치용의 얼굴은 뭘 해도 협박이고, 위협이다.

“인간이 상대라면 넌 얼굴이 무기일 텐데.”

“칭찬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에헴.”

좋아하는 치용을 보고 세주는 피식 웃었다.

단순 무식한 치용이기에 밉지 않다.

“심심하면 적이랑 싸우는 시뮬레이션 모드라도 할래?”

“그게 100백는 낫습니다.”

“그러자. 그럼.”

딱.

세주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준비한 거 보내.”

그러며 말했다.

드드드드드드.

동시에 땅이 떨리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

치용이 눈을 깜빡이며 한 곳을 주시했다.

먼지구름이 보였다.

자욱한 구름 사이로, 한낮의 태양이 스며든다.

애초에 이곳은 시뮬레이션 공간, 치용은 밤보다 낮이 좋았다.

“밤이 낮겠다.”

하지만 세주의 한 마디로 주변 풍광이 확 변한다.

햇빛이 사라지기 직전, 치용은 봤다.

“크흐흐.”

그리고 웃었다.

먼지구름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구름 뒤로 까만 개미 떼처럼 적이 몰려온다.

“여기서 다쳐도 아프고, 죽어도 아프다. 실제로 죽지 않는다고 해도 고통은 변함없을 거다.”

세주는 말 하고 옆에 쭈그려 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리고 몰려오는 미지의 적들.

누군가에게는 공포와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치용에게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낫습니다요!”

외치며 치용이 앞으로 뛰어나간다.

불굴, 그게 치용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세주는 멀어지는 치용에게 외쳤다.

“네 최대 장점은 난전이다.”

“어흥!”

여전한 기합이다.

세주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부대원 셋의 장점은 명확하다.

치용은 근접 난전 특화다.

세주는 인준을 찾았다.

그는 시뮬레이션 모드에 나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달랑 하나 띄워진 광원은 전부를 비출 수 없었다.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을 느끼진 않았다.

“무슨 생각해?”

“이것저것.”

욱하는 성질은 치용과 비슷하지만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이거다.

치용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속에 담은 걸 전부 털어내야 속이 시원한 타입이다.

하지만 인준은 그 반대.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혼자 고민하고 탐구하는 타입이다.

만일 세주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 끌려오지 않았다면 어디 연구원에서 밤새 연구나 하고 살았을 거다.

전직도 교수, 잘 어울리긴 했다.

“고민하지 마.”

세주가 그를 보고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고?”

“뻔하지.”

“뻔해?”

발끈한 인준을 보며 세주는 내심 즐거움을 느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놈이다.

“아, 내가 도움 될 수 있는 건가? 시뮬레이션 모드에 들어가도 난 더할 게 없는데? 어쩌지?”

뿌득.

인준이 입가를 비틀고 웃는다.

그러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소리도 들렸다.

화났구나.

그러니, 더 놀리고 싶다.

“틀려?”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형은 참 악취미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재수 없는 형님 새끼.”

욕을 하면서도 그 형님이란 두 글자는 꼭 넣는구나.

이런 성격이고, 이런 놈이다.

자신의 입으로 뱉은 건 지켜야 직성이 풀리며, 누구에게도 굽히는 걸 싫어한다.

“고민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전부 터트려.”

“무슨 소리야?”

“너한테 필요한 건 경험이다.”

세주는 땅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어디에 뭘 터트려야 효과적일까? 터지는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 화력을 집중해서 뚫어야 할 곳은 어딜까?”

말을 끝내고 인준을 바라봤다.

머리 좋은 놈이다.

대강 말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전부 터트리고 또 작살 내. 그 경험이 네 재산이다.”

인준의 가장 큰 장점은 꾸준함이다.

그 덕분에 백린탄을 바람에 섞어 쓰고, 광탄에 붙여서 적의 내부에 터트릴 수 있었다.

전투보다는 연구가 어울리는 남자.

하지만 폭탄마라고 불릴 정도의 경험만 있다면, 누구보다 화기를 잘 다루는 남자가 될 수 있었다.

“냉큼 들어가 시간 아깝다.”

“끄으으음.”

인준은 일어난 뒤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똥 마려운 강아지가 변을 참는 얼굴이다.

인상으로 치자면 치용 다음으로 살벌한 외모다.

“고맙다.”

그리고 휙 몸을 돌린다.

‘야,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싫지. 형 같으면 형 같은 사람한테 말하고 싶겠어?

‘나 같은 사람이 뭔데?’

-재수 없는 새끼.

‘미친 기계 새끼가.’

“형님?”

셋 중에 유일하게 손을 안 타는 녀석이다.

유진이 싱글벙글 웃는다.

어둡고 습한 지하 벙커에서 먹는 거라고는 컵라면과 오드꾸와 정도.

그런데도 저런 밝은 미소라니.

신이 유진에게 준 건, 가꾸지 않아도 빛나는 피부와 잘생긴 얼굴뿐만은 아닌가 보다.

막 시뮬레이션 모드를 끝내고 나온 유진은 땀에 젖은 옷을 벗었다.

“잘 돼 가냐?”

“어렵진 않네요.”

단서는 세주가 줬지만, 습득하고 응용하는 건 유진이 했다.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성격.

이것저것 다 할 줄 알며,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타입이다.

난전도, 화력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유연성이란 걸 기대할 수 있었다.

치용과 인준에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치료와 서포트, 전황 파악.

그는 전황을 지배할 수 있다.

즉, 지휘자로서의 역량이 다분했다.

그 덕분에 세주는 유진에게 필요한 걸 잘 알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기동성.

전투의 맥을 짚어서 전황을 바꾸게 한다.

그게 유진의 몫이었다.

치용은 일대 다수의 어둠 속의  난전.

인준은 아군을 등진 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을 향한 포격.

그리고 유진은 아군의 부대와 적군의 부대가 붙는 난전을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로 이끄는 것.

이 세 가지가 세주가 그들에게 준 과제다.

그 외, 팽에게도 몇 가지를 가르쳤다.

셋은 그동안 과제를 충실히 이행했다.

이제 자신이 할 일만 남았다.

‘가자.’

그래서 오늘도 세주는 나갔다.

수없이 나가서 행성을 돌아다닌다.

실버는 말없이 렌즈의 빛으로 세주의 등을 쫓았다.

깜빡.

녹색 빛의 렌즈가 깜박인다.

이전 전투에서 대부분의 구세대 안드로이드들은 에너지 플랜트-심장을 잃었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몇몇은 이후에 온 바이탄의 공격에 절멸했고.

그 이후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지금은 벙커 한쪽 구석에서 고철이 됐다.

에너지 플랜트의 수명이 끝난 거다.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안드로이드에게 억지로 주입한 프로세스로 싸웠다.

당연한 결과였다.

적어도 실버는 이 상황을 예견했다.

녹색 빛이 깜빡인다.

세주가 나가고 돌아올 때까지, 실버는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눈을 뜨는 순간 보이는 건, 손바닥이다.

은빛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손바닥이다.

“일어났냐?”

그의 주인이었다.

그게 최초의 기억이었다.

그 이후 그의 주인은 실버에게 많은 걸 가르쳤다.

“그럴 땐 웃는 거라고, 실버.”

[그렇습니까?]

“이상해. 정말 이상해. 분명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 했는데.”

[하하하]

억지웃음을 보이자, 주인이 눈썹을 씰룩이며 인상을 쓴다.

“위로하냐?”

[네]

“거참.”

주인은 실버를 만들고 나서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외로울 거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곁에는 자신과 동일한 안드로이드 수십 대와 함께였다.

주인은 밤낮을 잊고, 실버와 같은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죽기 직전까지, 최초 실버의 주인은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신의 장난일까?”

그는 실버에게 넣은 ‘감정’이라는 프로그램을 결국 다른 안드로이드에게 넣지 못했다.

시도는 수없이 했고, 덕분에 수백 대의 안드로이드가 태어났다.

곧 실버의 동료는 주변 사람에게 팔렸다.

실버도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그래도 첫 주인이 소개해 준, 그 안드로이드들을 잊지는 않았다.

아니, 그 이후에 만난 안드로이드도 잊지 않았다.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자, 자식이었다.

최초의 안드로이드, 실버는 놀라운 메모리 용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만난 안드로이드 모두를 기억했다.

[제트]

부서진 잔해를 보고서 그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제트, 락, 펜슬, 그래스.

갖가지 이름으로 불린 안드로이드다.

이제는 그들을 더 볼 수 없었다.

바이탄으로 변한 차세대 안드로이드는 구세대 안드로이드를 멸살했다.

살아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깜빡.

렌즈의 빛이 서서히 옅어졌다.

실버가 가진 에너지 플랜트도 꺼져 간다.

아니, 진즉에 꺼져야 했다.

메모리 볼은 실버지만, 몸은 아니다.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으로 간신히 버텼지만 한계다.

‘새로운 몸을 준다고 했던가?’

반세주란 인간의 말이 떠올랐다.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너무 늦었다.

렌즈의 빛이 꺼져 간다.

실버는 메모리 볼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맑은 물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 잉크 한 방울은 실버에게 많은 걸 느끼게 했다.

‘살고 싶다.’

‘동료가 보고 싶다.’

‘…복수 하고 싶다.’

[복수]

두 글자를 뱉고, 인간으로 치자면 마지막 숨을 뱉으려는 순간이다.

한 움큼 남은 에너지가 메모리 볼을 거쳐 흩어진다.

“이야, 진짜 늦을 뻔했네. 브로, 너 좀 짱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세주가 들어온다.

그가 실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

실버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접수했다.”

철컥.

세주가 꺼낸 건, 칼날이다.

그는 그걸로 거침없이 실버의 몸을 갈랐다.

콰지직!

푸른빛을 뿜는 블레이드가 자신의 몸을 가르고, 퍼지던 검은 잉크가 그대로 맑은 물을 검게 물들게 한다.

“락 해제한다. 실버. 그리고 몸은 여기다.”

세주의 목소리가 들리고, 실버는 자신의 메모리 볼이 어딘가에 안착 되는 걸 알았다.

위이이잉.

눈을 떴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봤다.

최초의 기억과 똑같다.

눈을 뜨니, 손바닥이 보였다.

아니, 전과 같지는 않다.

실버는 부탁했었다.

만일, 자신의 몸을 만들 거라면 동료의 몸을 써달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래스, 제트, 락 외 수많은 동료의 몸이 합쳐진 거라고.

위이이이잉.

새롭게 만들어진 렌즈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온다.

그걸 보는 프로비던스는 말했다.

-슬픔, 눈물이 없는 놈이니, 저렇게밖에 안 되는 거야. 사람도 전부 다르듯, 실버는 그저 표현하는 게 서투른 안드로이드일 뿐이고.

죽기 직전, 그의 감정을 깨우자고 제안한 건 프로비던스였다.

만든 인간도 몰랐지만, 실버의 감정 제어장치는 완성품이 아니었다.

그는 배워야 했다.

이론으로 배웠던 것들이 체화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도 자라나며 배우듯.

실버는 그동안의 경험들을 깨달았고, 배웠다.

그는 감정을 지닌 안드로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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