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 에라이
실버의 도움이 컸다.
“깡통 덕입니다.”
치용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양질의 식사를 하고 몸을 회복한 치용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부 몸을 푼다.
“니들 뭐해?”
“나갈 거 아냐?”
인준이 되물었다.
나가긴 해야지.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전투에 대비하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모두가 쓰러지고 실버는 이들을 전부 지하 쉘터로 날랐다.
그리고 써틴에 버금가는 괴물 두 마리가 바이탄 행성에 왔으며.
-배리어로 행성 전체를 감쌌어. 얼마나 에너지가 남아돌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프로비던스가 탄식을 뱉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가서 다 때려 부수자고?”
“그럼요?”
유진까지도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전부 스탑.”
-냉정하게 가자고.
프로비던스가 말한다.
물론이다.
여기서 나가서 싸우자고 덤빌 순 없다.
-오버 클럭 모드는 봉인해야 해.
이미 깨어나자마자 그 위험도에 들었다.
오버 페이스모드, 신진대사를 가속.
그리고 오버 클럭은 뇌를 가속한다.
순간적으로 멈춘 세상에 오롯이 혼자만 걷고 뛸 수 있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신기다.
하지만 그 여파도 크다.
무려 3개월이다.
초인프로젝트를 겪으며, 인간의 육체적 한계 따위는 초월한 슈퍼 초 울트라 바디를 가진 세주지만, 3개월이나 쓰러졌다.
거기에 위에는 그 오버 클럭 모드로 죽인 놈과 비슷한 게 둘이나 더 있다.
아니, 그놈들을 떠나서 이전의 병력보다 양질의 기계병이 행성을 이 잡듯이 뒤진다고 했다.
“실버”
[네. 대장]
실버의 대답에 팽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장이란 호칭은 팽이 가르쳤구나.
“여기가 발각될 확률은?”
[12% 미만입니다]
기생하는 버릇없는 어떤 로봇과 다르게 공손하기도 하다.
-흥. 저런 고물이랑 날 비교할 생각은 아니겠지?
누가 고물인지.
‘여기 더 잘 숨길 방법은 없어?’
-뭐하게?
‘시키는 대로 일 잘하는 실버의 반만 좀 닮아보라. 사사건건 투덜투덜 대기는.’
-흥! 에너지나 제대로 주고 그렇게 주인 노릇 하시지 그래?
‘그 에너지 주려고 하는 짓이니까 일이나 좀 하시지.’
투덜거리던 프로비던스가 전신으로 빛을 뿜는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스캐닝하는 과정이다.
-몇 가지만 보완하면 되겠어.
자세한 건 묻지도 않았다.
듣는다고 이해할 수도 없고.
“여기 좀 넓히자.”
“네?”
유진이 눈을 깜빡거린다.
“위에 득실득실 하다며, 우린 여기서 농성하며 훈련한다.”
“…여기서?”
“뭐야? 안 싸우는 겁니까?”
인준이 고개를 갸웃하고, 치용은 실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생긴 건, 철 조각도 씹어 먹게 생겨서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보는 것 자체만으로 무섭다.
“실시.”
가타부타 설명은 귀찮다.
세주는 그들을 향해 벽을 무너뜨리고, 공간을 넓히라고 지시했다.
‘시뮬레이션 모드 실행할 에너지는 있냐?’
-현세 구현을 말하는 거라면 없어.
‘그럼 아르바이트 좀 해야겠네.’
“실버.”
[네. 대장]
“안내 좀 해라.”
“아, 진짜. 혼자만 재미 보러 갑니까?”
치용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재미는 무슨, 저 자식은 진짜 무슨 싸우기 위해 태어난 자식인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무슨 여자 만나러 놀러 나가는 줄 알겠다.
“얌전히 일이나 하고 있어.”
세주가 밖으로 나오자, 옆에서 끼익거리면서 실버가 따라온다.
-오늘 내일 하는구만.
‘기름칠이라도 해줘라.’
-남는 에너지가 없다고, 나 먹을 것도 없어! 없다고!
에너지가 부족하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미친 기계다.
“실버, 기계병 모인 곳으로 가보자.”
[네]
의문 한 점 없이 실버가 움직였다.
‘스캐닝 돌리고.’
주변 상황을 맵으로 띄웠다.
그런데 맵 위로 노이즈가 불협화음처럼 잔뜩 끼어서 보기가 어려웠다.
‘일 안 해?’
-곤란해. 여기 배리어를 씌우면서 재밍 신호가 가득 해.
‘오호, 불세출의 오버테크놀로지이자 인류의 희망께서 포기를 하신다?’
-걸려도 상관없으면 그냥 뚫어버리고.
‘놔둬. 그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보면 된다.
세주는 프로비던스의 눈이라는 스코프를 꺼냈다.
침묵을 꺼내서 스코프를 붙인 세주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총기를 들었다.
[뭐 하는 겁니까?]
실버는 인간을 돕기 위한 안드로이드, 그는 도움이 되기 위해 세주가 하는 일을 알 필요가 있었다.
“사냥.”
세주가 짧게 답했다.
실버는 세주가 한 말의 정의를 찾았다.
창, 활, 총, 덫 따위를 이용하여 야생의 새나 짐승을 잡는 일.
그런데 짐승은 보이지 않는다.
뭘 잡겠다는 건지, 실버는 다시 생각했다.
기계병.
그런데 사냥이라면 먹기 위해 잡는다.
반세주라는 인간은 쇳덩이도 씹어 삼키는 인간인 건가?
그가 깨어나기 전, 부대원들은 세주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다.
[그냥 대장이야]
[역시 대장이야]
[대장이지]
라고 표현해 실버의 이해 프로그램에 타격을 줬다.
곰 같은 덩치의 김치용이란 인간은 더 단순했다.
“잘 싸워. 내 형님이야. 나보다 세.”
그게 전부다.
그 외의 것을 물었더니, 오히려 치용이 되물었다.
“더 알아야 돼?”
실버는 김치용과 팽의 상태를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고 체크했다.
그는 인간을 돕기 위한 로봇, 언제나 주인의 건강을 체크하는 기능도 탑재했다.
다음은 언제나 인상을 쓰고 다니는 인간이었다.
“괴물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정상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실버는 자신이 알던 인간과 이곳에 모인 인간들은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유진을 찾았다.
그나마 자신이 아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간 인간이다.
“형님은 음. 사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반쯤 미쳤어.”
에라이.
실버는 부서지기 전, 주인의 입버릇을 속으로 따라 했다.
훙.
그 사이 세주가 방아쇠를 당겼다.
실버는 먼 곳에서 그의 광탄이 기계병 하나를 관통하는 걸 봤다.
‘미쳤구나.’
이제까지 그들이 들키지 않도록 기계병을 피했다.
그런데 대놓고 저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적의 기계병들이 몰려왔다.
[뭐 하는 겁니까?]
“사냥한다니까.”
주저하지 않는다.
세주는 보이는 족족 광탄에 스파이럴을 걸었다.
커브를 써서, 적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한참이나 싸운 뒤, 세주가 말했다.
“돌아가자.”
실버는 누구보다 치용의 평가가 정확하다는 걸 알았다.
이 인간의 전투력은 막강하다.
[옵니다]
실버는 자신의 레이더에 적이 포착된 걸 감지했다.
“알아.”
세주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리고 저 멀리, 기계병 틈으로 인간의 형태와 유사한 안드로이드 두 대가 보였다.
일레븐과 투엘븐, 바이탄이 보낸 전력이다.
“튀자.”
세주는 실버를 냅다 들더니 달렸다.
[잡힐 겁니다]
은빛 동체를 가진 두 기의 괴물이 달리기 시작하자 거리가 성큼 좁혀졌다.
“무지 빠르네. 저 자식들.”
달리면서 세주는 뒤를 힐끗 돌아봤다.
‘에너지는?’
-쫙쫙, 빨아 먹었어.
그의 목적은 적의 궤멸이 아니다.
세주는 어디까지나, 에너지 수급을 목표로 했다.
‘재밍 걸어.’
프로비던스가 신나게 적의 신호를 방해하고.
세주는 인벤토리에서 연막탄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뒤를 향해 던졌다.
펑! 펑!
자욱한 연기가 뒤를 가린다.
아니, 연기가 넓게 퍼져 눈앞도 가렸다.
세주는 눈을 감았다.
발을 내디디며, 지금까지 달려왔던 지형을 떠올렸다.
조금만 신경 쓴다면, 기억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의 기억력은 한 번 본 걸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
세주는 달리던 지형을 일부러 외웠다.
‘모드 온 오버페이스.’
오버페이스 모드를 켠 세주는 냅다 달렸다.
애초에 만나면 도망가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참이다.
달리던 세주가 실버에게 말했다.
“다른 쪽에 기계병 모인데 더 있지?”
[있습니다]
“거기로 가자.”
실버의 안내에 따라 세주가 다시 달린다.
그렇게 세 차례, 적을 각개 격파 한 세주다.
그리고 실버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인간은 미친 인간이라고.
*
다시 은신처로 돌아온 세주는 선언 했다.
“여기서 훈련할 거다.”
“지구에 연락도 못 하는데 괜찮을까요?”
“우리가 다 죽은 줄 알 텐데?”
“알아서 하라고 해.”
세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남는 거에 집중하라고.”
“지금 나가서 싸우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전멸할 확률 88%.
프로비던스는 적의 전력과 아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결론을 내렸다.
‘얌전히 당해줄 순 없지.’
-그래서 훈련한다고?
현재 힘이 부족하다면, 쌓아 올리면 그만이다.
세주는 오버클럭 모드를 가동하고 나서 알 수 있었다.
‘더 단련할 가능성이 있다.’
일당백, 아니 일당천의 부대원으로 만드는 거다.
‘에너지 수급한 거 풀자.’
벽을 뜯어서 넓힌 지하 공간에 부스스 흙이 떨어졌다.
그곳에 세주는 시뮬레이션 센터를 꺼냈다.
“오랜만에 보네요.”
유진이 그걸 보고 말했다.
이들은 이 구조물에 익숙했다.
“다들 들어가.”
세주는 그들을 들여보내고, 몸을 풀었다.
저들을 일당 천으로 만드는 게 끝이 아니니까.
하나 더, 세주는 바라는 게 있었다.
‘실버 저 자식 몸뚱이 하나 만들어주자.’
-아, 왜?
에너지를 쓰는 것에 예민한 프로비던스가 반항했다.
‘야, 나 없는 동안 애들 지켜줬다면서, 얘도 오늘부터 우리 부대로 편입한다.’
-…다른 인간들이 보면 난리 칠 텐데?
‘알 게 뭐야?’
프로비던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 제일 고집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필요 없는 일에 심력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의 뛰어난 연산 장치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고.
너무 뛰어나기에 감정을 갖게 된 프로비던스는 감정에 충실한 한 마디도 건넸다.
-쌩또라이.
‘시끄러워.’
-에너지가 얼마나 필요한지는 알아?
‘몰라.’
계산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으휴. 내가 아주 상전을 모시고 살지.
세주는 피식 웃었다.
그럼 자신이 상전이지. 뭐겠나.
세주는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필요한 것과 해야 할 것들.
갖춰야 할 것과 필요한 시간.
식료품은 충분하다.
항상 대비를 위해서 이것저것 음식은 인벤토리에 잔뜩 쌓아뒀다.
‘실버 몸과 기동 아머 만들어.’
-그 도안의 병기도 만들라고? 노동청에 신고하고 싶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야.
아주 지랄을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또 뭐?
‘초인프로젝트 한 번 더 열자.’
-저기요? 어디서 에너지 쌓아두셨어요?
‘쌓아뒀지.’
-어디? 나만 못 보나? 나만 장님인가?
‘위에 있잖아.’
세주는 웃고 장비를 점검했다.
점검할 것도 없다.
양손 등 위 빛나는 문신이 그의 무기다.
일명 반세주 스페셜이다.
실버를 두고 세주는 밖으로 나갔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인 기계병들이다.
찾으려 움직이지 않아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여기 안 걸리게 잘 숨겨.’
그 말과 함께 세주는 다시 기계병을 습격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레븐과 투엘븐이 보이면 피했고, 도망 다니며 습격을 계속했다.
인류 최강의 군인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렇게 보름.
세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너지 모였지?’
-그래. 실버 몸뚱이 만들 정도는 모였지. 질린다. 형도.
침식도 잊고 죽어라고 게릴라전으로 적의 병력만 깎아 먹었다.
세주는 그리 피로하지 않았다.
비무장지대에서 최소 수면시간만 갖고 저격하던 때랑 비교하자면 지금이 더 편하다.
그때보다 무기도, 전력도, 훨씬 탄탄하게 갖춰졌다.
-여기에 얼마나 있을 건데?
‘모든 준비를 다 할 때까지는 있을 거다.’
-최소 6개월이네.
‘알았으면 부지런히 움직여. 시간 아깝다.’
지구를 외면한 게 아니다.
세주는 깨달았을 뿐이다.
현재의 전력으로는 결국 질 거고, 언젠가 지구는 망한다.
그리고 인류는 절멸할 것이다.
강슬도 부모님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지구에 있다.
그들을 지키는 걸 넘어서 세주는, 누구에게도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발톱의 때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