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 받들어 모시지
“유진.”
세주가 입을 열자, 칼을 쥔 남자가 얼굴을 가린 아머를 벗는다.
“넵. 대령이요.”
젠의 목에 칼을 들이 댄 남자다.
얼굴이 희고 강단이 없어 보인다.
젠은 그를 보고 몸을 움직였다.
꿈틀하는 순간, 유진의 칼이 그의 피부 겉면을 벤다.
“명령을 받으면 네가 70대 노인이라도 벤다.”
그 강단 없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령에 우선하는 존재, 군인이다.
밑을 보자, 여전히 맨 몸뚱이로 당당하게 선, 남자가 보였다.
팽이 말한 대장이란 자다.
다른 이 모두 그의 부름을 기다린다.
‘나 하나 잡는다고 멈출 것 같은가?’
젠은 반란군에서 꽤 고위 계층이랄 수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젠을 버려서라도 저들을 죽일 거다.
더구나 EMP를 맞은 세주는 분명히 죽일 수 있다.
젠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상황은 반란군 쪽이 우위다.
그런 그를 향해 세주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총 넷이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라는 얼굴로 젠이 그를 바라봤다.
세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태양에 레이저 포를 겨누고 있을 거다.”
[어디라고?]
“검은 태양에 레이저 포를 겨누고 있다고 했다.”
자신만만한 미소다.
검은 태양?
그걸 어떻게 저 자식이 아는 걸까?
순간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외통수다.
그게 인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
반란군은 총 두 개의 기지를 갖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용궁.
젠이 수장으로 있는 이곳이다.
팽이 태어난 곳이며, 콴을 포함 메카니모스, 바이탄 어느 종도 위치를 알지 못하는 최후의 거점이다.
깊은 심해에 자리 잡은 이 기지는 강력한 동력원이 필요했다.
갖가지 시설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천문학적인 수치가 필요했다.
반란군에는 그런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두 개 있었다.
그 하나가 바로 검은 태양.
심해 기지 용궁의 핵심인 검은 공.
‘이거 정말 힘 빠지는데.’
-무중력상태랑 비슷한 거 같아.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전기와 비슷한 효과야. 노블 에너지를 예로 들자면 인간이라는 회로에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구조란 말이야. 아마 저 EMP 쇼크 탄 구조는 안에서 부딪쳐서 순간적으로 콤프턴 효과를 발휘하는 종류일 거라고. 당장은 막을 방법이 없지만, 연구할 가치가 있어. 형, 우리 저거 주어가자.
노블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아 몸도 고달픈데.
빌어먹을 프로비던스 새끼가 머리도 고달프게 한다.
듣기는 하지만 이해는 별도의 문제다.
눈을 반쯤 감은 세주는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다.
팽의 얼굴, 행동을 본 직후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
마치 이제는 보지 못할 사람처럼 헤어진 직후.
세주는 최악의 사태를 우려했다.
반란군은 아군이 아니다.
그런 전제하에 움직였다.
세주는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 부대원 셋에게 다른 지시를 내렸다.
치용에게는 싸움이 나면 따라오라고 하고.
유진에게는 인질을 잡으라 했다.
그리고 인준에게는 엔진을 부수라고 했다.
목적어도 없고, 은유도 없지만 그들은 적절하게 움직였다.
프로비던스가 기지를 조사하기도 전, 이곳을 보고 세주는 두 가지를 확신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분명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있을 거라는 것.
두 번째는 바다 밑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확보했는가다.
자신의 테크룸에도 있듯이 에너지 플랜트의 구조가 있을 거라는 건 금세 깨달았다.
위치와 형태를 모를 뿐.
어떤 것에 총구를 겨눠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프로비던스를 보냈고, 정보를 얻은 뒤 인준과 유진에게 홀로그램 문자를 보냈다.
프로비던스가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그들은 허공에 뜬 푸른 글자를 보고 움직였고.
결국 그 행동은 두 개의 인질에 칼과 총을 겨누게 한 일이었다.
세주가 취한 행동은 적절했고,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젠과 세주과 마주보는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젠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뭔가?]
*
팽이 그들을 살리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과 다른 형태의 인간.
그 두 가지 점에서 이중 한 명이 팽이 대장이라 부르는 남자라는 걸 알았다.
누군지 묻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혼자 명령하고 행동하는 남자.
그런 이에게 젠은 물었다.
아니, 시험이다.
팽의 목숨, 그건 젠에게도 소중하다.
하지만 검은 태양과 비교하자면, 젠의 목숨은 반딧불이다.
더구나 젠은 지구의 상황을 알았다.
가르간이 눈독 들이는 곳.
침공을 당한 인간들.
반란군이 되기 전, 자신도 겪었던 일들이다.
그렇다면 저 순간에 지구의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건?
도움이다.
스스로 힘으로 은하를 지배하는 세 종족과 싸우는 건 무리다.
그러니까 반세주, 팽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남자에게 묻는 거다.
지금 네놈이 원하는 게, 지구를 향한 도움의 손길이냐?
아니면 팽의 목숨이냐?
[둘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젠은 말 없는 세주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유진이 든 칼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젠은 목소리조차 떨리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태도가 아니었다.
[내 목숨을 뺏으면 너흰 다 죽는다]
그건 사실이다.
EMP를 맞고 기세를 일으키는 인간은 대단하다.
인정한다.
그는 무섭고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학무기를 튕겨내는 괴물은 아니다.
“무슨 헛소리야?”
세주가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못 알아들었을 리 없을 텐데?]
젠과 세주의 눈빛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친다.
[검은 태양을 대가로 줄 수 있는 건 하나다. 하나는 저 죄인을 살리는 것, 다른 하나는 동맹이다]
검은 태양에는 그 정도 가치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젠의 말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거다.
하지만 저 남자가 원한다면 젠은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생각이 있었다.
지구를 얕봤지만, 저 남자 만으로 그 저력을 인정했다.
지구는 동맹국으로서 가치가 있다.
딱 하나, 조건이 있을 뿐이다.
뱀의 젠, 냉혈인간이라 불리는 그가 가장 우선하는 가치는 희생이다.
팽을 희생하라.
아니, 팽 뿐 아니다.
검은 태양을 노린 그 부대원도 살릴 생각은 없다.
저 자가 동맹을 원하면 둘을 죽일 거다.
그게 조건이다.
만약 동맹이 아니라 팽의 목숨을 원하면 전원 사살이다.
둘을 희생에서 이 동맹을 성립할 것인가?
아니면?
젠과 눈을 마주친 세주가 싱긋 웃었다.
“팽을 살린다. 고작 동맹이랑 비교하다니, 팽은 미인이라고.”
[줄까? 대장?]
팽이 얼굴을 붉히며 뒤에서 말했다.
귀가 밝은 젠은 그게 들렸다.
한쪽으로는 힘이 빠지며, 분노가 치솟는 말이다.
가슴에 타오르던 불길은 꺼져 버렸다.
저 남자, 그릇이 너무 작다.
고작 부대원 하나를 살려?
자신이라면 둘을 희생해도 동맹을 이룬다.
그게 정답이다.
“그리고.”
방아쇠에 손을 올린 군인들에게 둘러 싸인 반세주다.
그가 이어서 입을 연다.
젠은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입대할 생각 없냐?”
젠은 뇌가 잠깐 멈춘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다.
지금 저 남자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걸까?
“니들 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활짝도 웃는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럼 변태 종족 놈이랑 음흉한 놈들이랑, 몸집만 큰 종족 놈들한테서 해방시켜 주마.”
젠이 황당함을 느끼며 물었다.
[어떻게?]
“잘.”
잘, 말은 잘한다.
젠은 냉정함을 찾았다.
궤변에 논리를 들이 댈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까 미친놈은 매가 약이다.
[만일 네가 살아남는다면 그렇게 하지]
젠은 꺼졌던 불길이 다시 가슴에 치솟는 걸 느꼈다.
저 인간.
너무 건방지고 오만하고 재수 없다.
더구나 자신의 딸 앞에서 뭐 저리 당당한지.
그리고 팽의 말이 뇌리에 떠돌았다.
뭘 준다고?
젠은 손을 내렸다.
동시에 목소리도 들렸다.
“유진, 그어 버려.”
두두두둥!
광선의 비가 다시 내리 꽂힌다.
콰과과과광!
배리어는 없었다.
폭음과 함께 젠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블레이드를 보고 몸의 경도를 올렸다.
웅!
전신에 하늘빛이 맺히고 터진다.
펑!
애초에 젠은 유진의 블레이드가 자신에게 위협거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노블 에너지를 개방하는 것으로 적을 밀어내고 밑을 살피려는 순간이다.
서걱!
“죽이라고 했으면 죽였겠지만, 아무래도 당신, 내 후임이 될 것 같으니까. 이 정도만 할 게.”
희멀건한 얼굴의 남자의 칼이다.
두 자루 짙은 푸른빛의 에너지 블레이드가 어느새 젠의 왼쪽 팔에 깊은 자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옆으로 선다.
방금 자신을 칼로 그은 남자가 보무도 당당하다.
겁도 없었다.
“지혈 안 해?”
그 남자가 말했다.
젠은 그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바로 밑.
콰가가가.
레이저 소나기가 떨어진 곳이다.
전신에 두꺼운 기계 갑주를 두른 이가 위를 올려다본다.
아머 마스크 위, 푸른빛이 번쩍이는 눈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약속 지켜.”
[…바이탄?]
그들과 비슷한 형태의 외골격이다.
팽과 자신의 덩치 큰 부대원까지 지킨 세주가 전신을 감싼 갑주를 벗는다.
“인간이다.”
그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두근.
젠은 가슴이 뛰었다.
젊은 시절, 콴과 싸우던 그 전장에서처럼.
은하를 배경으로 질주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받들어 모시지]
젠이 자기도 모르게 답했다.
*
‘야, 너도 먹통이 돼서 주저리주저리 계속 떠들고 있는 거 아니지?’
아까부터 EMP 쇼크를 맞고 계속 그 원리를 떠들던 프로비던스다.
-흥. 고작 그 정도에, 난 불세출의 오버테크놀로지 프로비던스야.
오랜만에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이 있어서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잘 싸우고 모든 위기를 헤쳐 나왔다.
아니지.
‘모두 내 덕분이지.’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질 고약한 기계를 잘 달래서 지금 상황까지 만들 수 없을 거다.
다 자신 덕이다.
-몹시 불쾌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일하자. 일. 모드 준비해.’
젠과 말하며 준비한 비장의 한수다.
에너지로 기생하는 프로비던스지만, 고작 이 정도에 먹통이 될 거라면 가치가 없다.
세주의 기대대로 프로비던스는 멀쩡했다.
‘모드 온 흉몽.’
레이저 소나기가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프로비던스가 허공에 흩어지며 세주 전신에 깃든다.
동시에 치용보다 배는 두꺼운 팔과 다리를 갖춘 거대한 로봇 형태로 변한다.
적에게 흉악한 꿈을 준다는 이름의 모드, 흉몽이다.
실제로는 프로비던스가 갑주로 변해 전신을 감싸는 형태로.
외갑 자체가 함선보다 단단하다.
시뮬레이션 상 확인했을 때, 오형포정도에 직격당하지 않으면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사아아악.
레이저 포 소나기 덕에 눈이 부셨다.
그래도 세주는 당당히 위를 올려다 볼 수 있었다.
“약속 지켜.”
젠은 살아남으면 자신의 부하가 되겠다고 했다.
바이탄이냐고 젠이 중얼거렸다.
세주도 바이탄의 외견 정도는 알았다.
마치 거대 로봇 같은 놈들이다.
그게 흉몽 모드와 비슷하다는 것도 알았다.
“인간이다.”
그럼 잡스런 이름으로 부르지는 말아달라고.
세주는 당당히 자신의 종을 밟혔다.
젠이 밑을 보고 내려왔다.
[나만 동의한다고 끝이 아니다]
반란구의 구성까지 알아온 영특한 기계 새끼 덕에 세주는 젠의 말을 금세 이해했다.
반란군은 기본적으로 세 명의 리더가 이끈다.
하지만 정책과 정치는 의회에서 한다.
쉽게 말하면, 세 명의 리더는 전투를 담당하는 장군이고 의회는 내각을 돌보는 정치인이다.
그리고 그 셋 중 하나가 바로 뱀의 젠.
프로비던스가 말한 대로라면 가장 차가운 피를 가진 인간이자, 딸과 가족마저 외면한 최악의 인간이다.
그가 다가와 팽을 바라본다.
[살았구나]
[다행이지?]
팽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여자, 목숨 소중한 줄 모른다.
젠의 눈을 보고 그가 어떤 감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젠은 팽이 산 것에 이곳의 누구보다 안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