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 흉내
3일.
더 길게 쉴 수 없었다.
할 일이 많다.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서 프로비던스가 말했다.
-형이 널 사랑한다.
이 미친 기계 놈이.
3일 내내 저딴 소리를 재생한다.
그만 좀 하라고 말하기도 지친다.
‘내가 술을 끊고야 만다.’
애초에 애주가도 아니다.
분위기에 취해서 아버지와 대작한 게 실수다.
강슬과 데이트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를 진전시킬 수도 없다.
언젠가 유진이 물었다.
“형, 왜 강슬, 강닥터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적극적이지 않으니까요.”
자신의 태도를 보고 나무라는 건지.
세주는 단순한 사실을 주지시켰다.
“만약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내일 모래 저기 위로 가서 피 터지게 싸우다 죽으면?”
남은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까 더 가까워 질 수 없다.
소유하지 않은 물건은 잊어버려도 그만이지만.
자신의 것을 잊어버리면 찾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더구나 그게 죽어서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그보다 큰 아픔은 없다.
“…안 어울리네요.”
“까불지 마.”
그렇게 유진과 대화를 끝냈다.
그래서다.
강슬과 더 가까워지긴 힘들다.
만약 관계가 진전되길 원한다면.
‘이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겠지.’
세주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
세주는 돌아오자마자 시뮬레이션 룸으로 들어왔다.
단 하루도 쉬지 않은 일이다.
“표적 띄워.”
철컥.
말과 함께 저격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스코프에 눈을 붙이고,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특별한 무기도 모드도 없다.
그저 매일 하는 훈련일 뿐이다.
감각을 가다듬는 거다.
오늘의 적은 훈련 된 전투병 50명.
팅.
시작하자마자 탄환 하나가 숨은 담벼락 위를 때린다.
스윽.
저격 소총을 세로로 세우고 잠시 이마를 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를 식혀준다.
휘릭.
그리고 단숨에 몸을 반 바퀴 돌리며 조준.
탕!
방아쇠를 당기며 몸을 옆으로 굴린다.
중요한 건 감각이다.
보지도 않고 알 수 있다.
맞췄다.
매일매일 적이 바뀌지만 세주의 손에 들린 무기는 같다.
저격 소총 한 자루.
다른 무기는 필요 없다.
기본에 충실하며 감각을 유지하는 것, 그게 세주가 하는 훈련의 목적이었다.
시뮬레이션 모드를 끝내고 나왔을 때, 세주는 씻고 싶었다.
-돌아와서 손도 안 씻고 테크룸으로 왔어.
‘그랬나?’
몸을 구석구석 씻고 나오자, 나호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괜히 심술이 나서 인공위성을 띄우라고 한 게 아니다.
팽에게 얻은 정보와 프로비던스의 추측, 계산.
모든 것을 합해서 찾은 게 그 사진에 있었다.
지구 바로 위, 달보다 가까운 곳.
검은 행성이다.
메카니모스의 전초기지였다.
“팽.”
전등도 켜지 않은 숙소 구석에서 팽이 걸어 나왔다.
“준비해.”
이 전략의 핵심은 그녀에게 있다.
그녀가 주먹을 들고 흔든다.
알겠다는 표시였다.
“그럼 가보자.”
치용, 인준, 유진과 팽.
그리고 반세주.
총원 다섯 명.
이제까지 얻어맞기만 한, 우주 제일의 빈약한 아이가 뻗는 최초의 주먹이었다.
팽이 지구에 왔을 때 탔던 비행체는 다섯을 너끈히 태울 수 있었다.
함선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나호필을 포함해서 몇 명만이 그들을 배웅했다.
쿠우우.
푸른 불꽃이 뿜어지고 작은 원반이 하늘을 난다.
“살아 돌아와라. 반세주.”
나호필이 원반을 보고 중얼거렸다.
“안 죽습니다. 소장님은.”
바로 옆, 크롬 팀의 대장 장왕이 말했다.
나호필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반세주는 미친놈이다.
그가 생각한 작전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더없이 효과적인 일격이 될 거다.
그래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메카니모스 전초기지는 행성 형 함선이었다.
구 형태의 그것은 중력을 갖췄고, 거주하는 전투원만 오십이 넘었다.
식민지에서 잡아 온 노동종이 오백, 전투종이 오천.
거기에 이 전초기지의 주인은 5급 전투원이다.
혼자서 작은 행성 하나 정도는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춘 놈이었다.
이 막강한 기지에 침입에 대한 대비는 넘쳐났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전투 드론이었다.
[작은 소형선 침투]
[확인]
[전투 드론 다섯 대 파견]
콴 놈들이라도 쳐들어오지 않으면 충분했다.
전투 드론은 레이저 포를 팡팡 쏴댄다.
콰우.
전초기에 안착한 소형선을 발견한 전투 드론이 날아갔다.
지지지직.
순간, 홀로그램 화면 중 하나가 노이즈를 일으키며 꺼졌다.
그리고 동시에 네 대의 화면도 사라졌다.
[보고 필요]
함선 승무원 하나가 함장을 찾았다.
5급 전투원 사이드.
머리에 세 개의 렌즈만 갖고 있지만, 혼자서 삼형포를 쏘는 괴물이다.
[노이즈 직전 화면 띄워]
위이잉.
렌즈에 달린 관이 늘어나며 앞으로 뻗는다.
사이드는 유심히 화면을 봤다.
[적은 다섯 콴이다]
그는 빠르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소수인원으로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전투 드론을 해치울 수 있는 놈들이라면 바이탄과 콴 뿐이다.
바이탄은 겉모습만 봐도 구별이 가능하니.
지금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 쓴 다섯 놈은 분명 콴이다.
[전투종을 보내. 그리고 7급 전투원 열을 파견한다]
적절한 명령이었다.
달리는 칼이라는 별명의 가르간 놈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이 정도 병력을 감당할 놈은 콴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많이 반겨주는데.”
날아온 전투 드론을 격추한 건, 치용이다.
위이이잉.
레이저 탄환을 머금은 산탄총이다.
세주는 이곳에 오기 전 네 종류의 탄환을 개발했다.
그 첫 번째, 광탄이다.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광선을 압축, 커버링 탄환의 원리를 적용해서 만든 탄이다.
양손에 더블 배럴을 개조한 형태의 소드 오프 두 자루를 든 치용의 모습이 든든했다.
“더 오겠죠?”
유진이 묻는다.
“당연히.”
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린 곳에 산소는 충분하다.
팽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장 여기 있으면 위험. 전투 드론이 왔으면 놈들의 병력이 와]
“그러네. 움직이자.”
타고 온 작은 함선은 무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갈 때 곤란하다.
세주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쪽이 적이 오는 방향]
“응.”
‘여기 전체 스캐닝 해.’
-어디 전체?
‘우리가 밟은 땅 전체. 지도가 필요해.’
홀로그램 맵이 주변만 비춘다.
대규모 스캐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에너지 없어.
‘방금 저 드론 부숴서 좀 나왔잖아. 전부 써.’
-내가 먹을 게 없다고.
‘걱정도 사서 한다.’
곧 그 에너지, 넘칠 정도로 차오를 거다.
끼에에엑!
괴수의 울음이 들린다.
“온다.”
말은 그렇게 해도 프로비던스는 충실히 명령을 따를 거다.
혀를 길게 내민 놈, 레이퍼를 닮은 놈.
모양도 갖가지다.
“전신 아머 업.”
입을 염과 동시에 세주의 전신을 은회색 아머가 감싼다.
콴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다.
[사출무기는 메카니모스가 가장 강력해. 콴의 주 무기는 에너지 블레이드야]
준비한 탄도 많고 화력도 넘쳐나지만.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적의 몰살이 아니다.
“자, 콴 코스프레 모드로 전환!”
치용을 비롯해서 팽까지 전부 전신에 은회색 아머를 입었다.
겉에는 그럴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팽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콴처럼 위장해서 적의 전초기지를 치자.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소수정예라는 콴의 무력을 흉내 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세주의 부대는 그 무력을 충분히 따라할 수 있었다.
주의할 점은 하나뿐이다.
“어….”
“쉿!”
분명 어흥이다.
치용이 입을 열려던 찰나, 인준이 옆으로 붙어 주의를 줬다.
입을 열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철저하게 콴의 전투원이니까.
[달리는 칼이라도 왔나!]
맞은편 선두에서 목이 짧고 다리가 두꺼운 괴물이 달려왔다.
어깨 옆으로 팔 대신 일형포를 달았다.
두두둥!
레이저 포가 일행을 덮쳤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몸을 바닥으로 바짝 붙인다.
배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다.
사출무기로는 메카니모스가 으뜸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일형포부터 구형포까지 정리하고 개발한 것도 메카니모스라고 했다.
팔에 레이저 포를 달고 나타나는 놈을 봐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자세를 낮춘 세주가 물었다.
“달리는 칼이 누구야?”
[가르간]
팽이 말과 함께 옆으로 움직였다.
유진과 함께다.
전면은 치용이 달린다.
팽은 출발하기 전, 부대원을 보고 역할을 정해줬다.
치용은 뻗는 칼 쿠인.
콴의 전사 중 하나다.
두 자루 칼로 적의 정면을 부수는 이들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치용의 성격을 제대로 알아봤다.
입을 꾹 다문 치용의 칼 두 개와 양팔에 레이저 포를 단 괴물이 만난다.
[뻗는 칼!]
놈이 놀란 틈, 치용의 칼이 멋진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놈은 몸을 뒤로 눕히며 첫 번째 칼을 피했다.
겨우 다리 한쪽에 긴 자상을 남길 뿐이다.
놈이 다시 어깨에 달린 포신을 앞으로 내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콰가가각!
치용이 쥔 두 번째 칼.
넓게 늘어난 붉은 칼이 그대로 놈의 몸을 세로로 가른다.
첫 번째 일격부터 물 흐르듯이 움직인 치용이다.
쿠인이란 놈은 뻗는 칼이란 별명과 함께 물 흐르듯이 칼질을 하는 게 특징.
팽이 말한 그대로다.
그녀의 기억을 토대로 수없이 훈련을 한 치용이다.
우스운 건, 콴이라는 놈들을 따라하면서 치용의 실력이 부쩍 성장했다는 거다.
어흥 거리지 못해 서운하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의 기합이 들리는 것 같다.
유진과 인준에게 주어 진 역할은 없다.
팽이 아는 콴의 위대한 전사는 둘 뿐이다.
뻗는 칼과 달리는 칼.
뻗는 칼의 쿠인, 그리고 달리는 칼의 가르간.
‘무기.’
-준비 완료.
양손을 앞으로 내밀자, 손등에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기 오기 직전 새긴 문신이다.
그냥 문신은 아니다.
프로비던스의 인벤토리와 연결된 건 물론이고.
세주의 생각을 읽고 무기를 변환시킨다.
후웅.
가르간의 무기는 양 손등에 뻗는 두 자루 청백색의 블레이드.
아머 위로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그리고 곧 손목 위까지 덮는 묵직한 장갑이 생겼다.
훙! 훙!
손등 위로 푸른빛 칼날이 튀어 나온다.
팽은 경고했다.
가르간의 청백색 칼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고.
그걸 흉내 내지 못하면 이번 작전은 하나마나라고.
‘시작해.’
놈의 청백색 칼날을 따라할 순 없다.
그보다 진한 남색을 보이라면 보이겠지만.
그래서 선택한 건, 시뮬레이션 모드의 현상 구현이다.
-완료.
프로비던스가 세주의 칼날 위로 홀로그램 색을 입힌다.
만지기 전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다.
[역시 대장]
감탄한 팽이 손을 오므린 채, 좌우로 돌린다.
페트병을 거꾸로 잡고 여는 모양이다.
그 손짓의 뜻은 ‘너무 멋져’였다.
‘난 언제나 멋지지.’
-누구 덕인데?
‘그래. 네 덕이라고 하자.’
퉁.
세주가 달리고.
팽이 뒤에서 외쳤다.
“트레에에에에에!”
[달리는 칼이 왔다!]
유치한 그 외침에 앞의 적들의 시선이 모인다.
달리는 칼은 빠르고 강하다.
팽은 다른 설명을 붙일 수 없었다.
만나는 순간 적은 죽고, 그가 원하지 않으면 살아남는 이는 없다.
그는 전장의 사신이었다.
그리고 세주는 그 가르간을 똑같이 흉내 낼 생각이었다.
[달리는 칼!]
목이 긴 렌즈 달린 놈이다.
전투원 중 하나일거다.
메카니모스에 대해서는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첫 발을 디디며, 세주는 모드의 스위치를 올렸다.
‘모드 온 핵 & 슬래시.’
단숨에 휘몰아치고 꺾는다.
시뮬레이션에서 봤던 가르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마존에서 봤던 다중영상재생의 가르간도 기억 한다.
텅!
바닥을 박찬 세주의 모습이 사라진다.
끄레레엑!
기린 마냥 목이 긴 전투원 놈이 뒤를 돌아보며 이상한 비명을 지른다.
쩌저적.
그리고 목에 사선으로 실금이 생긴다.
주르륵.
녹색 체액이 흐르고, 놈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동시에 놈의 몸 곳곳에서 실금이 생긴다.
그리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가르간을 달리는 칼이라 불리게 만든 기술이다.
고속 이동 참격.
세주가 흉내 낸 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