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주정
쩍!
팽은 두껍고 강력한 몽둥이를 구현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게 막혔다.
비슷한 형태의 푸른 몽둥이가 자신을 노렸다.
판단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그녀는 앞으로 굴렀다.
치용의 푸른 몽둥이가 그녀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파스슥.
긴 검은 머리칼을 스치며 일부가 후두둑 뜯겨 나갔다.
파방!
둘이 몸을 돌리며 다시 몽둥이를 휘두른다.
푸른빛이 둘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만.”
트레이닝 룸에서 그걸 지켜보던 세주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훈련을 하랬지? 누가 사생결단 내래?”
치용이 이마에 흐른 피를 스윽 닦아내며 웃는다.
입안이 터졌는지, 치아가 붉게 물들었다.
“조금 흥분했습니다.”
조금? 더 흥분하면 사람 잡겠다.
팽은 거친 호흡을 조절하고 몸을 바로 했다.
-무릎 인대 나갔어. 치료 해줘.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도 없다.
‘레스큐 모드 온.’
치유 드론을 둘에게 보냈다.
지이이잉!
붉은 빛이 둘을 감싼다.
“좀 얌전하게 훈련하자.”
세주가 둘을 나무랐다.
[알겠다. 대장]
얼굴은 예쁜데 말투가 투박하다.
아무래도 저 통역기가 문제다.
트레이로 대화할 수 있으면 분명 팽의 귀여운 말투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이 기회에 강슬이고 뭐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하와 로맨스로 갈아탄다면 멋진 미래가 기다릴 것 같다.
같은 숙소를 쓰는 둘, 밤마다 뜨거운 열기가….
“어이, 형님. 표정.”
인준이 옆에서 한 마디를 뱉는다.
프로비던스가 방금 전 세주의 표정을 친절하게 홀로그램으로 보여준다.
딱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어때? 팽?”
[충분하다. 대장]
그녀는 세주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거 왜 배우라는 거예요?”
유진이 그럴듯한 질문을 던졌다.
세주는 자신의 계획을 밝히는 순간이 신이 났다.
그래서 열심히 설명했다.
“크흥. 형님이 하신다면 전 어디든 갑니다.”
의리하면 김치용이 말했다.
“미친 짓이군.”
인준의 감상평을 들으며 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인의 범주에서 할 짓은 아니다.
“재밌겠네요.”
유진은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축 쳐진 어깨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무서우면 여기 있어.”
세주가 친절하게 유진에게 말했다.
“아뇨. 무섭지는 않은데.”
“그럼?”
“후, 데이트 일정을 조정해야겠네요. 한 달 뒤까지 스케줄을 잡아놨는데.”
양아치 새끼.
여자에 환장한 놈.
카사노바, 정력왕.
아, 마지막은 욕이 아니구나.
셋의 따가운 눈초리를 보며 유진이 배시시 웃는다.
“그냥 그렇다고요.”
얄미운 놈이다.
팽이 그들 사이에서 주춤 거리며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세주를 바라보고 말했다.
[욕구를 해소하고 싶어? 대장?]
…어느 모로 보나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 나왔다.
“아니.”
[필요하면 말해]
“…둘이 한 방 쓰는 건 위험하지 않아?”
인준이 말했다.
방금 전까지는 안 위험했는데, 이제는 위험할 것 같다.
“오늘부터 방 따로 써야겠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휴가?”
나호필이 세주에게 되물었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어디를 간다는 건지.
“응. 휴가.”
“전부?”
“응. 넷 다.”
“그럼 팽은?”
팽에게는 두 명씩 경비를 붙여 뒀지만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거다.
그녀의 억제력은 지금 부대 내에 있는 반세주와 그 일행들이다.
“가둬.”
이 자식은 진짜 양심도 없는 놈인지.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고 따르는 여자를 서슴없이 가두라고 한다.
“팽이 얌전히 있겠어?”
“어차피 여기서 갈 데도 없잖아.”
휴가랍시고 데리고 나갈 수도 없다.
다 맞는 말인데.
“넌 재수가 없는 놈인 것 같아.”
“칭찬이지?”
프로비던스에게 단련 된 세주의 멘탈은 이 정도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널 왜 대장이라고 부르는 건데?”
이제까지 계속 의문에 쌓인 문제다.
“몰라.”
세주도 모른다.
나호필은 그런 세주를 빤히 바라봤다.
신경이 강철 와이어 다발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뭘 믿고 그녀를 풀어주고 옆에 두는 건지.
“왜냐?”
그 모든 의문을 함축해서 물었다.
반세주가 실실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답했다.
“예쁘잖아.”
나호필은 뒤돌아섰다.
역시나 미친놈과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다.
“휴가나 가버려!”
*
“왔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안정감을 들게 한다.
“아들.”
그리고 어머니는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몇 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집이지만.
만날 때마다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기분이 든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린 밥상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우걱우걱.
거침없이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음식을 준비한 어머니에 대한 예의다.
-혼자 먹으니까 좋아?
‘응.’
프로비던스는 에너지를 먹는다.
그에게 에너지는 밥이자 반찬이자 초콜릿이자 음료수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얼마 전에 흥분해서 다 썼다.
남은 에너지가 적다는 건, 프로비던스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남은 에너지를 쪼개서 조금씩 흡수했다.
-인공위성 띄워서 적 행성도 찾았다며, 이제 출발하자.
‘야, 넌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모르냐?’
사형수에게도 마지막에는 푸짐한 밥상을 준다.
우주에 나가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마당에, 막판에 좀 놀다 가자는 걸 인간미 없는 기계 새끼가 딴죽을 건다.
“…체하겠다.”
공깃밥만 열 두 그릇 째다.
일반 군인, 그러니까 D를 먹은 군인도 일반인의 네 배는 먹는다.
그리고 세주는 보통 사람의 열 배는 넘게 먹는다.
“이제 배가 좀 부르네요.”
세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소냐? 아주 쉬지도 않고 쳐 먹는구나.”
“애가 잘 먹으면 좋지. 놔둬요.”
“이건 잘 먹는 게 아니라 아주 돼지 한 마리를 보는 기분이라고.”
저기요? 먹는 걸 부드럽게 바라보는 게 지금 부모님의 포지션이 아니신가요?
-풉.
‘웃지 마라.’
“뭐, 그건 그렇고. 휴가냐?”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서 가져온 걸 날름 집어먹었다.
아버지가 세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가축을 보는 걸로 바뀌는 것 같았다.
“네.”
“그래.”
사과 다섯 개, 배 다섯 개와 한라봉을 까다가 지쳤는지, 손을 멈추셨다.
“세주야.”
“네.”
남녀가 공평하게 군대를 끌려가는 판이다.
거기에 자신의 아들은 영웅이라고 불리는 몸이다.
팬 카페까지 생기는 판이니, 인기는 당연지사 많을 거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신중하게 입을 열고 물으셨다.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
끼긱.
배를 찍던 포크가 접시를 긁었다.
“아닌데요.”
“그럼 왜 색시를 안 데려 오니?”
아니, 지구가 침공당하고 외계인이 활개 치는 판에 아들의 연애가 걱정되는 겁니까?
거기에 그 아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흠흠. 아들. 연애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일에 열중하다 보면 시간 금세 지나간다.”
아버지가 거들었다.
“너 올해 서른넷이야.”
어머니가 눈을 빛냈다.
곤란하다. 곤란해.
“멀쩡하게 낳아줬으면, 할 일은 하자. 아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넵.”
“알아들었으면 실행해야지?”
“네?”
“어제 엄마가 봤는데 강슬? 연락 왔던데?”
맞다. 연락 왔다.
휴가 나왔어요?
딱 여섯 글자가. 아니, 그렇게 까칠하던 여자가 연락 온 게 좋긴 한데.
휴가 나온 건 어떻게 알았을까?
정유진 이 자식이 말했을 거다.
“음. 네. 알겠습니다. 소자, 내일 거사를 치르겠습니다.”
아이라도 하나 만들어 오면 헹가래라도 쳐 주실 것 같은 분위기다.
“응. 꼭 그래라.”
잘 먹고 잘 쉰다.
TV를 보고 웃고 떠들고 시간을 보낸다.
더 없이 평화롭다.
침공이 없는 지구는 조용하고 똑같다.
뉴스에서 간간이 걱정 어린 말을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 뿐이다.
“주무세요.”
열두 시.
평소보다 한참은 늦은 시간이다.
머리만 대면 자는 세주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우주라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지만.
얌전한 여행이 아니라 파견이다.
관광이 아니라 전투를 위해서 간다.
가슴이 짜릿하다.
-쫄았어?
더 없이 적절한 타이밍에 프로비던스가 물었다.
‘조금?’
정신없이 싸우던 지난날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수비가 아니라 공격이다.
-안 어울려.
인정한다.
‘응. 잠이나 자자.’
그렇게 눈을 감으려던 찰나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니 아버지다.
한 손에 소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쥐포다.
“한 잔 할래?”
아버지와 대작이라, 꽤 오랜만이다.
주방 식탁에 앉자, 아버지가 쥐포를 불에 굽는다.
타닥타닥.
고소한 냄새가 풀풀 났다.
“어머니는요?”
“잔다.”
등을 보인 아버지가 답했다.
곧 구운 쥐포를 가져와 소주를 한잔 쪼르륵 따랐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눈앞에 찰랑거렸다.
“먹기 힘들면 꺾어 마셔.”
아버지가 한 마디 한다.
“네.”
꼴깍.
맑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알싸한 향과 쓴 맛이 코끝을 찡하게 아린다.
“크으.”
D를 먹은 육체는 모든 영양소를 빠르게 흡수한다.
그들에게 술은 되도록 먹으면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빠르게 흡수되는 알코올은 곧 전신에 퍼지고.
몇 잔 안 되는 술이 곧 만취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알코올 분해할까?
물론 세주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귀엽고 깜찍하고 끔찍한 기계 하인 덕분이다.
‘됐어.’
통.
잔을 부딪치고 맑은 액체를 넘긴다.
알싸한 향이 쓰게 느껴지지 않을 때쯤이다.
질겅질겅 쥐포를 씹어 삼킨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들.”
“네.”
평소라면 아버지가 저렇게 부르면 오한이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세주를 그리 부르지 않는다.
이놈 저놈하면 했지.
아들이라니, 소름이 돋는다.
“네 엄마가 말하지 않았지만, 걱정하는 건 알지?”
모를 리가 있습니까.
재 입대, 그 일 하나만으로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우셨다.
“네 엄마는 물어보고 싶었다더라.”
“뭘요?”
“꼭 네가 해야 되는 거냐고?”
아버지도 같은 마음일까?
몽롱한 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잡힌다.
그런데 해야 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겁니다.
이상하게 처음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 같았다.
신이 있다면, 그가 마치 이걸 위해서 반세주라는 피조물을 빚었듯.
“네. 제가 해야 해요.”
세주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자라면 할 일은 하고 살아야지.”
신붓감을 데려오라는 것도 전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일 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저 자신을 걱정한다.
왜 자신의 아들이 나서서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들은 그리 한다.
그렇다면 부모 입장에서 다 큰 자식을 말릴 도리는 없다.
“해라. 잘 하고 돌아오기만 해.”
“네.”
물론입니다.
짠.
다시 잔을 부딪쳤다.
꼴깍.
맑은 액체를 넘겼다.
머리가 빙글 돈다.
눈앞에 쌓인 소주병이 보였다.
하나, 둘… 여덟, 아홉, 열.
그만 세야겠다.
“먼저 들어갈게요.”
혀가 조금 꼬부라진 것 같다.
세주는 비틀 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프로비던스를 불렀다.
‘브로. 브로. 브로.’
-술주정뱅이.
‘야. 브로.’
-왜?
‘형이 임마.’
-뭐?
‘너 이 새끼. 형이 많이 사랑한다.’
-미친놈.
‘그래그래. 이 싸가지 없고, 배터리 나간 계산기만도 못한 새끼야.’
-하아.
‘그래도 형이 너 잘 챙겨줄께. 이런 불쌍한 장애 로봇 새끼.’
-잠이나 쳐 자.
지끈.
너무 많이 마셨다.
속 깊은 곳에서 술 냄새와 고약한 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으음.”
-일어났어?
왠지 신이 난 프로비던스의 목소리다.
이 자식은 아침부터 왜 이래?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음성이 들려온다.
반쯤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다.
형이 많이 사랑한다.
왜 녹음 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괴롭고.
술에 취한 어제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던가.
-좋아?
형이 많이 사랑한다. 형이 많이 사랑한다. 형이 많이 사랑한다.
‘그만 해!’
괴롭다. 어제의 자신을 지우고 싶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어머니가 옷 두 벌을 거실에 깔아두고 밥상을 차려두셨다.
“밥 먹고, 씻고 준비해라.”
“네?”
“약속은 몇 시니?”
색시를 구해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거 걱정하는 걸 돌려서 표현한 거 아니었습니까?
“몇 시야?”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농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저녁이요.”
급하게 스마트 폰을 잡았다.
강슬과 약속을 잡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