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 협조 좀 구합시다
후웅! 퉁!
치용의 몸이 공깃돌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트레이닝 룸은 바닥, 천정, 벽, 전부 충격 흡수 배리어로 만들어졌다.
바닥을 구른 치용이 고개를 들었다.
3전 3패.
쓰러 진 치용 앞, 팽이 오롯이 서 있다.
[무리]
그녀가 한 마디를 뱉자, 치용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크아아아!”
이제는 반은 짐승이구나.
포효를 내지르며 치용이 앞으로 내달린다.
무섭게 빠르다.
땅을 박차는 발끝은 퓨마처럼 탄력 있고, 앞으로 휘두르는 주먹은 건물을 부수는 쇠공 같다.
팽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그녀의 눈과 양손에 푸른빛이 진하게 어린다.
그리고 앞으로 손을 뻗자, 농구공만한 납작한 접시가 생겼다.
치용의 주먹을 접시로 막는 팽이다.
펑!
그리고 막는 것과 동시에 치용을 걷어찼다.
이전 세 번의 대련과는 다르다.
다리가 채찍처럼 뻗어 치용의 머리를 후려친다.
뻐걱!
목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치용을 세주가 받으려 했다.
“그러다 죽겠다.”
[안 죽어. 이 남자 튼튼해]
그건 인정.
“우으으으으으.”
그걸 맞고도 버텼다.
넘어지려던 치용은 그대로 코피를 흘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치용을 받으려던 세주가 구부정하게 몸을 움츠렸다가 펴, 둘 사이에 섰다.
“그만.”
팽에게 기술을 배우라는 한 마디에 시작된 대련이었다.
치용이 눈을 부라렸고, 인준은 냉소를 지었다.
“형님, 이건 아닙니다. 저 김치용입니다. 우는 애도 뚝 그친다는 서울 폭주 기관차, 김치용.”
그런 별명이 있었냐?
우는 애한테 아무리 말해도 멈출 것 같지는 않다.
“붙어 봐.”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백번 말해 뭐하냐? 한 번 당해보면 실감할 것을.
직접 배우고 나서 세주도 꽤 활용도가 좋을 거라고 생각한 전투법이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거다.
3전 3패.
발끈 러쉬도 실패다.
“정말 독특한 싸움법이네요. 실제로 노블 에너지 보유량은 곰 형님이 더 위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유진이 말이 맞았다.
에너지 보유량만 따지자면 팽은 이 셋보다 적다.
그동안 산전수전 공중전에 목숨 걸고 싸워 온 전장만 수십 번이다.
이 셋은 항상 노블 에너지를 한계까지 끌어다 썼고, 무엇보다 세주가 이들이 놀게 두질 않았다.
쉴 틈이 생기면 무섭게 몰아쳤다.
그 덕분에 에너지 보유량은 풍부하지만, 활용도가 떨어진다.
“단순한 방법이야. 우리는 풀 업, 번 업 상태로 싸우지만, 이 콴의 전투법이라는 건 궤가 달라.”
그리고 세주는 시범을 보였다.
자신은 이미 팽에게 당하면서 배운 거다.
화르륵.
왼 주먹이 불타오른다.
원리는 단순하다.
풀업에 쓸 에너지를 한 곳에 몰아넣는다.
몸의 다른 부분은 방어력을 잃지만, 왼손에는 공격력이 배가 되는 거다.
같은 원리로 원반이나 기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방패로도 쓴다.
눈에 집중하면 시력과 동체 시력이 놀랍게 발달하고 코에 집중하면 후각이 개를 능가한다.
익히는 방법은 단순했다.
감각이다.
농구공을 던질 때 얼마큼 힘을 줘야 날아가는가?
야구공을 던져 스트라이크 존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포츠와 같다.
전부 감각을 통해서 익혀야 했다.
그에 관한 정석은 팽이 알려줄 거니, 잘못된 방법으로 배울 일도 없다.
팽이 걱정 말라는 듯, 세주를 보고 손등을 보이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핀다.
감자나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주 공용어를 토대로 하는 제스처로 가벼운 미소다.
서로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외계인들은 손짓과 발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 중 하나다.
절대 감자나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왜 형님한테 감자나 먹으라는 거야?”
인준이 물었다.
“그런 게 아니야.”
일일이 설명하려니 말이 길어진다.
“됐다. 나중에 천천히 말해줄게.”
할 일이 많다.
그대로 트레이닝 룸을 나섰다.
배우 준비는 팽에게 맡기고, 다음은 무대다.
“나호필.”
막 집무실을 나서는 모습이었다.
“왜?”
“할 게 좀 있는데.”
“나중에.”
그렇게 말하고 나호필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디 가는데?”
“회의.”
연합군 총 지휘관으로서 회의다.
‘나만 쏙 빼놓고?’
-형이 싸우는 일 제외하고 신경이라도 쓴 적이 있어?
없다.
나호필이 알아서 잘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볼 일이 있었다.
더구나 연합군 전부가 모여 있다면 말하기도 편하고 쉽다.
막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던 나호필이 뒤를 돌아봤다.
“왜?”
“나도 참여하려고.”
“…그러니까 왜?”
나호필 이 자식, 사람을 뭐로 보고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깽판 칠까봐 그런 거야. 얌전히 있겠다고 해 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얌전히 말할 거다. 깽판 안 쳐.”
“더 불안해.”
나호필이 그런 세주를 보고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많이 늦었다.
더구나 그 반세주다.
인류의 영웅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괴물!
둘은 그대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푸른 홀로그램이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기술 많이 늘었네.
에너지를 확보한 것도 꽤 세월이 흘렀다.
꽤 선명한 홀로그램이다.
둘의 앞에 렌즈가 전신을 훑는다.
“가만히 있어. 우리 쪽 모습도 송출해야 하니까.”
설명 안 해줘도 안다.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인원은 스물이 넘었다.
연합군의 주요 인사가 전부 모였다.
그 중에서 핵심 권력자들이라고나 할까나?
“실수하면 안 돼.”
옆에서 나호필이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건지.
한때는 예의와 매너의 반세주로 불렸던 몸이다.
“그쪽은?”
반듯하게 앉은 갈색 피부의 남자다.
“반세주.”
꿈틀.
그가 미간을 움직인다.
시비 걸면 어쩌나 싶다.
그 순간 그가 활짝 웃었다.
“아비 크헨에게서 들었다.”
“우방이야. 아무래도 아마존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니까.”
옆에서 나호필이 중얼거렸다.
“만나서 반가워.”
세주가 밝게 인사했다.
“으흠.”
“크흠.”
“큼큼.”
그 모습에 몇 명이 헛기침을 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나호필이 모두의 시선을 모은다.
타고난 웅변가라면 이런 사람일 거다.
나호필은 말을 끊고 맺을 줄 알았다.
그리고 호흡도 조절 할 줄 알았고.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가 흩어놓기도 했다.
훌륭한 연설이었다.
나호필이 말한 내용은 진부했지만, 필요한 말들이었다.
연합군은 전력을 모아야 한다.
말들이 끝날 무렵, 세주가 입을 열었다.
“협조 좀 구합시다.”
“…반세주!”
나호필이 말렸지만, 애초에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호필도 알고 반세주도 안다.
“저기 위에 인공위성 도는 거 몇 개만 더 올립시다. 찾는 게 좀 있어서.”
뿌드드득.
기술 진짜 좋아졌다.
홀로그램 너머 사운드까지 잡아서 들려준다.
들고 있던 플라스틱 컵을 구긴 남자가 보였다.
반듯하게 생긴 이마와 꼬불꼬불 굵은 금발이다.
라면을 머리에 얹은 것 같다.
기름도 같이 끼얹은 것처럼 느끼하다.
-드마유 기억해?
이름을 듣는 순간, 아마존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왜 그 우주선을 한국에서 독차지 하냐고 지랄 발광하던 놈.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했던가?
-닮았네.
아하.
그러고 보니까 분위기가 비슷하다.
“예의도 없고, 생각도 없고. 전투 능력 하나 있다고 너무 나대는 거 아닌가? 그리고 뭐? 인공위성?”
“우리가 오늘 논의 할 내용은 이게 아닌 걸로 압니다. 한국과 다르게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겨우 몇 달 만에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우주로 나가서 싸우자는 건, 대체 누구 의견입니까?”
드마유 삼촌 쯤 되는 남자의 말이 끝나자, 두 명이 시간차로 나서서 말을 잇는다.
“그거 난데.”
“후, 반세주 소장. 당신의 능력이 출중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맞소! 우리는 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들 봐라.
은근슬쩍 드마유가 시비 건 내용도 넘어가서 자기들 할 말만 한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의 침공이 계속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거에 대비해야 하고!”
미국의 알버트 크로이츠다.
그는 반세주의 편이었다.
갑자기 연합군 회의장이 두 갈래로 나뉜다.
친 반세주 대 반 반세주다.
“그의 의견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나!”
“우리가 하는 건 전쟁입니다! 땅 따먹기 놀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의 침공을 막아내는 건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 반세주 때문에 한국에만 외계인이 침공하는 건 아니고?”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하는 새끼들은 싸움 시작하면 똑같구나.
놔두면 드잡이 질 까지 하겠다.
홀로그램 형상이 사납게 움직여 사이킥 조명만큼이나 반짝거린다.
어두운 방에 이런 조명을 보니 춤을 추고 싶은 판이다.
꽝!
굉음이 터진다.
깜짝 놀란 이들이 입을 다문다.
나호필은 놀랐지만, 예상한 부분이었다.
이런 개판을 두고 볼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서지 않은 거고.
단상을 쪼개버린 세주가 웃으며 가운데로 나선다.
홀로그램 사이에 선 그가 드마유 삼촌을 가리켰다.
“말조심 하지? 여기서 이탈리아로 날아가는데 30분이면 슥삭인데.”
“위협인가?”
“응.”
세주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병력을 다 모아서 덤벼 봐라. 어디 얼마나 잘 막나 구경이나 해보자. 아니, 아예 외계인과 싸우기 전에 우리끼리 머리에 피 터지게 싸워 볼까?”
세주는 협박했다.
전 세계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외압이 있다면.
나라를 뭉치게 하는 것과 같이, 외압이 존재하면 세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뭉칠 수 있다.
이제까지는 잘 싸웠다.
하물며 한국이 나서서 최신의 기술을 공유했다.
기술 공유.
이 네 글자가 주는 힘은 컸다.
거기에 침공이 일어나면 발에 땀나도록 뛰겠다고 약속한 연합군 형성까지.
이대로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다.
“농담 아니다. 진심이니까. 해보고 싶으면 해 봐.”
사납게 으르렁 거렸다.
-왜 그래?
‘열 받아.’
화가 난다.
누구는 사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죽는다.
어떤 이는 전장에 나간 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그가 살아서 돌아오길 빈다.
“인공위성 띄워, 그 시간 내가 벌어주겠다. 그리고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냐고 물었지? 이제까지 전장에 섰던 이들이 뭘 한 것 같나?”
꽝!
문을 박차고 세주가 나가버렸다.
그 사이에 선 나호필이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반세주 소장의 의견은 국가와는 무관합니다.”
싸늘한 정적 속에 울린 목소리에 드마유 삼촌이 그를 노려본다.
“그는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이 아닙니까? 그가 국가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 국가의 의견이라고 해둡시다.”
나호필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뭐요?”
“그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정말 우리끼리 전쟁이라도 하자고? 그건 아닐 텐데요? 우리 쟁점이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반세주 소장이 벌어준다고 했으니 인공위성이나 띄웁시다.”
“인공위성이 애드벌룬인 줄 아나?”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이탈리아의 총사령관이다.
“몰라. 새끼야. 그럼 넌 한국군 없이 싸워 볼래?”
꽝.
그리고 나호필도 밖으로 나갔다.
“히끅.”
남은 드마유 삼촌이 딸꾹질을 했다.
*
“깽판치고 나와도 돼?”
밖에서 기다리던 세주가 물었다.
“그러는 네가 시작했잖아.”
“나야 네가 수습할 거니까.”
“괜찮아. 이게 수습이야.”
욕을 내뱉고 각 나라의 수장이 모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온 거다.
홀로그램이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엿을 먹이고 나왔다.
어디가 수습인데?
“괜찮아.”
나호필이 엄청 초조해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곧 그가 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알버트 크로이츠.
미국 지휘관이었다.
“봐, 괜찮다고 했잖아.”
나호필이 세주에게 말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정작 걱정은 혼자 다 해놓고 저런다.
세주는 피식 웃고 전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후, 근데 인공위성은 왜?”
전화를 끊은 나호필이 세주에게 물었다.
“메카니모스의 전진 기지를 찾아야 돼서.”
“…뭘 찾아?”
“메카니모스의 전진 기지.”
나호필은 안색이 까맣게 죽은 채 물었다.
“왜?”
“쳐 들어갈 거다.”
“언제?”
“찾는 즉시.”
나호필은 생각했다.
역시 이놈은 전 우주를 통틀어 최고로 미친놈일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