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 가진 자의 여유
모드는 프로그램이다.
팽이 말하기 전에 세주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모드가 프로그램처럼 인스톨이 가능하다는 걸 안 건, 최근이었다.
프로비던스가 기술의 회랑이라는 걸 만든, 그러니까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뒤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전투 기술을 가르쳐줬다.
[요령 같은 거야]
아머 없이 배리어를 만들고, 전신에 노블 에너지를 나눈 뒤, 폭발적으로 터뜨린다.
독특한 형태의 기술이다.
순간 주먹에 실린 힘이 포탄처럼 변한다.
이거라면 안나 휴이츠와 맞대결해도 쉽게 밀리지는 않을 거다.
기술은 금방 배웠다.
채 3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그 뒤 대련에서는 결과가 반대로 나타났다.
-쓸 만한데.
프로비던스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콴 놈들과 가까이서 만나면 순식간에 조각이 돼. 놈들은 정말 무서워]
그녀가 말한다.
통역기를 통해서 들려와, 감정이 섞이지 않았지만, 겁을 낸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주가 그녀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쪽 팔로 안아 머리를 톡톡 다독였다.
“괜찮아.”
그녀를 안아주고 팔을 풀려 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메카니모스는 잔인하고, 바이탄은 무식해]
“응. 그래.”
타이밍이 어긋나 그녀를 그대로 안았다.
다시 팔을 풀려하자.
[나 혼자 이곳에 떨어졌을 때, 무서웠어]
아니다.
사실 그녀는 여기저기 음식을 훔쳐 먹으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반란군 최정예부대 일원 중 하나였던 그녀다.
적당한 우주선 하나 훔쳐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랬나?”
세주는 다시 타이밍을 놓치고 그녀와 떨어지지 못했다.
[움직일 때마다 총을 나한테 겨누고, 무서워]
전혀 그런 티는 안 나던데.
-쌩쇼를 하네.
프로비던스가 그녀의 행동에 적절한 평가를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사이 트레이닝 룸이 열렸다.
치용, 유진, 인준이다.
“크흐흐.”
치용이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보기 싫은 얼굴이다.
인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무시하고 들어오고.
유진은 전에 없이 밝은 얼굴이다.
“손이 빠르시네요. 형님.”
아니다. 오해다.
팽을 밀어내자, 그녀가 양팔로 등을 감싼다.
[대장]
얘가 정말 왜 이러나 싶다.
[아기 갖고 싶어]
“……어? 어? 어?”
통역기가 고장 났나 보다.
“부럽네요.”
유진이 웃으며 말한다.
아니, 이 상황에서 그 음흉한 눈빛은 뭐냐?
“잠깐!”
세주가 그녀를 억지로 떼어 놨다.
“방으로 가 있어.”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자, 그녀가 돌아선다.
돌아서는 그녀에게서 쳇,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굉장히 아쉬운 느낌의 감탄사다.
“형님, 굴러온 호박입니다.”
유진이 다가왔다.
“아냐! 임마.”
이 미친 자식이.
“형님, 여자는 그냥 팍! 키스! 팍! 그리고 세……!”
“스탑!”
정신없다.
꽤 강력한 정신 계열 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
-형, 에너지 써야 하는 건 알지?
안다.
저번 전투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수백만이 넘는다.
‘아끼면 똥 되지.’
이제 몇 달 뒤에 은하계를 배경으로 스타워즈 또는 스타트랙을 찍어야 할 판이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다.
‘카탈로그 펼쳐 봐.’
지금 에너지를 쓸 수 있는 것들이다.
홀로그램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주는 차분히 하나하나 살폈다.
새로운 모드도 있었고, 현재 모드를 강화하는 것도 있었다.
전부 살핀 세주는 선택해야 했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요구하는 에너지가 크다?’
-그만큼 좋은 거니까.
배짱 있는 장사꾼 같으니라고.
안사면 그만이라는 저 태도는 굉장히 재수가 없다.
“퉤.”
홀로그램에 침을 뱉었다.
-…우리 좀 교양 있게 지내자.
미안하지만, 교양이랑은 담쌓았다.
세주는 다시 차분하게 카탈로그를 살폈다.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현재 모드 강화 후 에너지 스위처에 남는 에너지 몽땅 붓는 것.
두 번짼 남자는 한 방, 도박은 올인.
새로운 모드 개방이다.
-둘 모두 장단점이 있어.
두 개로 축약한 걸, 보고 고민하자 프로비던스가 조언했다.
-첫 번째는 안정적이라는 것. 두 번째는 안정감은 없지만, 파격적이라는 것.
별 도움은 안 된다.
두 개 중 고민하는 데, 카탈로그 맨 밑에 반짝이는 메뉴가 하나 더 있다.
저건 뭘까 싶은 순간, 눈앞에 글자가 확대된다.
무기 개발이다.
세주가 빤히 그걸 보자, 프로비던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에너지 부어서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만드는 거야.
설명은 성의는 없지만, 이 정도로 얘기해도 알아들으니까 문제는 없다.
세주는 고심하지 않았다.
벼락은 자신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모드도 당장은 필요 없다.
‘이거 먼저 하자.’
쓰이는 에너지도 기본 30만이다.
전이라면 뭐? 30만? 이러고 놀라며 프로비던스를 향해 가성비가 나쁘다며 욕을 하겠지만.
가진 자의 여유다.
수백만이 넘게 쌓인 에너지다.
-그러지 뭐.
프로비던스도 대수롭지 않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눈앞에 홀로그램 문자가 떴다.
무기 개발 프로젝트 시작.
커스터마이징 프로비던스.
‘무기 만드는 거, 내가 직접 참여는 못 해?’
못할 것도 없었다.
프로비던스의 답이 곧바로 돌아온다.
-테크룸 안쪽에 개인 무기 개발실을 열어둘게. 테크룸으로 와.
깊은 밤이다.
눈을 감은 채, 대화하던 세주가 테크룸으로 들어갔다.
프로비던스가 말한 대로다.
복도에 개인 무기 개발실 푯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프로비던스가 작은 수정을 보여준다.
-에너지를 결정화시켜 둔 거야. 아무래도 형의 응축한 노블 에너지를 견뎌야 하니까. 에너지 수정으로 토대를 잡는다.
왜 이런 걸 허락 맡느냐고 눈으로 묻자.
-에너지가 조금 추가돼. 10만 정도.
“해.”
가진 자의 여유다.
그렇게 10만이 추가되고.
“들고 다니기 불편한데, 작게 압축했다가 필요할 때 커지는 그런 기능은 없어?”
-가능은 한데, 그건 구현 기능이 들어가니까 한 30만 더 필요한데.
“해.”
역시나 가진 자의 여유다.
“두 자루씩 들고 다니기 불편한데, 너 혹시 저지 드레드 봤냐?”
-영화라면 봤지.
“그거 좋더라. 벼락 하면 벼락 형태, 침묵하면 침묵 형태.”
-80만.
“해.”
무기에 이런저런 기능이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무제한 탄창 같은 건 없냐?”
일일이 탄창 갈기가 귀찮아서 해본 말이다.
-그건 일이 좀 커지는데. 자체 에너지 플랜트를 총기 내부에 심어야 해서.
“해.”
남는 건 에너지뿐이다.
에너지 생산 공장을 축소화하고 총기 안에 심는 작업까지 추가했다.
“나 유진이 그 회복탄 쏠 때 부럽던데.”
-그건 무리야. 약물 생성이잖아. 효율도 나쁘고.
아쉽다.
“치유 드론을 쏘는 건 어때?”
레스큐 액트 모드 발동 시, 세주는 치유 드론을 만들 수 있다.
그건 날아다니는 치료 키트다.
치유 광선을 뿌리는 드론을 멀리까지 보내는 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거 가능하겠는데? 꽤 재밌겠다.
하나둘, 개조하는 재미에 프로비던스가 빠져들기 시작한 순간이다.
“양도 기술을 알아서 프로그래밍 하는 건 어때? 커브 탄 같은 걸 힘 안 들이고 쏘는 거지. 압축탄도.”
-가능하지! 나야. 프로비던스.
“내가 칼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냉병기도 만들자.”
-형, 형상 기억 합금이라고 들어봤어? 물론, 들어봤다.
-원하는 형태를 떠올리기만 하면 변하는 거야. 어때?
“굿. 역시 넌 내 소울 메이트다.”
-흥. 나 프로비던스라고, 불세출의 오버 테크놀로지! 형 무기에 내 전 기술력을 동원하겠어!
“좋다!”
신이 났다.
이래서 사람들이 밤새도록 육성 게임을 하는구나 싶다.
총기에 이런저런 기능을 붙이고 떼었다.
“가볍고 단단한 게 좋아.”
-걱정 말라고!
“부서지지는 않겠지?”
-자체 배리어는 기본! 형 블레이드 영화 봤어?
봤다. 흡혈귀랑 웨슬리 스나입스.
데이 워커라는 단어가 참 간지나는 영화다.
-주인이 아닌 자가 잡으면 칼날이 튀어나오는 거야. 그것도 에너지 블레이드가.
“오오. 최고다!”
그 외에도 섬광, 연막탄의 기능을 넣고.
생각나는 건 전부 때려 박았다.
어느새 새벽 4시였다.
이 정도로 눈이 빨개질 일은 없다.
-형, 노블 에너지를 한계까지 끌어다 써봐.
시키는 대로 무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전신을 달리는 에너지가 블랙홀에 빠지듯 어디론가 쑥쑥 잘도 빠져나간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전신의 에너지를 쭉쭉 빨아먹는 무기다.
“후아.”
힘이 쪽 빠졌다.
전신이 나른해진다.
한계까지 노블 에너지를 쓰면 막 마라톤을 뛰고 온 것처럼 숨이 차고 기운이 달렸다.
-좋아.
노블 에너지를 머금은 총기가 세주의 남색 빛으로 물든다.
-지금 형이 넣어 준 에너지를 축적해서 탄을 만들 거야. 물론 에너지 플랜트도 돌아갈 거도.
‘얼마나 걸릴까?’
-완성까지는 240시간 정도는 필요해.
열흘이다.
뿌듯한 마음에 세주는 다시 카탈로그를 살폈다.
이제 에너지를 쓸 차례다.
무기 만드는 데 너무 심력을 투자했다.
눈이 감기려고 했다.
그래도 미룰 일은 아니니.
눈에 힘을 줬다.
-뭐해?
그걸 본 프로비던스가 묻는다.
“에너지 써야지.”
-다 썼잖아.
“…응?”
-저기, 형 모은 에너지 다 때려 박음.
프로비던스의 소년 버전이 나타나 손가락으로 세주의 총을 가리킨다.
“으응?”
너무 열중했다.
“에?”
결국, 가진 에너지를 몽땅 부었다.
-스위처로 돌릴 에너지 하나까지 몽땅 넣었는데?
“야, 그걸 안 말려?”
-무슨 소리야. 중간에 내가 이건 과도하게 에너지 들어간다고 말했는데.
기억을 떠올려보자, 드문드문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까짓것 에너지 몽땅 소진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정작 전부 쏟아붓고 나니까 아까운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생겼다.
사람들이 이래서 도박에 빠지는구나.
세주는 잠시 반성하고, 잊어버렸다.
“뭐, 좋은 무기 얻었으니까 됐다.”
에너지는 먹은 만큼 제 가치를 한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세주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다 보니 열중해서 에너지를 몽땅 썼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을 거다.
-이건 내 평생의 역작이 될 거야.
그 평생이 만 2년도 안 된 놈이 잘도 저런 말을 한다.
그대로 세주는 눈을 감았다.
너무 노곤했다.
에너지를 몽땅 쓴 그였고, 곧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
-반! 안 돼!
“돼.”
평소의 자신의 말투와 똑같았다.
조금은 오만하며, 불가능 따위는 믿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목소리다.
커다란 구멍이 보이고,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
아니, 사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주변이 어떤 곳인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이런 순간을 사람들은 음경이 됐다고 표현하리라.
“다시 만나자.”
프로비던스에게 말을 하자, 우리의 기계 새끼가 렌즈에서 윤활유를 흘리려고 한다.
하지 마, 그거 보기 싫다.
-실패하면 끝이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여러 명이 된 것 같긴 하다만,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성공한다.”
과거인가, 미래인가.
치용과 유진, 인준이 보이지 않는다.
검은 홀에 떨어지기 직전, 반짝이는 렌즈가 거울처럼 얼굴을 비췄다.
두 개의 동공이 보였다.
팽과 같은 얼굴이다.
놀랄 틈도 없었다.
확하고 어둠이 눈앞을 덮었고, 주변에 빛이 회오리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다이내믹 하네.”
[대장]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는 팽의 얼굴이 보인다.
“넌 왜 그러고 있냐?”
[대장이 끙끙거려서 지금 옷을 벗고 들어갈 참이었어]
…악몽을 꿨는데 결론이 왜 그리로 가.
“나 괜찮다.”
그녀를 말리고 몸을 일으켰다.
꿈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 전생에도 너 가지고 있었나 봐.’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 없는 소리 할래?
프로비던스와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빌어먹을 미친 기계 새끼.
정신없는 꿈이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트레이닝 룸으로 부대원 호출해.”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