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 위계질서
가르간이 은하 협정을 어겼다.
‘그 가르간이?’
은하 협정 1900개를 통째로 외운, 걸어 다니는 은하 법전이라고 불리는 놈이?
[이건 콴의 도전장일까? 아니면 가르간 놈이 날 시기한 걸까?]
위계질서.
인간이란 놈들은 곧잘 그런 걸 만들었다.
지금 마스이 앞에 선 외계인, 울트라는 위계질서란 단어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자신은 8계급, 전투원.
그리고 마스이는 7계급 연구원.
콴과 메카니모스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전포고를 할 거였다면, 식민지 몇 개를 때려 부수던지.
고위층 인사 몇 명을 죽여 없앨 거다.
고작 7계급 연구원을 노려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거다.
[그렇습니까?]
대강 맞장구쳐주자, 마스이의 렌즈가 깜빡인다.
[역시 선전포고 따위는 아닐 거야. 고작 7계급 연구원 하나 잡는다고 전쟁이 날 거 였다면, 은하계가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걸까?
울트라는 마스이를 바라봤다.
렌즈의 빛이 여전히 흉흉하게 빛난다.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다.
[날 시기한 거다]
미친 소리.
[가르간 놈이 날 시기한 거야]
그러니까 제대로 미친 소리다.
가르간은 콴의 제너럴이다.
계급으로 치자면 메카니모스 2계급과 견줄만 하다.
그런 자가 왜 7계급에게 시기를 한단 말인가?
과거, 한 행성을 두고 겨뤘던 마스이와 가르간이다.
그중 한 명은 상위 계급이 됐고, 한 명은 여전히 바닥 계급이다.
시기한다고 해도 마스이가 하지, 가르간이 할 일은 없다.
[그렇습니까?]
울트라는 적절하게 맞장구를 쳐 줬다.
위계질서.
인간의 언어는 꽤 훌륭하다.
메카니모스에는 없는 단어가 존재한다.
울트라는 위계질서란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
“끝내준다!”
유진이 환호성을 지를 만도 했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이었다.
그런데 몸에 부하가 조금도 걸리지 않는다.
흔들리지도, 압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속도는 압권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동해까지 고작 10분 만에 주파했다.
“이거 정말 끝내주는데?”
인준도 감탄을 터트렸다.
-적 기체 발견.
현재 함장은 세주, 그리고 부함장은 프로비던스다.
-나한테 그냥 조종 넘기지그래?
할 줄 아는 것도 없다고, 핀잔을 주는 기계 놈을 향해 세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우주 함선의 함장은 남자의 로망이라고!’
-하아. 로망 찾다가 묫자리 찾지 마시고.
‘시끄러워.’
눈앞에 쫙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색적 시스템 가동.
함선 시스템 중 하나가 가동해 적의 위치를 파악했다.
프로비던스의 스캐닝만큼이나 훌륭하다.
하늘에 뜬, 날개달린 커다란 괴물.
바닥 속에 잠수한 원반 형태의 함선 세 척.
그뿐만 아니다.
콰우우우우.
까맣게 보일 만큼 아주 깊은 바닷속, 이상한 괴물이 있다.
-저게 해일을 일으키는 주범이야.
‘일단, 저 펄럭이는 놈부터 잡는다.’
심해에 숨은 괴물 말고도, 눈앞에 적은 많다.
적 함선을 나포에 성공해, 동력을 바꿔 아군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고작 함선 하나가 아니었다.
프로비던스는 편집증 걸린 스토커처럼 함선 내부시스템을 꼼꼼히 살폈다.
그래서 찾은 정보다.
하나, 도망간 놈은 7계급이다.
둘, 바다에서 덤비는 놈은 8계급이고.
셋, 이놈들은 전투종이라고 이종교배나 실험을 통해 이상한 생명체를 만든다.
그래서 결론은.
‘7계급, 8계급이 뭔데?’
-그건 모르지. 본래 함선의 주인이 7계급이었다는 거니까. 숫자가 낮을수록 더 상위 계급이라는데?
‘전투종은 뭔데?’
-레이퍼 같은 놈들이겠지 뭐.
정작 도움이 되는 종류는 아니지만.
세주를 포함한 셋이 주변을 둘러봤다.
도시가 산산이 부서진 게 보였다.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세주는 모드를 하나하나 살피고, 훈련하면서 깨달았다.
이모탈 엔젤스는 고작 24시간에 열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핵&슬래쉬나, 불릿 마스터라면 적 1200마리도 죽일 수 있다.
똑같은 유니크 모드지만, 가성비가 다르다.
그 말은 하나다.
프로비던스는 전투용이란 말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세주가 할 일도 뻔해졌다.
싸우고, 죽인다.
적을 격퇴한다.
다시는 쫓아올 엄두도 못 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준다.
그 대신이라고 할 순 없지만.
죽어가는 모든 이를 살릴 순 없다.
슈퍼맨이 아니니까.
대신, 적은 화끈하게 죽여준다.
‘야, 레이저 포 뭐 있다고?’
-총 다섯 가지. 이름은 일형, 이형, 삼형, 사형, 오형 이렇게 부르네.
숫자가 높을수록 강력한 힘을 갖췄다.
‘오형포 쏴.’
“이인준, 조준해!”
승무원도 각자의 역할이 있다.
-오형포 준비 완료.
원반 형태의 우주선 위쪽이다.
긴 포신이 나타났다.
앞쪽에 노란 보석을 머금은 특이한 형태의 포탑이다.
넷 모두, 포탑이 우주선과 수평으로 솟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우주선에 탑승하는 순간, 오감이 달라진다.
앞을 봐도, 뒤가 보이고.
원하지 않아도 정보가 밀려 들어와 차곡차곡 머리에 쌓인다.
흉몽 모드를 켜, 프로비던스와 하나 됐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조준 완료.”
인준의 앞에 홀로그램 조종간이 나타났다.
익숙하진 않아도, 무기란 건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인준이 조준을 마친다.
세주의 눈에도 적을 향한 조준점이 보였다.
작은 점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세주가 입을 열었다.
“쏴.”
원형 우주선 위다.
오형포 포신 앞쪽 노란 보석이 흐물흐물 녹으며, 빛처럼 변한다.
한낮에 녹아내린 사탕 같다.
녹은 사탕물 같던 노란빛이 한순간 전봇대처럼 앞으로 뻗어 나간다.
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죽이네.”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세주가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
“빌어먹을! 원군을 데려와!”
알파 팀 수장, 장광안은 깨진 선글라스를 버리고 뛰었다.
“살려주세요!”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는 순간, 몸은 이미 땅을 박차고 달렸다.
열 다섯이나 됐을까?
핏덩이 같은 남자애다.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가 다리를 짓눌렀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판이다.
콰우우!
몇 번째 해일인지, 머리 위를 덮을 만큼 큰 파도가 다시 대지를 덮친다.
“으아아아!”
광안은 들려오는 고함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양손에 쥔 채, 눈을 부릅떴다.
파도가 밀려오는 곳, 전신이 흠뻑 젖은 중년 남자가 달려온다.
전신에 잔상처가 많지만, 물에 젖었다는 건 파도를 한 번 뒤집어썼다는 것.
그 상태에서 사지 멀쩡하게 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둘 중 누굴?’
소년을 구하면 중년 남자가 죽는다.
달려오는 저 자를 구하면, 소년이 죽는다.
고민은 짧았다.
“후압.”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노블 에너지를 터트렸다.
‘파워 업!’
세주가 가르쳐 준 에너지 컨트롤 능력이다.
근육에 에너지를 갖다 부어서 순간적으로 힘을 쏟는 것!
쿠드드드!
“끄아아! 아파요!”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었다.
밑에 깔린 아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한순간 힘을 줘서 뒤로 건물 잔해를 밀어버리고, 소년의 뒷덜미를 잡았다.
“끄아!”
시끄러웠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고 정신 사나워 죽을 지경이다.
숨골을 틀어쥐고, 기절시킨 뒤.
중년 남자를 향해 달렸다.
‘스피드 업.’
노블 에너지 컨트롤 두 번째다.
에너지를 발바닥에 모아서 땅을 박찰 때마다 밀어낸다.
투쾅! 투쾅!
무지막지한 속도로 중년 남자와 가까워진다.
오른손에 소년, 왼 ㅤㅍㅑㄹ을 뻗어 중년 남자의 허리를 감는다.
그리고 바닥을 박찼다.
쾅!
“흐힉!”
놀란 남자를 돌볼 겨를도 없다.
발 밑으로 해일이 밀려온다.
이대로 떨어지면 자신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거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사이키커다.
발밑으로 넓은 판자를 허공에 날려준다.
텅! 텅!
그걸 밟고 해일이 미치지 않는 범위로 뛰었다.
판자를 박차고 내려선 곳, 부대원과 대피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곁에 자주색 그림자가 멈춘다.
베타 팀의 박태희였다.
자주색 아머를 입은 그녀의 손에도 덜렁덜렁 사람이 들려 있다.
“짜증난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광안이 그 말을 받았다.
적과 싸우기 위해 왔지만, 외계인 놈들 낯짝은 구경도 못 했다.
오니까, 이 모양이었고 재난 당한 사람들 구하기 급급했다.
“지원군 안 와?”
“연락 두절.”
적은 바다에 있다.
아니, 바닷속에도 그 위에도 떠 있다.
바닷물이 가득한 곳, 저 먼 곳이다.
허공에 한 번씩 폭풍을 일으키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놈이 떠 있다.
지금 같은 파도는 그래도 귀여울 따름이다.
이따금 한 번씩, 높은 해일이 솟는다.
그리고 저 바다 위 놈이 날갯짓하면 그 해일은 그대로 끔찍한 괴물이 되어 도시를 덮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에 흠뻑 젖은 중년 남자다.
“후.”
자신을 누가 구해줬는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것 자체에 감동한 그다.
광안은 그를 일별하고, 장내를 둘러봤다.
타이밍 좋게, 알파와 베타 팀이 도착한 건 좋았다.
해일이 밀려드는 순간, 사이키커들은 바닷물을 멈췄다.
그 장면은 정말 영화에나 나올 법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도시는 찢어발기듯, 공격당해도 사람은 많이 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과 별개로,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거다.
지금 상태로는 해답이 없다.
지원군이 와야 활로가 생길 거다.
그런데 그 지원군이 연락한 지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이 새끼들.’
알파 팀과 베타, 그리고 발해 팀 일부 인원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연락 한 번이 없는지.
속이 끓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답이 없다.
여전히 이들은 사람을 구하고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
“저격수한테 저거 좀 맞추라고 해봐.”
“저건 반세주라도 못 떨궈.”
박태희에게 말하자, 그녀가 말을 받아쳤다.
그럴 것 같다.
놈은 너무 컸고, 세주가 훈련을 맡아 준, 일부 저격병이 노리고 탄을 쐈지만.
코끼리를 개미가 무는 격이다.
스케일이 큰 적에게는 그와 비슷한 무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지원군을 기다리는 거고.
쿠우우.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사이, 기이한 소음이 들렸다.
머리 위다.
그들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원반 형태의 함선이 보였다.
“…태희야.”
“왜?”
그녀도 고개를 들고 그걸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실, 나 너 좋아한다.”
“난 아냐.”
“응. 그래서 말 안 했어.”
“그럼 지금은 왜 하는데?”
“저게 아군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여기가 무덤 같아서 하는 말이다.”
광안이 피식 웃고 말했다.
바득바득 열심히 살았다.
“후.”
호흡을 뱉고, 힘을 끌어올린다.
두 번째 코끼리다.
‘놈이 죽을 때까지 깨무는 개미가 되어봐야겠다.’
“우리의 영웅이라는 그 개자식은 뭐 하는 건데?”
반세주를 말하는 거다.
“오겠지.”
“우리 다 죽고?”
광안은 머리 위 함선을 향해 필사의 공격을 감행할지, 아니면 저 뒤 해수면 위에 떠 있는 날개 달린 놈을 노릴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사이.
콰우우우우.
머리 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광안과 태희가 반쯤 부서진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갔다.
옆에서 보자, 끔찍한 게 보였다.
기다란 포신이다.
그 앞에 노란빛이 뭉글뭉글 모이는 장면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소름 돋게 만드는 씬 이었다.
“태희야.”
“왜?”
“넌 내가 왜 싫냐?”
“그건 뙈 왜 물어?”
“죽을 땐 죽더라도 궁금하지는 말아야지.”
박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눈이 작아서.”
“…치사하게.”
광안이 그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작다.
괜히 세주가 그를 보고 단춧구멍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콰우우우우!
그리고 빛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끝이구나.
광안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싶었으나, 저런 레이저 포를 보고 반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양 손으로 눈앞을 가린 광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노란 레이저 포가 날개를 펄럭거리는 놈을 관통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 레이저 포가 바다를 가르며 저 멀리까지 뻗어 나가는 것을.
카메라 셔터를 수십 번을 눌러야 할 장관이었다.
콰우우우우!
“이런 시발!”
광안이 외쳤다.
레이저 포가 바다를 가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여파가 다시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날개를 가진 놈이 바닥에 처박혀 죽고, 레이퍼 포가 바다를 가르자 멋지고 거대한 해일이 다시 도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