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병사 반세주-105화 (105/206)

#  105

105. 포기하면 편해

파지지지지직!

녹색 우주선 전체에 전류가 흐른다.

“뭐야?”

“아, 따가!”

우주선 가까이에 있던 이들이 거리를 벌렸다.

“물러나!”

나호필이었다.

그가 외치자 곁에 머문 이들이 우르르 멀어진다.

꾸직꾸직.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주선 전체가 안으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터지는 건가?”

그럼 낭패다.

나호필은 세주가 폭탄이 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자신을 탓했다.

반세주도 사람이다.

그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순 없었다.

“도망가!”

나호필이 격하게 외친다.

“젠장! 코리안 놈이 들어가서 생긴 일이다!”

드마유의 외침도 들렸다.

물러나는 그들의 뒤로 빛이 사방으로 퍼진다.

화아악!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빛에 나호필은 고개를 돌렸다.

‘늦었나?’

여기서 만일 폭탄이 터진다면 전부 죽는다.

여기서 죽는 이들만 문제가 아닐 거다.

각국의 주 병력이 모인 자리다.

주 병력이 몰살당한 이후, 외계인 놈들의 침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일어날 갖가지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쩍!

녹색 우주선의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뿜어지는 빛이다.

“엎드려!”

누군가 외쳤다.

저 크기의 우주선이 터진다면, 엎드린다고 해도 아무 소용은 없을 거다.

그럴 바에야, 나호필은 차라리 당당히 서는 쪽을 택했다.

죽는 순간에 흉하게 엎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겁을 집어먹을 시간도 없었다.

파아아아앗.

빛이 퍼진다.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너무 밝은 빛에 눈을 감았다.

손으로 앞을 막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아.”

다리가 풀릴 것 같다.

하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다.

우주선 안쪽, 사람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아니, 이제 그 녹색 덩어리는 사라졌다.

조각 하나 없이 흔적이 사라졌다.

우주선이 있던 곳에 남은 건, 사람뿐이다.

“여, 내가 우주선 부숴 먹었나 보다.”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말을 하는 남자, 반세주다.

“하하.”

나호필은 입만 웃었다.

그리고 타국에서 파견 나온 이들을 봤다.

모두 얼이 빠진 모습이다.

그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드마유다.

“저 미친 새끼가, 그게 네 개인 소유인 줄 아는 거냐!”

거센 분노와 함께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선다.

“네놈! 네놈!”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드마유가 드잡이질이라도 할 것처럼 세주에게 달려들었다.

팍하고 뛰어드는 솜씨가 일품이다.

퍽!

하지만 드마유가 뭘 하기도 전에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한 방에 그의 얼굴을 후려친다.

휘리릭!

공중에서 360도 회전한 드마유가 철퍼덕 떨어졌다.

“어흥!”

치용이 그 앞에서 주먹을 거둔다.

그리고 세주 옆에 선다.

“정당방위네.”

세주가 중얼거렸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이탈리아 군이다.

아니, 타국 군인들도 매한가지다.

“정당방위지?”

세주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뒤에서 인준이 아머를 입은 채, 그들을 노려본다.

인상만큼은 치용 못지않은 남자다.

유진은 옆에서 실실 웃고 있다.

여자를 홀리는 그 미소가 지금은 꽤 효과적인 협박을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정당방위 맞지?”

그 앞에서 세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네.”

“정당방위네.”

타국 군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인다.

“드마유가 잘못했네.”

“맞아.”

세주의 활약을 지켜본 이들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묘비 몇백 개쯤은 더 만들었을 거다.

“자, 그럼 우주선은 사라졌고, 모두 돌아가자고.”

세주가 태연하게 말했다.

가장 큰 전리품이 뿅 하고 사라졌다.

다들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나호필이 세주 곁에 바짝 다가와 물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진심을 다해 세주가 말했다.

나호필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3년 만에 연락해 옥장판을 파는 초등학교 동창을 보는 눈빛이다.

“진짠데.”

세주가 중얼거렸다.

“그것보다 급한 일이 생겼다.”

“급한 일?”

“제주도에 외계인 사절단이 와 있다.”

나호필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들을 만한 이들은 다 들었을 거다.

여기에는 적어도 안나 휴이츠, 아비 크헨 같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 있다.

“미합중국도 와 있다.”

알버트 크로이츠가 어느새 다가와 말했다.

이 할배 그렇게 안 봤는데, 대화를 엿듣는 버릇이 있나?

알버트가 세주에게 성큼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세주를 노려봤다.

우주선 부숴먹은 거, 따지려나?

핑계를 고민하던 세주에게 알버트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연다.

목소리가 은은하게 떨렸다.

“감사를.”

정중함을 넘어서는 극도의 예를 갖춘 모습이다.

그는 그렇게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났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한 그대로다.

델 크로이츠.

아들이라고 했고, 그 복수를 대신 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사령관의 자리를 가져왔다.

주변을 둘러봤다.

초토화시킨 적들이다.

복수, 그 이상이 됐을 거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주가 그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다.

더 이상의 위로는 할 수 없었다.

알버트를 뒤로 하고 세주가 입을 연다.

“가자.”

그의 말에 한국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본국으로 귀환해야 해. 당장.”

나호필이 말했다.

“그래.”

‘브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프로비던스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어깨 둥지를 튼 프로비던스가 보이지 않았다.

세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작고 요망한 기계가 보이지 않았다.

‘브로?’

여전히 대답이 없다.

‘장난치지 마라.’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유진이 다가와 묻는다.

“아니, 아무것도.”

“나라 잃은 장수 같은 표정인데요.”

설마.

그 싸가지 없는 기계 새끼 하나 없다고 그럴까?

“애인한테 영문도 모르고 차인 직후의 표정 같기도 하네요.”

비유 좀 그만해줄래?

“아무것도 아냐.”

세주는 입을 열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프로비던스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첫 번째 가설, 융합 실패로 폭발.

우주선이 쪼그라들었고, 세주는 도망갈 수 없었다.

입구가 완벽하게 막혔다.

-괜찮을 거야.

프로비던스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걸 믿었다.

그리고 종이가 구겨지듯 안쪽으로 쪼그라드는 우주선 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부셨고, 눈을 감았다.

그 뒤부터 프로비던스는 사라졌다.

생각보다 뒤가 찝찝하다.

화장실 다녀오고 뒤를 안 닦은 기분이다.

두 번째 가설.

이 새끼가 지금 신나서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다.

그럴 수 있다.

프로비던스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

세주는 그 뒤부터 프로비던스를 부르지 않았다.

고집 싸움이다.

누가 먼저 말 거나 해보자 이거다.

“똥 마렵나?”

나호필이 묻는다.

“아니.”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다.

“표정 좀 풀어.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절단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제주도까지 온 둘이다.

물론 호위 병력도 끌고 왔다.

치용, 인준, 유진까지 함께다.

“형님, 정말 뭔 일 있습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다.

세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치용을 바라봤다.

“…내 걱정하는 거냐?”

“거, 뭐, 표정이 안 좋습니다.”

최악이다.

저 무디고 곰 같은 새끼가 걱정할 정도로 표정이 안 좋다는 거다.

‘프로비던스가 없어서?’

최악이다. 최악.

인정할 수 없다.

그 싸가지 없는 기계가 없어도 상관없다.

편리한 이동형 창고가 하나 없어진 것뿐이다.

“아무 일 없어.”

“무지 화난 표정인데, 혹시 그 사절단 놈 마음에 안 들면 말만 하십쇼.”

치용이 주먹을 흔든다.

“김치용 대령은 들어오지 마.”

나호필이 그걸 보고 바로 그의 입장을 제지했다.

“필승!”

통제구역.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곳이다.

쏴아, 철썩!

절벽 밑으로 파도가 치는 곳.

나호필과 세주가 앞장섰다.

“대기해.”

세주는 부대원 전부를 놔두고 들어갔다.

긴 천을 둘러쓴 놈이다.

“나흘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셨다.”

“배 안고파?”

“나 말고.”

나호필이 세주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아.”

외계 사절단을 말한 거다.

네모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의자도 보였다.

햇살이 뜨거웠다.

날씨가 참 더웠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어도 더울 판에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덥다.

“안녕하십니까.”

나호필이 다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협의.]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세주는 나호필의 호위로 참여한 입장이다.

그래서 그의 뒤에 섰다.

근데 저 새끼는 덥지도 않나.

답답한 마음에 한 마디 건넸다.

“더운데 망토 벗지?”

“어이. 반세주.”

나호필이 그런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세주는 턱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망토 벗으라고, 안 덥냐?”

[이해 불가.]

“못 알아듣는 척하네. 이거 약은 새끼네.”

“반세주!”

나호필이 일어나 세주를 마주 봤다.

“귀청 떨어지겠네.”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일까? 지금 자신이 한 짓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답했다.

“시비?”

나호필의 표정이 무너진다.

이 또라이를 왜 여기에 데려왔을까 하는 표정을 짓는다.

입을 떡하니 벌린 나호필이 이내 입을 닫곤, 평정을 되찾은 뒤 입을 열었다.

“최소한 예의라도 지켜.”

나호필이 넋이 나가 말했다.

“아니, 기다려. 입 다물어. 말하지 마.”

동공이 풀리다 만 나호필이다.

정신줄을 부여잡은 그가 세주를 말렸다.

“에이, 나한테 맡겨 둬. 내가 또 어릴 때 꿈이 외교관이었어.”

“…그걸 믿으라고?”

또 사기꾼을 보는 표정이다.

못 믿으면 말고.

나호필을 옆으로 민 세주가 그의 망토에 손을 뻗었다.

퉁.

그러자 망토 안에서 회백색의 손이 튀어나와 세주의 손을 쳤다.

“너 쳤냐?”

아니, 누가 봐도 친 건 아니다.

[인간, 예의를 갖춰라.]

예의는 무슨.

“너, 우리 말 잘하지? 못하는 척하는 거지? 뒤질래?”

세주가 빙그레 웃었다.

나호필은 세주의 미소를 보고 확신했다.

이 자식은 기필코 시비를 걸고 말 거라고.

애초에 그런 목적을 갖고 온 놈이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후다.

‘난 저놈을 막을 수 있을까?’

무리다.

마빡 튕기기로 알파 팀 사이키커를 기절시켰다는 첩보를 들은 적이 있다.

그보다 못한 나호필은 세주가 손가락으로 때려도 반죽음이다.

새삼 저 자식이 얼마나 밸런스에 맞지 않는 괴물인지 알 수 있었다.

‘말로 말려 보자.’

“나한테 맡겨라. 내가 이런 자리에 전문가다.”

머리 쓰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정보를 토대로 사실을 끌어내는 것.

그게 나호필의 일이다.

진지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세주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싫어.”

이 새끼가.

반세주는 아직 준장이다.

자신은 소장.

그러니까 아직은 계급도 자기가 위다.

근데 아마존 이후로 서슴없이 반말을 뱉는다.

싸가지 없는 새끼.

“이봐. 날 못 믿나?”

“응.”

생각도 안 하고 답한다.

반대편 외계인 사절단을 바라봤다.

망토를 둘러쓰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나호필은 신중하게 모든 가능성을 가늠해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거지?”

“응.”

세주의 대답이 또 0.1초 만에 나온다.

결론 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팝콘이랑 콜라나 먹으면서 둘의 말싸움을 지켜봐야 한다.

나호필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대국적인 측면에서 외계인 사절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죽은 이와 일방적인 침공, 그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는 외계인.

뭐, 이 외계인이 침공한 놈들과는 다른 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입장에서야 그놈이 그놈이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몇 대 때리고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

결국, 나호필도 포기다.

“야, 옷 벗으라고.”

그에 맞춰 세주의 협박성 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외계인이 여자라면 성추행으로 잡혀갈 만한 대사다.

포기하니까 편했다.

의자를 질질 끌고 온 나호필은 거기에 앉아 선글라스를 꼈다.

햇빛이 너무 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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