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 폼
김후경은 갑자기 나타난 적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거인이 죽고 그 밑에서 내달리는 놈을 확인한 그녀다.
거인의 머리가 터진 순간, 그녀는 비무장지대가 떠올랐다.
반세주와 함께 싸웠던 그 나날들.
“하압!”
그녀의 온몸에 푸른빛이 터져 나온다.
순간적인 깨달음에 노블 에너지의 화력이 달라진다.
화륵.
가볍게 타오르는 전신의 푸른빛이다.
끝없는 훈련과 실전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번 업 상태로 들어선 그녀가 칼을 내리친다.
머리가 없는 괴물이다.
가슴에 눈, 코, 입이 박힌 그런 괴물.
펑!
순식간이었다.
대검을 내려친 순간, 빛이 번쩍였고 검이 부러졌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보였고, 배가 뜨끔했다.
그리고 통증이 복부를 중심으로 전신으로 퍼진다.
신음을 참은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배에 구멍이 났나?’
이 정도 충격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날아가면서 죽음을 떠올렸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셋이 떠올랐다.
산탄총을 쏘던 흑인, 적의 뒤에서 덮치는 작은 여군, 자신 뒤에 있던 사이키커.
도망치라고 외치고 싶었다.
놈에게 덤비면 안 된다고.
하지만 숨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폐가 뚫렸나?’
갖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리고 후경은 자신을 가로막는 등을 봤다.
‘응?’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등판이다.
“커억!”
그제야 기침이 터졌다.
“도, 도망.”
외침은 아직 무리다.
배를 매만졌다.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통증은 그대로였지만, 배는 멀쩡했다.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듦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오랜만이네?”
김치용이다.
그리고 후경은 구멍을 봤다.
적어도 손가락 두 개는 들어갈 구멍이다.
치용의 등에 달린 검붉은 구멍이다.
피가 흘러 바깥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배에 구멍이 뚫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끼어든 그림자, 그게 저 남자다.
그러니까 자신 대신에 놈의 일격을 몸으로 받은 거다.
“전부 비켜.”
치용의 등, 뚫린 곳에서 피가 주르륵 흐른다.
“쿨럭, 무리야!”
후경이 기침을 뱉고 외쳤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하지만 치용은 그대로 손을 들어 그녀를 뒤로 밀쳤다.
‘형님이 뭐라고 했더라?’
승률은 50대 50이다.
두 번 싸우면 한 번은 질 거다.
‘그리고 지면 죽는다고 했지.’
무조건 이겨야 했다.
거기에 뒤에서 여자가 지켜보고 있다.
아니, 아군 모두가 바라보고 있다.
“네가 죽으면 모두가 지는 거다.”
어제, 작전을 설명하며 치용에게 말했다.
‘거, 형님. 부담 주네.’
배에 구멍이 뚫리니 흥분도 싹 하니 가라앉는다.
“바보, 도망가.”
후경이 몸을 일으킨다.
급해서 몸으로 막았고, 덕분에 배에 구멍이 뚫렸다.
대신 저 여자가 살았다.
침공한 우주선 동체를 뜯어 만든 아머다.
그걸 뚫는 위력이다.
“구경이나 해.”
승률 50%.
지면 죽는 싸움.
신난다.
“크흐흐흐.”
피가 멎기 시작했다.
-혈액 손실, 아드레날린 주입. 상처 부위 응고.
아머에서 들리는 음성이다.
치용이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쳤다.
퉁.
웅!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50cm 정도의 막대기가 나온다.
프로비던스의 전이기술이다.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내는 기술을 아머에 넣었다.
앞이 뭉뚝한 마치 도끼날이 없는 자루 같은 막대기다.
‘이기고 싶다면 뭐라고 했더라?’
본능만으로 싸우는 치용에게 세주는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머리 써서 폼 잡아.
정말 딱 맞는 조언이다.
뒤에는 마음 가는 여자가 있고, 앞에는 적이 있다.
우우웅!
거기에 세주가 준 아머와 무기가 함께다.
막대 끝에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도끼날을 만든다.
노블 에너지를 삼켜서 형태를 이루는 무기다.
붉은 막대기를 모티브로 만든 메이드 인 프로비던스의 김치용 전용 무기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붉은 막대기 끝도 도끼날로 바뀐다.
‘머리를 쓰자.’
자신은 세주와 훈련을 거듭했다.
칼보다 도끼와 같은 파괴력이 큰 무기가 유리할 거라고 해서 바꿨다.
“트레이.”
놈이 중얼거린다.
미친 새끼,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계속 지껄인다.
치용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팟!
순간 놈이 주먹을 휘두른다.
주먹 끝에 송곳이 튀어나와 있다.
치용의 배를 뚫은 무기다.
“후압!”
쩡!
일격을 튕겨내자, 놈이 재차 주먹을 뻗는다.
슝!
간신히 고개를 꺾어 피했다.
그러자 놈이 미들 킥을 날린다.
맞으면 허리 따위는 그대로 동강 날 것 같다.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다리 중간에 솟은 칼날이 아머를 스쳤다.
스걱!
아머가 얇게 베였다.
‘어지간해서는 안 부서진다면서.’
그 어지간함을 넘어서는 상대라서 문제다.
쩡!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치용은 붉은 도끼를 들어 공격을 받아치고는, 동시에 왼손의 푸른 도끼를 휘둘렀다.
슝!
놈이 가볍게 스웨이 백을 하며 피한다.
그리고 피한 직후, 고무줄이라도 된 것처럼 앞으로 퉁하고 쏘아져 온다.
퍽!
송곳이 솟은 주먹이다.
몸을 비틀었지만, 어깨에 맞았다.
핏방울이 허공에 흩날렸다.
퉁!
다음 공격은 붉은 도끼의 면 부분으로 막았다.
연속으로 날아오는 무릎은 간신히 고개를 젖혀 피한다.
놈이 무릎을 올린 채로 발을 올려 찬다.
파각!
얼굴에 쓴 아머가 맞아서 찢어져 날아갔다.
발끝에도 칼날이 솟아있다.
전신에 칼날이 솟는 괴물이다.
“혼자서는 무리야!”
후경이 외친다.
치용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었다.
그는 도끼를 엑스 자 모양으로 교차한 뒤 크게 휘둘렀다.
쓩!
맞으면 어디 한 군데는 그대로 자를 기세지만.
놈은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피했다.
덩치에 피해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이다.
물러난 것만큼 빠르게 다가와 팔을 쭉쭉 뻗는다.
왼팔을 앞으로 들이민 치용이다.
가벼운 잽이지만 손등에 솟은 송곳이 푹푹하고 팔뚝에 구멍을 송송 뚫었다.
“이제 됐다.”
치용이 읊조림과 동시에 세 걸음을 물러났다.
후경이 우뚝하고 멈췄다.
끼어들려던 그녀지만,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치용의 전신에서 무서운 기세가 올라왔다.
풀 업 상태의 에너지가 타오른다.
화르륵.
엉겁결에 썼던 후경의 번 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경이나 하라고 했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는다.
이제야 좀 익숙해졌다.
세주와 대련을 한 건 고작 하루다.
갑자기 바꾼 무기가 이제 손에 익는다.
“너, 죽을 거다”
치용이 웃으며 입을 연다.
“트레이.”
놈도 뭐라 답을 한다.
티디디딩.
그러더니 양팔에 칼날이 빼곡하게 솟는다.
어느새 아군도 적군도 간섭하지 못하는 싸움이 됐다.
모두가 멈춘 상태에서 치용이 앞으로 달렸다.
쾅!
땅에 발자국이 남는다.
강력한 돌진과 함께 푸른빛이 허공을 가른다.
전보다 배는 커진 빛이다.
큰 칼 기술을 그대로 도끼에 적용했다.
거대한 푸른 도끼날이 허공을 가른다.
후앙!
일격에 폭풍이라도 치는 듯 바람이 세차가 주변을 덮친다.
놈은 몸을 숙여 피하고 앞으로 태클을 하듯 달려온다.
전신이 칼날인 놈이다.
태클 자체로 위협적인 공격이다.
치용은 피하지 않았다.
“빡대가리 새끼.”
동시에 오른손에 든 붉은 도끼를 앞으로 땅과 수평이 되게 든다.
‘늘어나라.’
속으로 읊조리자.
붉은 날이 형태를 바꾸며 앞쪽으로 뻗는다.
슝!
놈이 기겁하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치용은 그대로 늘어 난 칼날을 옆으로 그었다.
오른 팔뚝 근육이 꾸직꾸직하며 비명을 지른다.
다친 어깨와 복부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도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콰앙!
놈이 양팔을 교차해 결국 칼날을 막았다.
그리고 그사이 치용은 붉은 작대기를 놔버렸다.
대신 자신의 푸른 도끼를 움켜쥔다.
양손에 움켜쥔 채, 위로 뻗는다.
푸퓨북!
구멍 뚫린 왼 팔뚝에서 피가 솟았다.
화르르륵!
그리고 도끼날 자체가 불처럼 타오른다.
큰 칼 이후, 새로운 기술이다.
불타는 날.
이라고 이름 붙였더니, 세주가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인준과 유진은 둘의 작명 센스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다만,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꽝!
도끼날이 그대로 놈을 내리쳤다.
푸와악!
두 쪽으로 쪼개지는 놈이다.
갈린 부분이 불에 탄 듯 티딕티딕 소리가 난다.
쩍하고 갈라진 놈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진다.
치용의 전신에서 타오르던 빛이 스러졌다.
“후아.”
숨을 내뱉은 치용이 하늘을 향해 외쳤다.
“우레아아아아!”
후경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토했다.
“미쳤어.”
“크레이지!”
“크레이지 몬스터!”
지켜보던 이들의 환호가 울렸다.
*
-형, 승률 50%라는데 그냥 보내도 돼?
치용이 가자마자 묻는다.
세주는 동료를 절대 죽을 곳으로 보낼 사람이 아니다.
이제까지 봐왔던 그는 그랬다.
만일 필요하다고 하면 자신이 직접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치용을 가뿐하게 보낸다.
‘응. 내 계산으로는 90% 이상 치용이 이겨.’
-…내 계산을 무시해?
‘응. 무시해.’
-내 칼큐레이팅 모드는 완벽해.
‘그래. 완벽한 대신 인간의 폼 잡고 싶은 욕구는 계산 못 하지.’
-뭐?
‘죽으면 폼이 안 나니까. 치용은 안 죽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세주는 그 뒤로 치용을 무시하고 지휘에 전념했다.
꽝!
폭음이 울리며 전면 부대가 멈춘다.
치용과 놈의 격전이다.
마지막 치용이 불타는 날을 내리치는 장면까지 전부 렌즈에 담은 프로비던스다.
-놀랐어.
솔직한 감탄이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다.
프로비던스의 렌즈가 새로운 적을 찾았다.
헬로우란 놈이다.
‘저 자식이 대장일 거다.’
이상한 갑주를 덕지덕지 입은 놈이다.
세주가 오른손을 뻗었다.
‘선물 돌려줄 차례다.’
우웅.
놈이 던졌던 삼지창이다.
전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창이다.
그걸 쥔 세주가 앞을 겨눴다.
“헬로우다!”
좌측 앞에 나온 놈을 보고 사람들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지른다.
놈을 향해 울렁 하며 대기가 흔들린다.
염동력이다.
누군가 놈을 향해 힘을 썼다.
하지만 퉁하고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손짓에 염동력이 튕긴다.
재수 없는 놈이, 멋들어진 포즈를 취한다.
오만하고 거만하다.
폼 잡지 마라.
세주가 창을 들은 오른손을 뒤로 당긴다.
‘완력.’
검둥이 아머의 능력 중 하나다.
쭈아아악.
아머가 피부에 밀착되며 근육 사이를 파고든다.
근육 보강, 즉 완력을, 지금보다 더 큰 힘을 내도록 돕는 능력이다.
세주는 창을 뒤로 당긴 채 몸을 꽈배기처럼 꼬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대로 앞으로 왼발을 디디며 오른팔을 앞으로 뻗는다.
손끝에서 창이 떠날 때까지 온 힘을 다한다.
근육 한 올의 힘까지 몽땅 쏟아 부은 투창이다.
쐐액!
무서운 속도로 창이 놈을 향해 날아간다.
정확하게 놈의 미간을 향해서다.
이 순간에도 조준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발군이다.
쩌어어엉!
놈은 그 창을 맨손으로 받아냈다.
드드드드!
몸은 뒤로 밀려나지만, 그래도 창에 꿰이지 않았다.
솔직해지자.
‘저 새끼 저거 괴물이네.’
던진 창 못 잡을 줄 알았다.
최소한 피하기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저걸 공중에서 잡아챈다.
괴물 새끼다.
“감탄이 절로 나오네.”
혼잣말을 뱉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순간이다.
놈이 잡은 창이 터진다.
뻐-엉!
엄청난 폭발이다.
하루 밤낮 열심히 만든 접착 폭탄을 두루두루 감아둔 창이다.
그 위로 배색까지 해서 속여 먹었다.
‘자, 이건 어떠냐?’
혹시나 놈이 잡아채면 준비한 선물이다.
폭발 덕에 틈이 생겼다.
아군이 부리나케 뒤로 물러났다.
후아아악!
폭발의 후폭풍이 주변에 몰아친다.
부러진 나무가 허공을 날아가 바닥에 쿵하고 떨어진다.
파사사삭.
바닥이 까맣게 죽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놈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고 목소리가 들린다.
“H.E.L.L.O.”
놈이 멀쩡하게 서 있다.
‘독한 놈이네.’
-말해 뭐해?
우둑.
그럼 정말 싫은 일을 할 차례다.
‘에효, 내 생에 이런 짓을 할 줄이냐?’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제에엔장.’
술자리에서 게임 하다가 걸려서 남자랑 둘이 딥키스를 하는 기분이다.
‘모드 온 악몽.’
훙.
프로비던스가 다시 허공에 나타난다.
남자랑 둘이 딥키스를 하는 걸로 인류를 구해낼 수 있다면 싼 거겠지.
-후,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네.
심장도 없는 새끼가 누구 놀리나.
슝.
그 사이다.
황금빛을 뿜는 여자가 달려 나간다.
안나 휴이츠다.
그녀가 헬로우에게 덤볐다.
“어어?”
쩌정!
창이 없어도 놈은 무서웠다.
팔로 휘둘러 안나를 치고 밀어낸다.
안나는 분전했지만.
-5초 뒤 죽겠다.
‘광선포 쏴!’
급하다. 저 여자가 죽도록 구경할 수 없는 노릇이다.
파앙!
빛줄기가 놈을 향해 꽂힌다.
“안나! 물러나!”
세주가 외치며 앞으로 달렸다.
오버 페이스 모드다.
바람처럼 달린다.
그리고 놈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도 싸운다.”
옆에서 안나가 기계처럼 읊조렸다.
입가에 피가 흘렀다.
이미 중상인 것 같은데.
“끼어들 틈도 없을 거야.”
세주가 조용히 말하고 프로비던스를 향해 말했다.
‘모드 온.’
악몽 모드는 레어 모드다.
그 위로 유니크 모드도 있다.
남은 에너지 820만 중 태반을 소모했다.
‘흉몽.’
순간 프로비던스가 빛을 내며 세주에게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