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 저격병
쩡!
치용의 칼과 놈의 팔뚝이 부딪친다.
충격에 서로 반대편으로 튕겨 나간다.
“크앙!”
치용의 커다란 몸이 날쌘 고양이처럼 움직인다.
큰 칼이다.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놈의 머리 위부터 떨어진다.
아니, 머리가 없으니 목 위부터다.
팍!
‘저 자식도 사기캐야.’
치용도 곰 같은 덩치로 빠르다지만, 놈도 마찬가지다.
몸을 옆으로 비트는 것만으로 칼날을 피한다.
땅을 헤집은 푸른 칼날을 옆으로 휘돌리는 치용이다.
파캉!
놈이 팔을 휘둘러 그걸 튕겨냈다.
쩍! 쩡! 팡!
연신 소음이 터진다.
그 사이 부대원 모두가 달렸다.
황금빛을 뿌리는 안나가 선두다.
충분히 빠져나가겠다 싶다.
벼락과 침묵을 인벤토리에 넣고, 손을 내밀었다.
-어쩌라고?
‘눈치 없는 자식, 칼 꺼내.’
웅.
대한민국 육군 제식 장비 중 하나다.
두꺼운 칼날의 정글도가 나온다.
“쏴 버릴까?”
인준이 자신의 기관총을 치용과 놈을 향해 겨누며 묻는다.
“아니.”
부대원이 빠져나가는 게 보인다.
-48초 이내에 이 장소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저것들한테 먹힌다.
뒤에는 아직도 땅콩과 칼날 두더지가 벌떼처럼 몰려온다.
저출산 시대에 참으로 열심히도 출산하는지, 아니면 외계인 놈들의 출산 장려 정책이 기가 막히게 좋은 건지.
많이도 몰려온다.
죽여도 끝이 없다.
뒤를 보고 치용과 놈의 접전을 본다.
저대로 두면 죽는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곰탱이 버리고 토끼는 거야.
‘가능한 방법만 말해.’
듣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시간 쓰지 말고.
이제 43초다.
-하던 대로 해.
‘오케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게 이제까지 하던 짓이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백도어 열어.
적절한 조언이다.
‘모드 온 오버페이스, 인파이터.’
한 번 했던 짓이다.
핵&슬래쉬 모드를 뒷문으로 여는 짓이다.
끝나고 나며 피도 토하고 몸도 아프고 노블 패스도 시큰거릴 테지만.
치용을 죽게 둘 순 없다.
탕!
세주가 땅을 박찬다.
그의 몸이 빛살이 되어 치용과 싸우는 놈을 향해 꽂혔다.
*
펑!
뒤에서 폭음이 들린다.
안나는 강변에 다다랐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반세주는?’
그녀는 순간 속도를 줄이고 몸을 뒤로 돌렸다.
치용이 적의 괴수와 맞붙는 것까지는 봤다.
놈을 상대하고 있는 거다.
‘죽을 거야.’
보기만 해도 끔찍한 놈이다.
거기에 달려든 치용의 용기에 그녀는 내심 감탄했다.
“가면 안 돼!”
맥폴이다.
무시하고 뒤를 향해 뛰려는 순간이다.
“튀어!”
사나운 인상에 남자다.
이인준이란 이름의 반세주의 부대원이었다.
그가 어깨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들쳐 매고 달린다.
그 뒤로 맥폴 만큼이나 잘 생긴 남자다.
유진은 세주를 업고 있었다.
쾅!
마지막 그 뒤를 따라오는 놈을 봤을 때 안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뛰어나갔다.
어깨에서 녹색 피를 주르륵 흘리며 쫓아오는 놈이다.
“레에!”
기합인지, 고함인지.
알 바 아니다.
“흡.”
전신에 힘을 다리와 어깨에 모은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린 채, 상체를 숙였다.
펑!
땅을 박찬 그녀의 몸이 사라진다.
있는 힘껏 어깨로 놈과 부딪친다.
쩌엉!
굉음이 울렸다.
대가기 짜르르 울리고.
“쿨럭!”
안나는 피를 토했다.
대신 놈이 뒤로 밀려난다.
화르르륵!
“물러나!”
그리고 그 위로 맥폴이 미친 듯이 화염을 뿌린다.
불길이 사방을 덮었다.
안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물러났다.
그녀는 방금 한 번 부딪친 걸로 깨달았다.
다음에 저놈을 만나면 죽는 건 자신일 거라고.
이제껏 상대했던 어떤 놈들보다 무서웠다.
뒤로 물러나니, 놈이 더 쫓지 않았다.
강을 건너 뒤를 돌아봤다.
햇살이 전장을 비췄다.
안나는 무표정하게 그 참혹한 곳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늘에 기괴한 놈들이 떠다녔고, 땅 위에는 적들뿐이었다.
녹색의 커다란 알과 아군의 군복을 입고 좀비처럼 서 있는 이들도 보였다.
본토에서 겪었던 수많은 싸움과 형태변환자로 인한 백악관 전복 사건.
“이게 본편이구나.”
안나가 중얼거렸다.
그동안 겪은 싸움은 우스울 정도다.
그녀의 뒤로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고작 반나절이다.
하루도 되지 않아, 일본의 타시마츠와 중국의 자오 쉰이 죽었다.
세계 최강의 염동력자라고 불리던 남자, 타시마츠 ㅤㅅㅠㄴ.
그는 전장에 나서지도 않았다.
강을 건너자마자다.
어디선가 삼지창이 날아왔다.
퍽하고 몸을 꿰뚫린 채 절명했다.
허무했다.
자오 쉰은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독특한 능력자였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혼자서 적 부대 하나를 몰살시키는 대량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
자오 쉰은 평소처럼 적진을 향해 돌진했고.
그는 갑자기 바닥에서 솟은 시신에 놀랐다.
시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좀비처럼 살아났다.
꽝.
그리고 폭음이 터졌다.
자오 쉰의 시체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인류연합군.
전 세계의 특수부대가 다 모였다.
그런데도 이 모양이다.
강줄기 너머의 적은 개미지옥처럼 아군을 잡아먹고, 타개책은 없다.
“장군님!”
작전지휘부로 정한 천막을 누군가 거칠게 들춘다.
부관이었다.
알버트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두두두!
“죽여!”
티디딩!
가장 골치 아픈 놈들이었다.
하늘을 날며 후방을 공격하는 적의 공중 요격 부대다.
슈우웅!
전투기와 헬기가 공중에 뜬다.
“누가 전투기 출격시켰지?”
“중국 쪽입니다.”
멍청한 짓을 했다.
슈웅!
꽝!
머리 위에서 폭격이 터진다.
하지만 미사일을 맞았다고 생각한 놈이 그대로 폭연을 뚫고 나온다.
그리고 전투기를 향해 날아와 그대로 돌격해서 뚫어버린다.
퉁. 펑!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놈들을 죽일 수 있는 건 극소수, 노블 에너지를 다루는 일부의 인간들뿐이다.
탄환도, 미사일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후방까지 날아온다.
웽!
후방까지 날아온 놈들이 슈퍼에서 과자를 집어가듯, 인간을 낚아채 간다.
최악이다.
“안나는.”
“이제 합류할 겁니다.”
안나와 맥폴의 합류가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지금은 사적인 감정을 섞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연합군의 사령관이다.
안나는 30분도 되지 않아 나타났다.
둘은 델 크로이츠의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무서운 놈이 있습니다.”
안나는 자신이 봤던 커다란 덩치의 괴물에 관해 설명했다.
알버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런 괴물이 적어도 셋은 더 있다.”
그리고 전장 너머를 가리킨다.
“강물 안쪽에 있는 칼날 가오리, 인간 폭탄을 제조하는 그린밤.”
강가에 바로 자리 잡은 커다란 녹색 구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좀비처럼 선 이들도.
“그리고 헬로우란 놈이다.”
“헬로우 말입니까?”
“투박한 발음으로 헬로우라고 인사해서 다들 그렇게 부르지.”
알버트는 잠시 안나를 놔두고 전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이 넷.’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후방이다.
보급과 휴식을 해야 할 곳에, 적의 공중 요격부대가 툭하면 습격한다.
덕분에 전방에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방의 병력을 거둘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
끼이이이익! 꽝!
“꺄아아악!”
차에 치인 작은 몸이 날아가 땅에 퍽하고 떨어져 구른다.
흔한 여름의 어느 날이다.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비가 와서 차가 미끄러졌다.
차도와 인도를 나누는 경계선이 잊히지 않는다.
그 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 길로 걷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조금 더 빨랐다면.
이때 부터였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느리다는 걸 안게.
투두두둑!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슈퍼맨을 흉내 내며 망토를 두른 채였다.
평소에 매일 보던 도로, 매일 보던 길거리.
망토를 두른 어깨를 때리는 빗줄기가 기억난다.
비명과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셨다.
며칠을 쉬지 않고 우셨다.
그 눈물을 잊을 리가 없다.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그거 이제 벗어라.”
누군가 망토를 벗기려 했다.
그 손을 콱 깨물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고모였던가, 이모였던가.
모르겠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어깨를 때리던 빗줄기.
매일 보던 동네의 거리.
2차선 도로와 매고 있던 망토.
그리고 사진.
그 날 넷이었던 가족은 셋이 됐다.
장난삼아 맨 망토를 일 년을 풀지 않았다.
슈퍼맨이 되고 싶었다.
그 망토를 언제 풀었더라?
아, 그 사탕.
사탕을 먹고 난 후다.
그러니까 다리가 부러지고 사탕을 먹고 난 후, 망토를 풀어서 태웠다.
“아들, 이제 슈퍼맨 안 하니?”
“아니, 할 건데.”
“그럼 망토는 왜 태워?”
“망토가 없어도 슈퍼맨 될 수 있어.”
그때 왜 그랬지?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믿었다.
“그래. 아들, 슈퍼맨 해.”
엄마가 와서 그런 자신을 껴안았다.
그제야 눈물이 났고, 그날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카키색 천이 보였다.
‘천막이네.’
-용케 살았지?
‘응.’
정말 용케 살았다.
핵&슬래쉬 모드는 고작 20초도 되지 않아서 꺼졌다.
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인준이 남은 백린탄을 던졌다.
그리고 냅다 뛰었다.
“진짜 죽을 뻔했네.”
치용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게 기억난다.
정말 몽땅 죽을 뻔했다.
몸을 일으켰다.
-몸 상태는 평소의 20% 미만. 일시적으로 모드 발동 금지.
딱딱하게도 말한다.
-무리할 게 뻔하니까.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 권해.
말을 들으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으으으.”
오른팔에 흰 완장을 찬 남자다.
의무 장교일 거다.
그가 한 여자의 눈을 감겨줬다.
“사망시각, 11시 30분.”
뜨거운 날씨다.
햇살도 그렇고.
투두두둑.
비가 조금씩 내렸다.
정말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다.
의무대, 즉 병원을 겸하는 천막이었다.
세주의 상태는 그만큼 중상이었다.
하지만 다친 이는 차고 넘쳤다.
천막에서 나온 그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세주는 걸었다.
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화약의 매캐한 냄새와 비명, 폭음이 가까워진다.
인벤토리에서 군복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노블 패스는 누가 쥐어뜯은 것처럼 아팠고.
만년 운동 부족 회사원이 전날 한라산 등반이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아프다.
거기에 꿈 덕택인지, 두통까지 느껴진다.
덕분에 옷을 갈아입는 데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전장이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여기 탄약이다! 부상자는 전부 최후방으로 보내!”
“정신 안 차려!”
난장판이다.
‘뭐 이렇게 난잡해?’
-후방에 습격이라도 당했나 본데.
“너 뭐야?”
머리를 짧게 깍은 금발의 남자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을 닮았다.
신병으로 들어온 거로 보였나 보다.
오면서 깨끗한 군복으로 갈아입었으니까.
멀뚱하게 서 있자.
“젠장, 머리 숙여!”
웽!
그 순간이다.
머리 위에서 기묘한 소음이 들리더니, 긴 팔과 다리를 가진 괴물이 보였다.
그리고 밑으로 쇄도해, 인간 하나를 낚아챈다.
“으아악!”
“제길! 쏴!”
투두두두!
놈을 향해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티디디딩!
하지만 놈은 피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총탄은 놈에게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
“제길!”
가일을 닮은 남자가 옆에서 소총을 들고 놈을 겨눈다.
세주는 조용히 총을 들었다.
벼락은 무리다.
그 반동은 지금 몸으로 받아낼 수 없다.
대신 침묵이다.
‘탄환.’
세주의 전용 탄이다.
푸른빛을 보이는 탄을 들고 노리쇠를 당겨서 끼운다.
-브레인레이퍼 기억나지?
비무장지대의 괴물이다.
일반탄과 미사일을 무시한 놈의 배리어는 무시무시했다.
-그 정도 내구력이야.
프로비던스가 스캐닝을 끝내고 한 말이다.
날아가는 놈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송.
숨 한 번 고를 시간도 쓰지 않는 속사다.
그리고 허공을 날던 놈의 머리가 퍽하고 터진다.
“우아악!”
매달려 있던 이가 추락한다.
죽을 정도의 높이는 아니다.
“…너 뭐야?”
가일을 닮은 남자가 묻는다.
“저격병.”
세주가 그를 향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