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 충분합니다.
“정지.”
안나 휴이츠로 보이는 여자가 앞을 막는다.
“진입하면 발포한다.”
발포는 무슨 총 한 자루 안 보이는구만.
철컥. 철컥.
양 옆방이다.
언제 포위했는지, 소총을 든 무리다.
두 명씩 총 넷이 그들을 겨눈다.
유탄발사기도 달려 있다.
“여기서 쓰면 너무 눈에 뜨일 무기 아니냐?”
“그러게요.”
인준이 묻고 유진이 답한다.
그렇긴 하지.
“어떻게 찾았지?”
그녀가 손을 내밀고 묻는다.
손이 참 곱다.
야리야리한 몸매와 천상계 선녀를 닮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말투다.
“잘.”
“놀릴 때가 아니지 않나?”
세주가 입을 열자 인준이 미간을 찌푸린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이런 곳에서 폭격을 맞으면 피해가 크다.
더구나 나호필은 살아남을 수도 없고.
“조준.”
그녀가 입을 연다.
나호필이 나섰다.
그의 등 뒤가 촉촉하게 젖은 게 보였다.
“한국에서 온 지원군입니다. 이대로 돌아가도 됩니까?”
대뜸 묻는 말에 안나라는 여자는 말이 없었다.
“다니엘 라이트의 요청으로 왔습니다. 필요 없다면 본국으로 귀환하겠습니다.”
등은 촉촉하게 젖었지만, 더없이 당당한 태도다.
정치, 외교, 하여간 말발을 위해서 왔으니,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형태변환자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안나의 뒤다.
“오. TV랑 똑같네.”
한국말이라 다행이다.
치용이 뒤에서 입을 열었다.
안나가 곰 인간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함부로 입을 열면 발포하겠다.”
물론 영어로 말해서 치용은 못 알아들었다.
“닥치고 있으래.”
세주가 친절하게 통역해줬다.
“형태변환자라면 노크 대신 총알을 날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자식, 대한의 건아 나호필.
세계 최강의 남자, 미합중국의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그가 그제야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있냐?’
세주의 눈에는 안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비던스라면 보겠지.
-없어.
‘없다고?’
안나 휴이츠.
그녀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프로비던스와 동일한 존재.
그런 게 그녀의 어깨에 있을 거로 생각했다.
‘확실해?’
-없다니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가?
‘너 같은 새끼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해 봐라. 형 탈모 올 듯.’
-그 머리털을 다 쥐어뜯어 줄까?
프로비던스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안으로 들어가자.
“음.”
대통령이 눈길을 일행에게 돌린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쓴다.
“일단.”
일단?
과연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 만발이다.
지원군의 규모를 물을까?
나호필이 긴장했는지 주먹을 가볍게 쥔다.
“먼저 씻는 게 어떻습니까?”
아, 냄새.
첫인사를 씻자고 했으면서 잊고 있었다.
“욕실은 저기.”
하수도에 며칠을 보낸 일행이다.
안나도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바로 욕실을 가리킨다.
“먼저 갑니다.”
유진이 쏙하고 들어갔다.
“다음은 나.”
그리고 치용이 뒤에 선다.
“뜨거운 물은 나오려나.”
인준이 치용 뒤에 붙는다.
“너희들은 상관에 대한 예우가 없냐?”
세주가 말하자.
“이럴 때만 꼭 계급을 들먹이지.”
이인준은 정말 말투만으로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다.
“그래. 먼저 씻어라. 아주 때 빼고 광내고 다해라.”
나호필이 그 모습을 보고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총구 앞에서도 멀쩡했던 남자지만.
‘저 미친 새끼들.’
나호필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계급으로 치자면 내가 먼저다.”
같이 지낸 며칠.
물들기에 충분한 나날들이다.
말끔해진 나호필이 다시 대통령 앞에 섰다.
“한국에서 온 지원군입니까?”
카리스마라는 네 글자가 전신에서 나온다.
괜히 미합중국 대통령이 아니다.
나호필은 긴장한 기색을 감췄다.
여기서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니다.
“네.”
“다니엘 라이트는 무사합니까?”
“본국에서 잘 쉬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나호필을 향해 손짓했다.
아파트 옆방에서 온 손가락이 굵은 남자가 끓여 준 커피다.
찻잔을 들고 한 모금을 머금어 삼켰다.
“상황 설명은 이쪽이 해줄 겁니다. 휴이츠 대령.”
백금발을 뒤로 질끈 묶은 천상계 미녀가 앞으로 나섰다.
“백악관이 적의 손에 있습니다.”
“대통령과 일부 요인이 형태변환자라는 소리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전붑니다.”
“전부?”
“백악관에서 청소하는 사람 하나까지 전부 형태변환자입니다.”
“음.”
나호필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안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지원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이게 전붑니다.”
꿈틀.
대통령이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앞을 보며 입을 연다.
“뭐라고 했습니까?”
“지원군은 이게 전부라고 했습니다.”
“전부라고?”
미간을 찌푸린 대통령이다.
“네.”
나호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넷을 데리고 지원군이라고 한 겁니까?”
안나가 살벌한 기세로 말한다.
“네.”
나호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합니까?”
“장난 안 합니다.”
“고작 네 명 갖고?”
안나가 되묻는다.
아니, 번갈아 가면서 그렇게 사람을 몰아세우면 쓰나.
“충분합니다.”
하지만 나호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양반, 너무 믿는다.
-본 게 있잖아.
넷이서 형태변환자를 탈탈 터는 장면만 봤으니.
저런 신뢰가 쌓일 만도 하다.
그건 그거고, 상의해서 해야 하는 일 아니냐?
“백악관 청소해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너무 나가셨다.
대통령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주면 믿을 수 있다 정도가 아닐 겁니다.”
백악관만 문제가 아니다.
형태변환자는 그들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으니.
“괜히 적의 경계심만 늘려 줄 뿐입니다.”
안나의 말에 세주가 나호필의 바로 옆으로 가서 섰다.
“무의미한 짓입니다.”
이 여자가 보지도 않고 막말한다.
세주가 입을 열었다.
“백악관이 조금 망가져도 괜찮다면, 쓸어 드리겠습니다.”
나호필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자.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묻는다.
“하루면 됩니다.”
세주가 그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자신 있는 거지?”
정작 물을 쏟아놓고, 왜 이제 와서 불안한 표정인지.
“문제없습니다.”
나호필은 남겨두고 떠나는 넷이다.
“내가 동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안나 휴이츠가 따라나섰다.
안 그래도 그녀의 능력이 궁금했다.
프로비던스가 아니라면, 대체 뭘 가지고 있을까?
“필요한 건 챙겨주겠습니다.”
아파트 한 채를 통째로 요새처럼 꾸며 놨다.
곳곳에 탄약과 폭약까지 있다.
“필요 없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하자.
“…무슨 생각입니까?”
안나가 묻는다.
이런 미녀의 관심 나쁘지 않다.
“좋은 생각?”
빠직.
세주를 처음 만나는 이가 으레 그러하듯.
백옥 같은 피부에 핏줄이 선다.
과연 이 자들을 믿을 수 있을까?
대통령은 믿었다.
‘아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믿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들은 고작 넷이서 적에게 타격을 줬다.
거기에 할 수 있다고 나선 일이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우리에게 타격은 없어.’
다섯이 된 일행이 백악관을 향해 움직였다.
새벽 2시.
인적이 드문 시간이다.
용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안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들이 가는 길, 마치 원래 아는 길을 가는 것처럼 거침이 없다.
“워싱턴은 몇 번째 왔죠?”
여러 번 왔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십 년을 넘게 택시만 몬 운전사처럼 길을 잘 알 순 없다.
“처음입니다.”
‘처음?’
처음 온 놈이 이렇게 길을 잘 찾나?
그들은 곧 눈앞에 백악관을 둘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백악관 앞은 탁 트인 잔디밭이다.
몸을 숨기고 갈 수가 없다.
더구나 앞쪽에 무장한 병사 무리가 대기하고 있다.
어떻게 할 셈인지, 안나가 옆을 힐끗 바라봤다.
표정 변화가 없는 세주가 보인다.
위장도 괜찮다.
분장해서 안으로 잠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녀도 그런 걸 염두에 뒀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저격.
세주 일행 중 한 명은 귀신같은 솜씨를 가진 저격수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세주의 선택이 궁금해진 순간이다.
“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철컥.
기관총에 붙인 유탄발사기다.
아니, 보통의 유탄발사기보다 크다.
무슨 대전차 로켓포를 붙여놓은 것 같다.
거기에 언제 입었는지 묵직한 아머는 뭐냐.
인준이라 불린 인상 사나운 남자가 대답도 없이 앞으로 발사기를 겨눴다.
“무슨 미친 짓…!”
뚜왁.
슈아아아아아.
로켓이 불꽃을 뿜으며 날아간다.
그리고 앞쪽에 대기하고 있던 분대 병력을 때렸다.
꽝!
폭음이 조용한 새벽을 깨운다.
에에에에엥!
사이렌이 울리고, 병력들이 기어 나온다.
“미쳤습니까?”
“정상입니다.”
따박따박 대답하는 모습이 얄밉다.
세주가 몸을 일으켜 총구를 겨눈다.
들고 있는 건, 벼락이 아니라 침묵이다.
송! 송! 송!
퍽! 퍽! 퍽!
일격일살.
한 발에 한 명씩 나오는 족족 쓰러진다.
곰 같은 덩치의 인간과 기가 막히게 잘 생긴 남자 둘이 어느새 없어졌다.
“미친놈이었구나. 미친놈이었어.”
그녀가 중얼거리든 말든.
세주는 총을 쏘고, 인준은 로켓을 쏜다.
어디에 저런 포탄을 숨겨둔 걸까?
끊임없이도 쏜다.
“구경만 할 거면 놓고 갑니다.”
앞쪽에서 꾸역꾸역 병력이 나온다.
이 상황에서 어디를 가겠다는 걸까?
콰자자자자작!
순간 옆에서 곰이 놈들을 덮쳤다.
아니, 곰이 아니라 곰 같은 사람이다.
커다란 칼과 붉은 작대기를 휘두르며 놈들의 가랑이를 터트린다.
“약점 압니까?”
미군도 바보가 아닌 이상.
형태변환자의 특성쯤은 파악했으리라.
“압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 들뜬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본래 암살, 잠입, 보호 등등 그런 임무와는 어울리지 않는 능력을 가졌다.
처음 능력을 깨우친 건, 전장.
그리고 전장에서 아군은 그녀를 미친년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가볼까?’
오랜만에 신이 난다.
인간 포탄.
그게 그녀의 별명이다.
그리고 세주와는 다른 그녀의 능력은 바로 신체 강화 딱 하나뿐이었다.
-달라졌어.
‘뭐가?’
-그녀의 신체 구조가 변했어.
쾅!
한순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오버페이스 모드를 켠 세주만큼이나 빠르다.
그리고 그대로 놈들에게 들이받았다.
꽝!
폭음이 터진다.
어깨로 들이 받았는데 몸이 터진다.
“휘유!”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치용과 더불어 근접한 모든 것을 박살내는 불도저다.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힘이었다.
*
“당신은 부대원을 얼마나 믿습니까?”
대통령이 나호필에게 물었다.
그들은 동이 터오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얼마나 믿느냐라.
나호필은 전투원이 아니다.
같이 전장에 선 적도 없으며, 한솥밥을 먹은 사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는 지시했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싸웠고.
“사실 못 믿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놈들이라서.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말을 끊고 대통령을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형태변환자는 지금 부대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반세주는 몇 번의 저격 후 말했다.
“너무 약해.”
적들이 너무 약하단다.
레이퍼나 흰둥이에 비하면 배리어도 없고, 마치 잘 훈련받은 인간 정도란다.
그리고 그 레이퍼와 흰둥이 부대를 혼자서 세 자릿수로 몰살하던 남자다.
나호필은 금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끝이구나.’
놈들이 인간 사이에 숨어 있기에 문제라는 거다.
그러니까 백악관 전부가 놈들이라면.
가리지 않고 전부 죽여도 된다면.
전투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삑.
대통령이 TV를 켰다.
[간밤에 테러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기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연다.
[우리는 이 테러리스트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여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만행을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애국심이 넘쳐흐르는 기자다.
그의 뒤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악관이 보였다.
“잘도 망가뜨렸군.”
대통령이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
간밤에 백악관 주변을 모두 통제해야 했다.
민간인이나 매스컴이 녹색 체액이 범벅된 시체를 보게 할 순 없었다.
“이 새끼가.”
퍼스트 오더.
이들을 이끄는 자다.
그는 드물게 화가 났다.
반쯤 무너진 백악관 건물이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전부 죽지는 않았을 거다.
인간은 형태변환자와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뜨드드득.
인간 거죽이 벗겨진다.
동족이 전부 죽었다.
이제 개체 수가 얼마 남지 않은 동족의 시체가 즐비했다.
“트레에에에에에!”
분노에 찬 외침이 대기를 뚫고 퍼졌다.
세주가 돌아가는 길에 귓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쑤셨다.
‘너 내 욕했냐?’
-갑자기 왜?
‘귀 간지러워서.’
-나 아냐.
‘확실해?’
-아니라고. 난 항상 형을 욕해. 속으로 수없이도 욕한다고. 그래서 귀가 간지러웠으면 형은 귀에다 손가락을 박고 살아야 할 걸.
‘이 미친 기계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