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 첫 번째 오더.
[10시 30분 출발하는 KE093편을 탑승하시는 고객님들께서는 지금 바로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공항 안내 방송을 듣자 연예인 뺨치게 생긴 얼굴의 남자가 말한다.
“이제 가야 해요.”
“벌써?”
“방송 나왔어요.”
“아우, 비행기라니. 태어나서 처음 타보네.”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그가 몸을 실었던 의자가 부서질 듯 신음을 흘렸다.
오면서도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저런 몸집의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제발 닥치고 타라. 너 때문에 사람들 시선 모이니까.”
인준이 툴툴거렸다.
“나? 흐흐. 여자들이란. 역시 남자는 남자다운 게 최고지.”
-저 새끼 꼭 데려가야 해?
프로비던스가 불평을 뱉었다.
“빨리 타.”
퍽하고 궁둥이를 걷어차자, 그가 뒤를 돌아본다.
“아따 형님.”
세주가 아니라면 주먹다짐이라도 일어났겠지만, 어쨌든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곰 인간이 꼼짝도 못 했다.
“타기나 하라고.”
수호신 부대다.
그리고 그 옆.
“심히 걱정되는군.”
나호필이다.
“할 땐 해. 너 하나 지키는 건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인준이 그를 보며 말하고 걷는다.
“저기요. 혹시 연예인이신가요?”
유진을 향한 애정공세를 펼치는 여자들이다.
십보일녀.
열 발자국에 여자 한 명씩은 붙는 것 같다.
부러운 새끼.
“아니에요.”
부드럽게 거절하자.
“아. 혹시 연락처 좀.”
“죄송해요. 제가 핸드폰이 없어서요.”
요새 스마트폰 없는 사람도 있냐?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떠났다.
그렇게 반세주의 수호신 부대와 나호필은 현재 워싱턴을 향하는 중이었다.
나호필은 그들을 보며 과연 이 선택이 옳은 건지 의심했다.
한국은 미군을 돕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공식적인 도움은 무리라는 결론이 났다.
아직 전쟁의 황폐함이 가시지 않은 땅이다.
잃은 이들을 그리워하며 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타국을 돕기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
어떤 이도 쉽게 하자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비공식 파견.
특수부대를 조직해 보내기로 했다.
민간인 위장으로 적에게 타격을 줄 부대.
수호신 부대만큼 적임자는 없었다.
미군의 요청도 뚜렷했다.
지금 수뇌부를 장악하는 이들을 습격할 부대를 보내달라는 거다.
1차로 수호신 부대가 투입, 거기에 미군과의 공조를 위해 나호필이 따라나섰다.
그래서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공항까지 온 참이다.
‘민간인 위장이 의미가 있나?’
또 열 걸음 걷다 어떤 여자와 사진을 찍어주는 유진이 보였다.
“나도 찍어줄 수 있다.”
그 옆에 사납게 콧김을 뿜는 곰도.
“너 닥치라고.”
그리고 그 곰을 타박하는 이도.
“좀 가자.”
거기에 TV에서 올 킬을 하며 얼굴을 알린 세주까지.
“어? 올 킬 중령이다.”
그나마 세주가 낫다.
아는 척도 안 하고 가니.
하지만 이게 어딜 봐서 민간인 위장인지.
척.
앞서가던 세주가 갑자기 엄지를 척 올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연다.
“올 킬.”
“꺄아악!”
“맞잖아!”
뒤에서 민간인이 호들갑을 떤다.
“…미쳤나?”
“혹시 압니까? CF라도 들어올지.”
미쳤다.
미친 게 틀림없다.
이런 새끼들과 잘도 목숨을 걸고 작전을 나왔구나.
미군과의 협상을 위해 따라온 그다.
아무리 비공식 작전이라지만, 현장에서 미군의 지원 없이 이 정도 인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따라 나온 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넷은 곧 비행기에 올랐고, 곧 워싱턴을 향해 떠났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차지한 그들은 한참을 떠들었다.
세주는 유진에게 어떻게 하면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강의 받고 있고.
치용은 인준에게 대학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가.
“평생을 가도 불가능하다.”
라는 답을 들은 뒤 치고받고 싸우려고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나호필을 비롯한 모두 눈을 붙였다.
어찌 됐든 그들이 탄 비행기는 워싱턴에 도착했고.
“나와!”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총구를 든 미군에게 포위당했다.
나호필은 긴장감에 주변을 살폈다.
어쩐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끌더니.
잘도 비밀 암살 임무다.
허탈함에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반면에 공항 한복판에서 미군 오십 명에게 포위당한 상태인데도.
“뭐, 이렇게 반겨?”
자신을 따라 온 이들은 여유가 넘쳤다.
세주가 앞으로 나서며, 왼손을 뒤로 돌려 주먹을 쥐고 흔든다.
‘수신호?’
나호필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머지 셋은 아니었다.
“먼저 갑니다.”
시작은 유진이었다.
어떻게 숨겨온 건지.
퉁.
연막탄을 던진다.
푸시시식!
“Fire!”
망설임 하나 없이 상대가 총알을 갈긴다.
타다다다당!
슈슈슉!
연막이 곧 걷힌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Damm it!”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가 외쳤다.
“찾아! 멀리는 못 갔을 거다!”
그들이 공항을 샅샅이 뒤지기 위해 흩어졌다.
*
공항 안에서 일어난 소란은 금세 조용해졌다.
놀라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총격이 일어났음에도, 공항은 이상하리만큼 전과 같은 모습으로 원활하게 움직였다.
“기가 막히는군.”
나호필은 감탄했다.
“그 수신호가 무슨 의미였나?”
“뒤에서 만나자. 이런 겁니다.”
유진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해줬다.
“그래서 여기로?”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대신이다.
“본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세주가 말하며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처음에는 가까운 화장실로 쏙 들어가더니.
그대로 환풍구를 뜯고 움직였다.
세주와 유진, 나호필은 그렇게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항공사 사무실에 슬쩍 내려오더니 옷을 갈아입었다.
세주는 청바지에 흰 티를 입더니 모자를 돌려썼다.
그리고 나호필에게 비슷한 차림의 옷을 건넨다.
유진은 여장을 했다.
“나머지 둘은?”
“저기가 치용이 형님이요.”
공항 밖을 어슬렁거리는 프리허그 곰 인형이 보인다.
“저건 언제 준비해 온 거지?”
“출발 전에 다 압축해서 가져왔어요.”
실제로는 프로비던스의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그리고 저게 인준 형님이고요.”
의자에 태연하게 누워 자는 남자가 보였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다.
언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놀랄 틈도 없다.
딱!
세주가 나호필의 뒤통수를 때렸다.
“야, 새끼야. 형만 믿고 따라와.”
“…뭐?”
“오빠! 그래도 머리를 때리면 어떻게 해?”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의 목소리다.
유진이 팔을 감싼다.
가슴에 넣어둔 건 휴지가 분명한데 팔뚝에 닿으니 그럴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봐!”
맞은편 소총을 든 군인이다.
이미 주변에 한차례 소란으로 승객 모두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들켰나?’
나호필이 침을 삼키려는 순간이다.
“네?”
유진이 나서서 묻는다.
“어디서 왔지?”
군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진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JAPAN.”
옆 나라를 팔아먹고 셋은 밖으로 나왔다.
“뒤통수는 왜?”
“리얼함이 필요하니까. 거, 위장 중에 자꾸 그런 말 하지 마시고.”
세주가 말하고 앞으로 나선다.
‘그냥 때린 것 같은데.’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유진이 나가며 곰인형을 꽉 껴안았다.
프리허그라고 쓰여 있으니까, 유진 외에도 가끔 곰을 껴안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투박한 발음으로 택시 기사가 물었다.
“Ritz Carlton.”
세주가 답을 해주자.
그들을 태운 택시가 떠났다.
끼이익.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자, 호텔 컨시어지가 다가온다.
“예약하셨습니까?”
“마이크 탭.”
“마이크 탭, 네, 알겠습니다.”
그들의 총격을 피하며 캐리어도 전부 챙겨왔다.
‘무서운 놈들.’
나호필의 감탄과는 별개로 그들은 태연하게 움직였다.
“아, 여기 있습니다. 801호와 802호입니다. 조식은….”
프런트에 대강 개인 신상을 적자, 벨 맨이 따라와 캐리어를 날라줬다.
“무겁군요.”
한 명이 웃으며 말하자 세주가 10달러 한 장을 꺼내 건넨다.
“감사합니다.”
801호에 세주와 유진이 들어가고, 802호에 나호필이 들어갔다.
3분도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딩동.
“잠깐.”
세주와 유진이 안으로 들어온다.
“이런 준비는 대체 언제 한 거냐?”
가장 궁금했던 거다.
나호필이 묻자.
세주가 그를 바라보고 되물었다.
“그럼 타국에 임무를 맡고 오면서 아무 준비도 안 합니까? 중장님 설마 정말 관광객 마인드로 온 겁니까?”
똑같은 말을 얄밉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물론 준비했다.
이것저것, 만일에 상황에 대비도 했다.
하지만 공항에서부터 이런 습격을 받을 줄은 몰랐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세주가 물었다.
“반응 이상했지?”
공항에서 일을 말함이다.
군인이 우르르 몰려와서 총을 쏘는데 흔한 비명 한번 없다.
“네. 놀라긴 했지만, 다들 잘도 피하더라고요.”
“거기에 군인이 흩어져 누군갈 찾는데 그렇게 난감한 기색도 아니었고?”
“네.”
“이미 사전에 누구를 잡겠으니,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통보했을 거야.”
세주와 유진의 대화다.
그 사이에 나호필이 끼어들었다.
“정보가 샜다?”
그도 천재 소리를 듣는 이다.
단숨에 대화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자, 이제부터는 중장님 쪽 일 아닙니까?”
맞다.
나호필이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신발을 벗었다.
드드득!
구두 밑창을 뜯자, 유심 칩이 나온다.
스마트폰을 꺼내 갈아 끼우고는 전화를 걸었다.
“입국 수속에 안 걸리는 소재인가 보네요?”
유진이 그의 신발을 들고 유심히 살폈다.
입국할 때 엑스레이를 통과했는데 아무도 잡지 않았다.
신기해서 보고 있으려니, 세주가 한마디 한다.
“냄새나겠다. 내려놔.”
“안 나.”
세주의 말에 나호필이 부인했다.
“조금 나요.”
그 말에 유진이 덧붙인다.
‘빌어먹을 자식들.’
아직도 맞은 뒤통수가 얼얼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곧 수화기 너머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알파인 1-15.”
나호필이 자신을 나타내는 암호를 말하자.
“아아. 잘 들리나?”
꿈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나호필이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물론 나호필이 기다리던 이가 아니었다.
세주가 손을 들어 폰을 가리킨다.
나호필이 스마트폰 수신 형태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비행은 편안하셨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넨다.
누굴까?
세주가 나호필에게 눈짓했다.
나호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큼큼. 환영 인사도 있었고, 나름 좋았는데.”
세주가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받아주자.
“그런가? 용케도 몸 성히 들어왔나 본데.”
군 병력을 보낸 놈인가?
‘추적 가능해?’
-하고 있어.
에구, 이 똑똑한 자식.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하네.
“몸 성히 들어오지 못했다.”
“다쳤나?”
“마음이.”
“말장난하자는 건가?”
근데 이 자식 왜 이렇게 말을 잘하냐? 외계인이면 트트레레 이래야 정상아냐?
“언어를 잘도 배웠구나.”
발음이 유려하다.
더구나 지금 놈은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다.
“나호필, 누굴 데려왔지? 아니,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반세주?”
‘날 알아?’
“응. 반갑다 친구야.”
당황한 것과는 달리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친구?”
수화기 너머의 놈이 혼잣말하듯 되물었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놈의 말투는 아주 특이했다.
내용만 보자면 문제가 없었지만, 마치 선을 반듯하게 그린 것처럼 감정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말투였다.
“아, 내가 형인가?”
그 와중에도 세주는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시간을 끄는 건가?”
상대는 아주 영리했다.
“그렇게 콕 집어 말하면 부끄럽지.”
나호필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졌다.
이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좀 기다립시다.
추적 중이니까.
세주가 눈으로 말했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호필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날 아는데 난 널 모르네?”
“퍼스트 오더.”
놈은 대답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퍼스트 오더라.
당연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멀지 않네.
‘찾았어?’
-물론.
“오더야. 형이 언제 꼭 한 번 만나러 갈게.”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응.”
보이진 않겠지만, 세차게 고개까지 끄덕여줬다.
“만날 날을 기대하지.”
뭘 기대까지 하고 그러나.
지금 보러 갈 건데.
뚝.
전화가 끊겼다.
“잠깐 얼굴 좀 보고 올게.”
“어딜요?”
“오더 만나러.”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주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하지만 나호필은 아니다.
“어디 있는 줄 아나?”
“아니까 만나러 가겠죠.”
유진이 옆에서 세주 대신 답을 했다.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까지 일은 놀랍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주는 묻는 그에게 짧고 굵게, 설득력 있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세주가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감으로.”
그가 방 밖으로 나간다.
“…나 놀리는 건가?”
나호필이 묻자.
“놀리는 건 아닐 건데, 그러려니 하세요. 본래 저런 사람이니까.”
유진이 옆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