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 한 명씩
“무슨 생각해요?”
“강슬 씨 어머니가 궁금합니다.”
“저희 엄마요?”
“네. 뭘 드시고 아이를 낳으셨기에 이런 미인을 낳으셨나 하고요.”
카페에 순간 냉기가 몰아쳤다.
“저기, 음. 어디에서 그딴 말을 배워온 건가요?
왜 불쾌해하지?
자꾸 가슴이 두근거려서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풉.
프로비던스가 비웃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까?”
“물론. 거짓말하는 건 질색이에요.”
“조언자가 있습니다.”
“…그 김치용 소령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어떤 미친놈이 그딴 놈 말을 들을까?
절대 아니다.
“좋아요. 조언을 하나 하죠.”
“네. 경청하겠습니다.”
“다른 여자 앞에서 그딴 말은 피하세요. 제발. 느끼한 건 둘째 치고, 귀가 괴롭네요.”
까칠하다.
매우 까칠하다.
‘날 싫어하는 걸까?’
-내 조언은 안 받는다며?
그럼 인간 여자를 만나는 데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뭐하냐?
바로 밑에 여자 꼬시는 걸로는 국가대표급 부대원이 있는데.
근데 지금 강슬 씨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프로비던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내 실수다. 우리 브로 말 안 들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 수나 있었을까? 모두 네 덕임을 의심치 않으면서도 내가 또 실수했구나.’
-그렇지 우리 세주 동생?
이 미친 기계 새끼가 족보를 뒤집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또 무슨 생각해요?”
강슬의 표정이 무서워지는 것만큼 괴로운 건 없었다.
‘네. 프로비던스 형.’
-강슬 씨 생각했습니다. 큐.
“강슬 씨 생각했습니다.”
“…저기, 지금 저희 만난 지 10분도 안 됐거든요. 그리고 대화를 나눈 시간을 다 합쳐도 한 시간이 안 되지 않을까요?”
전장에서 만난 인연이고 서로 많이 바빴다.
“전쟁 영웅이어서 그런가요?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군요.”
남자랑 여자는 쓰는 언어가 달랐구나.
지금 저 여자가 하는 소리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모 말입니까? 설마, 저 털 많습니다. 큐.
“무모 말입니까? 설마, 저 털 많습니다.”
“미쳤어요?”
-풉.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 미친 기계 새끼가.
‘뒤질래? 이 미친 새끼야.’
-아니, 죽기 싫은데에에에.
상담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여자에 관해서는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놈의 조언이다.
‘말로 안 되면 그냥 입 닥치고 영화나 보자고 해요.’
“영화 좋아하십니까?”
“네. 왜요?”
“같이 영화 한 편 보고 싶습니다.”
“…그러죠.”
적어도 같이 영화관에 갈 정도면 상대가 조금은 호감이 있다는 소리라고 했다.
마음 바뀌기 전에 그 길로 밖으로 나갔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었다.
끝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세주는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도 연애는 몇 번 해봤다.
물론 결과가 다 좋진 않았다.
아니, 헤어진 연애에 좋은 결과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저렇게 예쁜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어.’
연예인처럼 생겼다.
덕분에 떨려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훈련 점수로 치자면 15점이다.
“그래도 다음이 있으니까!”
간신히 애프터를 받았다.
그녀와 헤어지고 부대로 돌아오며 연락을 했다. 다음 약속을 잡기 위해서다.
[죄송해요. 그날은 약속이.]
[그날은 수술 있어요.]
[다음 오프에는 시골 가기로 해서요.]
-차인 것 같은데?
프로비던스가 렌즈를 번쩍거린다.
‘닥쳐 계 새끼야.’
오랜만에 ‘기’자를 뺀 프로비던스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부대로 들어갔다.
“오, 중령님 돌아오셨습니까?”
병장 김무용이다.
인준이 극구 추천해서 부대로 데려온 이.
“엎드려.”
“지금 말입니까?”
웃는 얼굴 그대로 그가 굳는다.
“응. 엎드려. 누가 상관 앞에서 쪼개래. 미쳤냐? 너 계급 뭐야?”
“병장입니다!”
“난 뭘까?”
“준장이십니다!”
“근데 쪼개? 이 새끼가 요새 병장은 아주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나봐?”
“아닙니다!”
평소에 아무리 부드러운 남자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지.
여자한테 차인 직후다.
병장을 땅에 엎어놓고 걷자, 저 멀리서 반가운 얼굴이 온다.
현재 세주의 연애코치이자, 그의 부대원이다.
“필승. 잘 안되셨어요?”
“응.”
“그럴 수도 있죠. 뭐.”
정유진이 입을 열며 배시시 웃는다.
하여간 얼굴 보면 화를 낼 맘도 없어진다.
*
“유진아!”
치용의 목소리는 저승에 끌려가던 이도 끌어올 만큼 컸다.
가까이에서 본 유진은.
“시끄러워요.”
눈을 뜨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응?”
세주가 얼이 빠져 그를 보자.
나노킷으로 배를 치료하고 있는 유진이 그를 마주 본다.
“이 정도로 죽을 줄 알았어요? 퍽이나.”
그가 웃으며 입을 연다.
배가 뚫렸다고 생각했는데, 옆구리 부근이다.
즉사를 피했을 뿐 놔두면 죽을 정도의 상처인 건 맞긴 하다.
유진은 뚫린 직후 곧바로 나노킷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 덕이었다.
“죽었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욕을 해줬을 거다.”
인준이 다가온다.
쿵.
세주는 뒤로 엎어졌다.
손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다.
사방이 화약 냄새와 엉망인 바닥이지만 드러누워 버렸다.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졸렸다.
하늘을 보자 하루를 꼬박 새운 듯 다시 동이 튼다.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시발! 끝!”
유진이 죽지 않은 걸 보자마자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전투가 끝나서 외치는 환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살아남은 이들의 안도와 승리의 함성이다.
-쉬어.
프로비던스의 허락이 떨어진다.
그래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주니 눈이 절로 감긴다.
이 전장에 참여하고 눈도 한 번 감지 않은 세주였다.
조두, 그 새대가리 새끼가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1차 침공. 4년 전 강남 레이퍼 포 습격.
2차 침공. 비무장지대의 레이퍼 무리.
3차 침공. 기둥 수송선의 습격.
4차 침공. 모선, 가명 아시아 3호와 놈들의 군대 강남 재 습격.
그 결과.
사망자 현재 추정 불가.
부상자 현재 추정 불가.
지휘관 수백이 죽고, 일반 사병 수천이 죽었다.
비극을 부른 가혹한 전쟁이었다.
인류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고.
하지만 전쟁은 끝났고.
인류는 승리했다.
그리고 전쟁은 영웅을 낳았다.
*
“무슨 부대가 이 모양이냐?”
나호필이 입을 연다.
자세히 보면 말투가 인준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둘이 잘도 어울렸다.
사석에서 친구로 지내는 둘이다.
“부대장은 준장에 부대원은 전부 대령? 대단하다.”
“볼 일은?”
“허가 떨어졌대.”
인준이 그걸 듣고 세주를 향해 외쳤다.
“야, 형님!”
여전히 격의 없는 사이다.
“왜?”
내무실에서 트레이닝 복 차림에 배를 북북 긁으며 세주가 나온다.
몰골은 저래도 반세주, 그야말로 이 전장 최고의 영웅이다.
나라에서 그를 위한 거라면 대부분 들어줄 정도로.
쉘터에 부대원 가족을 모아달라면 그리 하고 돈을 더 달라 하니까 준다.
거기에 직위가 준장이다.
“어? 나호필 소장?”
“허가 떨어졌다.”
“허가?”
“놈들의 모선, 아시아 3호를 살펴봐도 된다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해남.”
전남 해남. 땅 끝 마을이라 불리는 관광지가 있는 곳이었다.
“당장 출발한다.”
“…지금?”
“문제 있나?”
“음. 좀 있으면 드라마 할 시간인데.”
나호필은 육두문자가 나오는 걸 참았다.
“그래서 안 가?”
“갑니다.”
안으로 들어가 대강 군복을 챙겨 입고 온다.
군기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 덕인지.
이곳 부대원들도 마찬가지다.
“야, 민우야!”
그가 외치자, 저 안쪽에서 누군가 달려 나온다.
“필승. 중사 박민우.”
중사로 진급한 과거의 논산, 교관 박민우다.
“나 없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예. 알겠습니다!”
부대원은 고작 셋.
중사 하나 병장 하나 상병 하나다.
“저 사병은 무슨 기준으로 뽑은 거냐?”
나호필이 인준에게 물었다.
“두 놈은 내 별명 만들어 준 놈이고. 한 놈은 예전 논산 교관.”
“응?”
“병신 이인준 만들어 준 놈과 교관이라고.”
“아.”
그니까 괴롭히려고 데려온 거라는 소리다.
‘이 미친놈들.’
자신도 정상인 소리는 안 듣지만 반세주 부대는 정말 정상이 아니다.
“뭐 타고 갑니까?”
그 미친 또라이 부대의 정점이 묻는다.
“헬기.”
투다다다다!
그들 부대의 연병장에 어느새 헬기가 내려앉는다.
“오, 헬기. 좋아. 금방 갔다 오겠다.”
곧 세주와 나호필은 헬기에 오르고 출발했다.
꾸벅꾸벅 조는 세주를 놔두고 나호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시아 3호를 격추한 시기와 비슷하게 몇몇 타국에서도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포했다.
‘어떻게?’
가장 먼저 든 의문이다.
그들의 발표에 따르며 큰 피해를 입고 승리했다지만.
한국을 침공한 놈들과의 전쟁의 결과를 보자면.
반세주가 없었다면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근데 그냥 군대가 놈들을 이겼다고?
숨기는 게 있다는 거다.
그들도 반세주의 존재를 타국에 숨겼던 것처럼 말이다.
곧 헬기가 해남에 도착했다.
세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 큰 우주선이 안 보인다.
“저기 밑.”
나호필이 가리키는 곳.
바다다.
쿠우우우우우!
곧 바다 위로 검은 동체가 떠오른다.
“타지.”
잠수함이었다.
물살이 흘러내리는 검은 동체가 고래를 떠올리게 했다.
“오. 신기.”
가벼운 마음으로 세주는 잠수정에 올랐다.
전투는 끝났고, 적은 해치웠다.
그래도 전역을 안 한 이유라면.
‘꿀 빠는 보직에 돈 따박따박 나오고.’
부대에서 왕 노릇을 한다.
훈련, 근무,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아도, 손맛 좋은 아주머니가 삼시 세끼를 챙겨주신다.
최고의 직장이었다.
1시간 가까이 타자, 촤아악, 하며 기압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공기 있네.
프로비던스가 주변을 파악해서 알려준다.
텅!
위를 열고 나가자.
정말로 공기가 있었다.
눅눅했지만, 호흡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산소다.
“오셨습니까?”
누군가 둘을 기다렸다.
“오, 장왕 잘 지내지?”
“준장님 덕분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야. 내 덕이지.”
‘재수 없다.’
장왕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절대로 표시하지 않았다.
반세주라는 인간을 잘 아는 그는 그저 만면에 미소를 보일 뿐이다.
“이쪽으로.”
그는 둘을 얌전히 안내했다.
-으음.
‘왜?’
버릇처럼 스캐닝을 돌린 프로비던스가 말한다.
-저기 옆방에 무장한 인원 넷. 그 옆방 무장한 인원 둘.
여기 군 보호시설이니까.
당연히 그런 이들도 있겠지.
근데 크게도 지어 놨다.
한참을 걸어서야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푸시시식!
문이 옆으로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만이군.”
강대총이 보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정장 입은 남자도 보인다.
검은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이다.
삽살개를 닮았다.
“반갑소.”
악수를 청하기에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니 영광이오.”
대통령은 표창 받을 때 만났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아니다.
“외교부 장관입니다.”
장왕이 옆에서 안내했다.
“아, 반갑습니다.”
대강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군인 같지 않군.”
“할 땐 하고 놀 땐 노는 게 제 부대의 컨셉입니다.”
“…컨셉?”
외교부 장관은 놀랐지만, 곧 웃어버렸다.
“재밌는 친구로군.”
“그런 소리 가끔 듣습니다.”
나호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쪽이나 살피러 가지.”
“네.”
얌전히 말을 듣고 가면서 보니 반대편에 다른 이도 보였다.
눈웃음을 짓는 금발의 남자다.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중년이라는 건 알았다.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젠장.
프로비던스가 세주 보다 한발 먼저 노획한 아시아 3호 안에 들어갔으니까.
맨 처음 전투가 끝났을 때도 대강 살폈지만, 제대로 살필 기회는 없었다.
그때 세주는 무척이나 쉬고 싶었다.
‘왜?’
-잠깐만 기다려 봐.
“자, 여기가 입구고.”
그 사이 나호필이 주저리주저리 아시아 3호에 관해 설명했다.
노란 동체 옆을 뚫어놓은 게 보인다.
“이게 입구입니까?”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했으니까.”
동그랗게 뚫린 구멍 주변으로 까맣게 탄 자국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호필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긴 통로에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문이 붙어 있다.
마치 인간이 만든 것 같다.
세주는 자신이 이걸 보고 싶다고 그렇게 요청해놓고 멀뚱한 태도로 나호필의 설명을 들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네.”
대강 대답해주는 사이 프로비던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형. 우리 음. 그러니까 좀 안 좋은 상황이네.
‘말해.’
“톡 까놓고 말하지. 반세주 준장. 우리 연구부가 한 가지 분석을 끝냈다.”
“말씀하십시오.”
-이 침공이 끝이 아냐.
“외계인은 지구를 다시 침공할 거다.”
아이씨.
둘의 말이 섞여서 헷갈린다.
“한 명씩.”
“응?”
실수로 입으로 말했네.
“아닙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호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침공이 끝이 아니라고 했다.”
-내 말이. 외계인은 지구를 다시 쳐들어올 거야.
잠깐 스톱.
그 싸움을 다시 하라고?
이제 막 꿀 빨고 달에 몇 천씩 꽂아주는 군대라는 신의 직장에 몸담았는데?
에이. 이러지 말자.
신이 있다면 소울을 담아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
“너 뭐하냐?”
치용은 몸을 단련하는 게 취미이자 특기였다.
한참 몸을 굴리고 오니 길바닥에 병사 하나가 엎드려서 땀을 뚝뚝 흘린다.
팔을 후들거리며 그가 외친다.
“반세주 준장님이 엎드리라고 시켰습니다!”
‘이 양반 까먹었네.’
전쟁이 끝나자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구는 세주다.
“야, 일어나.”
“감사, 감사합니다.”
병장이 눈물을 글썽인다.
“사내새끼가 뭐 이런 거로 울어? 대가리 박을래?”
“아닙니다!”
병장이 정신을 또렷이 돌아온다.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연봉이 높아지고 소규모 인원 부대에 전출 가라기에 좋아한 자신을 저주했다.
4차 침공 때 이인준 옆에서 같이 입을 턴 상병과 같이 전출 명령이 떨어졌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여긴 정신병원보다 더한 미친놈들만 있구나.’
병장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