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 후아, 후아, 후아.
장광안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졌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유치원생과 성인의 싸움이다.
붉은 아머를 입은 놈이 쏘는 붉은 화살은 아군을 적으로 만들고.
서핑보드가 날리는 원날톱은 사신의 낫과 같았다.
목이 뚝뚝 끊어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간다.
그는 대단한 전략가도 아니고 전술을 잘 알지도 못한다.
“으아악!”
“살려줘!”
하지만 도망만 치는 아군이 이길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건 알았다.
아니, 어떤 머저리라도 알 거다.
이건 진 싸움이라는 걸.
“후경아. 정신 좀 차리자.”
더구나 자신의 상태도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김후경, 코드명 골드베어.
여성은 힘이 약하다는 편견을 정통으로 부수는 여자이자.
허벅지가 어지간한 성인 여성 허리만 한 알파 팀의 주력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세주와 손발을 맞춘 경력까지 있는, 광안의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런 김후경이 붉은 화살이 등에 꽂힌 채 날뛴다.
“멈추면 나랑 사귈래?”
미친 소리를 쉴 새 없이 지껄이며 덤빈다.
“나 유부남이다.”
광안이 말하자.
“그래서 내가 싫다고?”
“싫은 게 아니라!”
“예, 아니오로 대답해!”
입을 열며 손에 든 대검을 휘두른다.
쾅!
광안이 뒤로 몸을 날리자 바닥을 찍는 대검이다.
“염병할!”
말이 안 통한다.
눈에 노블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붉은 화살이다.
하물며 이 화살은 김후경에게만 꽂힌 게 아니었다.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얀눈의 악몽이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화살에 맞은 이들이 몸이 망가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덤빈다.
김후경의 눈에 피눈물이 흘렀다.
아니, 코와 귀에서도 피가 흐른다.
“그만둬라. 그러다 죽어.”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광안은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사귈래?”
‘시발. 저 또라이.’
아무리 조종당하고 있다지만, 무슨 질문이 저 따위인지.
하긴 주변을 보면 남 일도 아니다.
“사실 난 남자를 좋아해!”
커밍아웃하며 소총을 갈기는 놈도 있고.
“여자! 여자! 여자!”
저렇게 외치며 여군을 쫓아다니고 정글도를 휘두르는 놈도 있다.
“남자! 남자! 남자!”
여군 중에는 그 반대도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판이다.
‘차라리 나도 저 화살을 맞는 게 낫겠다.’
무슨 소리를 할지는 모르지만,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더 지랄 같았다.
부웅!
다시 대검을 들고 김후경이 덤빈다.
“왜, 너도 여자다운 거 좋아하냐?”
응! 그래! 라고 대답해줄 뻔했다.
광안의 아내는 하늘거리는 청순미녀다.
아내 생각이 나자, 불끈 의욕이 솟았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기는 건 둘째 치고 한순간이라도 전황을 뒤집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 이 엉망이 된 군을 지휘해야 한다.
‘내가 한다!’
김후경을 때려눕히고 가는 거다.
마음을 굳게 다잡았지만.
“이 칼 맞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꽝!
김후경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병과를 따지자면 그녀는 척후였고, 광안은 저격이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아까 피하다가 스친 원날톱 덕에 이마에서 연신 피가 흘렀다.
대검을 피한 움직임에 격했는지, 왼쪽 눈두덩에 뜨거운 액체가 흐른다 싶더니, 왼쪽 시야가 어두워졌다.
‘제길!’
급히 피를 닦으려고 손을 올렸다.
그 틈에 김후경은 광안의 왼쪽, 시야의 사각으로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순간 시야에서 없어진 그녀다.
후악!
이번엔 그 미친 개소리도 없이 칼날이 날아온다.
풍압이 느껴졌다.
‘죽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한계였다.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순간.
꽝!
“윽!”
폭음과 함께 훅하고 몸이 밀려 나간다.
뒤로 날아가 데굴데굴 구른 그가 몸을 뒤집었다.
“쿨럭!”
기침을 뱉으며 앞을 보자.
“넌 뭔데? 네가 나랑 사귈래?”
개소리를 지껄이는 김후경을 누군가 막고 있다.
‘누구지?’
처음 보는 두꺼운 검은 아머를 입은 남자다.
“장광안 대위님, 아니 급하니까 말 좋 놓을게. 넌 정상이지?”
“어?”
익숙한 목소리다.
“이인준?”
“얘는 한 방 맞은 거고?”
김후경의 대검을 손으로 잡은 채다.
끼기긱!
둘이 힘을 겨루는 소음이 들린다.
김후경은 여전히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질질 흘린다.
코에 흐른 피가 옷을 적실 정도다.
“조심!”
그 순간 광안이 외쳤다.
인준을 노리고 붉은 화살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저 화살은 막거나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인준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쩡!
화살이 너무도 허무하게 그의 아머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진다.
“어?”
“이거 안 통해. 안티 사이킥 배리어다.”
세주가 만든 모든 아머에 통용되는 기술이었다.
프로비던스가 보면 ‘역시 난 최고야’라고 부르짖을 장면이다.
“잠깐 자라.”
말과 함께 인준이 김후경의 이마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꽝!
“악!”
김후경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난다.
워낙 튼튼해서 한 방에 기절도 안 한다.
인준이 성큼 다가서며 주먹을 휘둘렀다.
여자라고 인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꽝!
그대로 관자놀이를 후려친다.
몸이 두 배는 넘게 커 보이는 아머다.
그런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후경이 한쪽으로 훨훨 날아간다.
“근데 저 여자 왜 그래? 욕구불만이야? 뭘 자꾸 사귀재.”
광안은 날아가는 그녀를 일별하고 물었다.
“반세주는?”
“같이 왔지.”
‘반세주가 왔어?’
광안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누군가 물어도 딱 부러지게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그는 전황이 바뀔 거라는 걸 예감했다.
*
-개판인데.
원반톱에 찢기는 병사가 제일 먼저 눈에 보인다.
달리면서 아머 왼팔에 벼락을 붙여 둔 참이다.
왼 검지를 굽혀 손바닥을 누르자.
꽝! 꽝!
벼락이 울고, 원반톱을 허공에서 요격한다.
“헉!”
원반톱의 마수에서 간신히 목숨을 지킨 병사다.
그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으켜 세울 틈도 없다.
강남대로를 가득 채우는 적들이다.
깜빡이라고 보이는 놈들도 보인다.
번쩍하고 레이퍼 포를 쏴댄다.
“아아악!”
레이저 범위 안에 있는 아군이 녹아내린다.
거기에 붉은 화살이 아군을 미친놈으로 만들어주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끄힛힛힛. 내가 바로 이 구역의 미친놈이다!”
그 사이 정글도를 든 척후병 하나가 달려든다.
퍽!
“으악!”
세주가 사정없이 팔을 휘둘렀다.
척후병이 달려오던 그대로 뒤로 날아간다.
모르긴 해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거다.
-인정사정없네.
‘지금 사정 봐 줄 때냐?’
세주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트럭 위로 올라갔다.
‘목소리 증폭해!’
“모두 주목!”
그의 목소리가 폭음을 뚫고 전장에 쩌렁쩌렁 울린다.
“어?”
누군가 그를 알아봤다.
“올 킬 중령이다.”
“반세주?”
“다른 부대원은? 지원군이 온 거야?”
근처 몇 명만 세주를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아군뿐 아니라 적의 시선도 끌었는지, 노랑이 놈이 달려든다.
타악!
트럭 밑이다.
단숨에 뛰어올라 붉은 작대기를 휘두르는 놈이다.
세주는 놈이 뛰어오른 직후 벼락을 쏴버렸다.
꽝! 꽝!
펑하고 몸이 터지며 놈이 산산이 조각난다.
근거리에서 맞은 벼락이다.
이 정도 위력은 당연했다.
“올 킬 중령이다.”
“반세주야!”
두 번 울리는 벼락이다.
조금 더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내 뒤로 뭉쳐!”
그가 외치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반세주!”
“올 킬!”
“중령님!”
“오빠!”
-이 상황에 오빠는 누구냐?
그들을 뒤에 두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러자 촤르륵 하며 여덟 개의 총구가 손목에서부터 튀어나온다.
마치 개틀링 포처럼 손목을 감싼 총구다.
그 자세 그대로 세주가 주먹을 꽉 쥐자.
드르르르륵!
머신건처럼 총알이 빗발친다.
퍼버버벅!
노린 건 서핑 보드다.
펑하고 공중에서 놈이 터진다.
“이동!”
그리고 우측을 가리키며 움직인다.
아군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이 새끼야. 넌 미친놈이잖아.”
뒤가 소란스럽다.
“아냐, 이제 괜찮아.”
“뭐?”
방금까지 붉은 화살에 맞아 조종당하던 놈인가 보다.
하나같이 코피를 팍팍 흘리더니 얼굴이 피범벅이다.
“이 새끼가!”
아군이 소총을 들어 그를 가리킨다.
“관둬!”
세주가 큰 소리로 둘을 보고 외쳤다.
“이제 조종당하는 아군은 없다.”
“방금까지 미쳐 날 뛰던 놈입니다!”
뭐라고 해야 저 병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붙잡아놓고 일일이 설명하자니, 시간이 아깝다.
지금은 전장 한복판이다.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다.
“나 반세주야. 나 못 믿어?”
-안 부끄러워?
‘졸라 부끄럽다. 기계 새끼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게 필요한 건 절대적인 구심점이다.
낯부끄럽지만, 저격수가 아니라 영웅이 필요한 시점이란 거다.
하는 김에, 조금 열을 올렸다.
“내가 누구?”
“반세주!”
“원 모 타임!”
“반세주!”
“에블바리!”
“개자식!”
합창하는 아군이다.
그 함성소리에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로 전직하던 부대원들이 모인다.
반세주는 손짓으로 그들의 방향을 지시했다.
“이쪽!”
전후방, 좌우.
움직이는 건 단순했다.
“소총수 전방 1보 전진!”
“중화기 병 뒤로 물러나! 야! 손이 비면 뭐라도 주워서 싸워!”
“야, 이 멍청한 너무 나섰잖아!”
세주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붉은 화살로 조종당하는 이들이 현저히 줄었다.
세주의 눈이 허공 너머를 바라본다.
둥둥 떠 있던 붉은 외갑을 입은 적이 실 끊어진 연처럼 떨어진다.
그 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은 아머가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달라붙는 슈트 같은 형태다.
그는 디딜 곳도 없는 허공에서 그다음 타깃, 다른 빨강이를 향해 날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특별하게 만든 와이어를 던져 휘감아 당긴 거다.
그리고 군용 대검을 들고 놈의 목을 끊는다.
프로비던스가 만들고 세주가 준 아머다.
그리고 세주는 그 아머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지어줬다.
은밀한 왕따, 일명 은따.
-최악의 네이밍 센스야.
그걸 받은 유진이 마지못해 웃으며 떠났다.
그래도 임무는 잘 수행하고 있다.
적의 사이키커 부대 암살.
더없이 훌륭하다.
뒤에서 정신을 차린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내가 왜 그랬지?”
“야, 너 진짜 남자 좋아하냐?”
“아냐. 시발!”
“이 미친 발정 난 새끼!”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죄냐?!”
하나둘 정신을 차리는 아군이다.
그럴수록 세주의 뒤로 모이는 이들이 많았다.
곧 한 무리의 부대로 변한 그들이다.
“살아 있었냐?”
바로 옆에서 몸을 붙인 이를 향해 세주가 입을 열자.
“왜? 죽길 바랐나?”
이무영이다.
왼팔이 허전하다.
잘렸나보다.
“민간 기업이라며?”
왜 여기에 있냐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 군인이 무슨 상관이냐?”
굉장히 마음에 드는 말이다.
“당연한 말. 모두 잘 들어라!”
그와 말을 하다 말고 세주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이들을 이끈 방향은 깜빡이가 없는 쪽이다.
그리고 그 깜빡이는 치용이 정리하고 있고.
인준은 뿔뿔이 흩어진 알파와 베타, 그리고 그 외의 특수부대를 규합하러 갔다.
‘후아, 후아, 후아.’
속으로 호흡을 몰아쉰다.
-자, 흥분하지 말고, 말실수해서 자기 전에 이불 걷어찰 소리는 하지 말자.
‘후아, 후아, 후아.’
-안 들리는구나.
한껏 흥분한 세주다.
희생 없는 승리는 없다.
결국, 이미 큰 희생을 치른 이들이고.
하지만 여기서 싸움을 포기하면 죽는 건 이들만이 아니다.
“살고 싶다면 돌아가도 좋다!”
그가 연신 외친다.
“대신!”
우뚝.
몸을 멈춘다.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더 내려오기 전, 해가 사라지기 직전 노을과 함께다.
“놈들을 엿 먹이고 싶은 자 남으라!”
“우호!”
뒤에서 극히 일부가 환호를 내지른다.
“가족을 지키고 싶은 자 남으라!”
“우호!”
그보다 많은 이들이 함성을 질렀다.
“연인을 지킬 자 남으라!”
“친구를 지킬 자 남으라!”
“너의 옆에 전우를 지킬 자 남으라!”
“아직 두 손이 멀쩡하다면 총을 쥐어라. 그리고 적을 향해 쏴라! 우리는 이긴다!”
“우호!”
“우호!”
환호가 대기를 울린다.
전군이 미친 듯이 외쳤다.
세주가 뒤로 돌아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병사들의 눈이 보인다.
“난 저 뒤! 우리를 바라보는 가족과 연인과 친구가 보인다! 지키자. 그리고 저 개새끼들을 죽이자!”
“반세주 개자식!”
누군가 외쳤다.
“올 킬 중령 개자식!”
“반세주 개자식!”
폭음을 집어삼키는 환호성이다.
세주가 앞을 가리켰다.
“자, 때려 부수러 간다! 우호!”
“우호!”
전장에 참여하자마자 단숨에 아군을 전부 규합한 남자의 연설이자, 전황을 뒤집기 위한 초석을 다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