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 못 먹어도 고
‘부대 전투력을 수치로 표현한다면?’
갑자기 든 의문이었다.
프로비던스는 그런 세주의 물음에 충실히 답을 했다.
-전투력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머저리 같단 생각은 안 들고?
‘응. 안 들어. 궁금하다. 스카우터 기능은 없냐?’
-이 형이 만화를 너무 봤네.
만화 보다 더 스펙터클한 현실에 살고 있다.
-숫자로 표현할 순 없지. 하지만 상황과 지리만 도와준다면, 형 솔직히 레이퍼 웨이브 정도는 무섭지도 않잖아?
*
그래. 안 무섭다.
뒤에 지킬 사람이 없다면 그냥 방아쇠를 당겨서 놈들을 죽이면 그만이다.
치용, 인준, 유진 셋을 움직이며 원거리 저격만으로 레이퍼 수천 마리도 죽일 자신이 있다.
늦었다는 말에 스스로 채찍질을 했고.
옆에서 죽는 이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치용이 자신의 큰 칼을 등 뒤로 비껴 매며 입을 연다.
“거, 새로운 기술 시험도 못 해보네.”
압살이다.
벼락이 뿜어낸 다섯 개의 탄환.
그사이 떨어진 인준의 폭발물들.
아머를 입고 풀 업 상태로 달려든 치용과 유진.
놈들은 변변한 반항도 못 했다.
‘너무 약한데.’
-좋은 일이라고 해주고 싶지만, 이걸 보낸 놈이 그렇게 허술할 것 같지는 않다는 거지?
‘너무 약한데’라는 다섯 글자에 담긴 의미를 잘도 줄줄 말한다.
‘정답.’
-나도 동감해.
“UFO가 제가 생각한 거랑은 좀 다르네요.”
“외계인도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우리 항문을 공격하는 놈들이라니.”
유진과 인준의 대화다.
그래. 우리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
정보다.
‘브로.’
-말 안 해도 가고 있어.
어깨에서 떠오른 프로비던스가 놈들이 타고 온 기둥을 주변을 빙빙 돈다.
“어쩌시게요?”
“안에 뭐 있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무전이 먹통인데. 별일 없겠죠?”
“왕십리는 내가 막았고, 여의도는 현재 상황 종료. 남은 건 일산이지?”
침공당한 지역은 총 셋이다.
“네.”
“우리 가기 전에 대규모 병력 간다고 했으니까.”
충분히 처리할 거다.
외벽이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미끈거린다.
통통.
‘안은 비었나 본데?’
두드리니 빈 깡통 소리가 난다.
-오, 형.
‘왜?’
-겉면에 발린 거, 배리어를 액체화시킨 거야. 놀라운 기술인데?
‘…그게 액체화가 되냐?’
-나도 처음 보는데, 수집해서 연구해 봐야겠다.
왜 저 미친 기계 새끼는 신이 나 보이는 걸까?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없어.”
기둥 주변을 한 바퀴 돈 인준이다.
수직으로 솟아있어서 꽤 부피가 크지만.
둘레는 작은 빌라 정도다.
물론 그것도 꽤 거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골이라는 놈을 본 이후다.
그리 대단한 크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프로비던스 놈은 뭐 하고 있는 건지.
문이 열릴 만한 시간이 한참 지났다.
멀뚱히 기둥 앞에서 기다린 시간이 꽤 길다.
‘야, 농땡이 피우냐?’
-뭐? 지금 장난해? 이건 놈들의 기술이 집약된 테크놀로지야. 아무리 나라도….
퓨식.
“아, 열렸다.”
치용의 목소리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벽 한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뿐이다.
“어떻게 열었냐?”
인준도 놀라서 묻자.
“문은 밀어서 안 열리면 당기면 되는 거지 뭐. 이 정도야.”
인준에게 자랑하는 치용을 보고.
유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니, 무슨 이게 식당 유리문이에요? 당겨서 열게?”
“진짠데.”
세주가 벽에 대고 손가락을 푹 찔러 봤다.
따로 문은 없다.
대신 벽에 손가락이 파고들어서 당기면 열리는 구조다.
“잘했다. 치용.”
프로비던스가 부르르 떤다.
-저 오랑우탄보다 못한 퇴화한 생물에게 전해. 이 앞으로는 아무것도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만약 이게 자폭이라도 하면? 다 같이 손잡고 천국 가자고?
본래 말이 많은 놈이긴 하지만.
이렇게 긴말을 숨 쉴 틈도 없이 한다.
속사포 래퍼도 한 수 접어주겠다.
세주는 그에게 적절한, 그를 달랠만한 답을 해줘야 했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 적합한 그런 말을.
‘그래. 치용보다 못한 놈아.’
-크아아아아!
미러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렌즈 빛을 사방으로 뿌리며 발광하는 놈을 두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먼저.”
셋을 뒤에 두고.
어두운 구멍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이다.
“흡!”
갑자기 호흡이 막힌다.
그리고 발이 붕 떠올랐다.
부유감에 당황한 것보다 숨이 턱 막힌 것에 더 놀랐다.
주변에 산소가 사라진 거다.
그리고 그건 뒤따라온 셋도 마찬가지였다.
셋 모두 버둥거리며 허공을 노닌다.
‘브로!’
초인이라 부를 수 있는 넷이지만, 산소 없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10분? 20분?
실험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적어도 30분 안쪽일 것이다.
노블 에너지도, 그동안 쌓아온 어떤 것도 산소를 대신할 순 없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숨을 참고 몸을 휘돌려 중심을 잡았다.
무중력 상태다.
처음 겪어보지만, 넷 모두 몸을 극한으로 단련한 이들이다.
유영하듯 헤엄쳐 벽으로 붙는다.
어둠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드문드문 불빛이 들어왔다.
4D 상영관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에 별빛이 반짝인다.
금세 서로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 밝아졌다.
‘브로!’
다시 한 번 프로비던스를 불렀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그들이 들어 온 입구가 어느새 막혔다.
여기에 산소를 공급하던지.
아니면 나가는 방법을 찾던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인준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흔드는 수신호를 보낸다.
‘내가 터트린다.’
그리고 수류탄을 보여준다.
‘하지 마.’
아직은 괜찮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수준은 아니다.
노블 패스는 정말 대단한 힘이다.
산소를 대신해주진 않아도.
무호흡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유진이 급하게 손을 든다.
인준을 가리키고.
손가락을 꼬아 밑으로 꺾는다.
‘못 버틴다고?’
이전 싸움에서 얻은 부상 덕에 노블 패스가 원활하지 않은 거다.
그의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린다.
이 빌어먹을 기계 새끼는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유진이 세주의 입을 가리키고, 인준의 입을 가리킨다.
넷 중에 호흡이 가장 긴 사람.
세주다.
마우스 투 마우스로 인준을 도우라는 수신호다.
외면하고 싶다.
시발, 첫 키스는 아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찐한 스킨십을 남자랑 하게 생겼다.
그래도 죽일 순 없다.
‘개 같은 브로, 미친 기계 새끼. 내가 널 꼭 압착기에 넣어 부숴 버릴 테다.’
수류탄을 터트리든 다른 방법을 강구하든 일단 인준을 살려야 한다.
부웅.
벽을 박차고 날아간다.
치용이 그걸 보더니 눈이 반달이 된다.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냐? 이 양아치야.
유진은 왜 흥미진진한 눈을 하고 있을까?
너희 지금 목숨이 위험하거든?
인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뒤로 도망간다.
야, 이 미친놈아. 누군 좋아서 하냐?
지금 네 놈 살리러 가는 거라고!
움직인 탓에 인준의 얼굴이 더 파랗게 질린다.
팟팟팟!
그 사이 빛이 더 밝아진다.
-아, 이제야 불을 켰네. 어두워서 힘들었지?
‘산소!’
-산소 공급 시스템이 어디 있던데.
‘빨리!’
인준의 상태가 안 좋다.
-일단 형이 입으로 호흡을 도와줘. 아직 여유 있지?
이 새끼가.
벌써 찾은 거다. 산소 공급 시스템을.
이러는 이유는 하나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행동은 재빠르게 해야 했다.
‘내가 잘못했다.’
치용보다 못한 놈이라는 욕이 문제다.
솔직히 세주가 들었다면 바로 주먹 날아갔다.
-그래. 나도 그리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네.
프로비던스도 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산소 공급 시스템을 해킹해서 켜는 중이었으리라.
위이이이이이이잉!
퓨슈슈슈슈슉!
붕.
갑자기 중력이 생기며 몸이 밑으로 훅하고 떨어진다.
-바깥의 환경과 동일하게 설정했어.
쿵!
“후아!”
볼품없게 떨어진 인준이 호흡을 뱉고.
나머지 셋이 고양이처럼 착지한다.
“괜찮냐?”
걱정스레 세주가 인준을 향해 물었다.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입술을 향해 다가오지 마라.”
…목숨을 구한 첫 마디치고는 너무 배타적이다.
“미친놈아. 형님이 너 구하려고 응? 최선을 다하신 건데. 응? 그 은혜도 모르고 응?”
웃으면서 말하지 마라. 김치용.
옥수수를 전부 털어서 임플란트로 다 바꿔주고 싶어진다.
“좋은 구경 놓쳤네요.”
유진이 배시시 웃는다.
“하지 마라. 이 미친놈들아.”
결국, 세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매복도 없었고.
방어 시스템 따위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가운데 유유히 떠 있는 진회색의 구슬뿐이다.
파직.
구슬 주변에 스파크가 튄다.
“의심스럽게 생겼네요.”
“의심이고 뭐고, 저거 외에는 그냥 텅 비었으니까.”
유진과 인준의 말과 같았다.
이 크고 넓은 기둥에 있는 거라고는 저 구슬뿐이다.
그리고 그 구슬은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치 프로비던스를 발가벗기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가운데 렌즈만 덩그러니 가진 놈이다.
그리고 그 렌즈에서 빛이 나왔다.
-조심.
프로비던스가 날아와 어깨 위에 앉는다.
하지만 렌즈의 빛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 빛을 쏘아낼 뿐.
프로비던스가 렌즈를 깜빡이며 말했다.
-통신의 일종인 것 같은데.
파라락.
홀로그램의 일종으로 보였으며.
가늘고 흰빛이 풍성하게 홀로그램을 가득 채웠다.
산발한 머리카락 같이 넘실거리는 빛이다.
스스로 빛나는 그 흰빛의 머리카락 사이.
두 개의 붉은 빛이 보인다.
딱히 얼굴이 보인 것도 아니고.
상대가 자신을 밝힌 것도 아니지만.
‘너구나.’
그게 적군의 지휘관이자 이 모든 일의 원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레이퍼와 골을 보내고, 현재 침공을 지시한 놈.
-트레에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다.
이 개자식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욕설을 비롯해서 따지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산더미다.
허상이지만, 공간을 격하고 마주한 둘이다.
-금방 꺼진다.
프로비던스가 깜빡이는 홀로그램을 보며 말했다.
적과 마주한 자신의 주인이다.
그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의지와 각오를 보일지도 모른다.
홀로그램을 통해 마주본 둘을 렌즈에 담는다.
영웅 서사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휘날리는 흰빛의 적과 그걸 마주한 인류의 희망.
녹화 버튼을 켰다. 꽤 오랫동안 간직해도 좋으리라.
통신이 끊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놈이 사라지기 전에,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해야 할 그 한 마디.
“매너 없는 새끼.”
-응?
“침공할 거면 지구 언어 배워 와. 이 개자식아.”
동시에 홀로그램이 푹하고 꺼진다.
‘통역기 같은 거 없었을까? 후, 내 말뜻 전해졌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형을 정상인은 아닐까 의심하던 과거의 내가 밉다.
‘뭐? 인마?’
-그냥 형은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 변하지 말고.
‘네가 말 안 해도 그렇게 살 거다.’
-그리고 당분간 말 걸지 마. 그 또라이 끼가 전염될까 봐 무섭다.
‘이 새끼가 형한테.’
“뭐하십니까?”
옆에서 치용이 멀뚱멀뚱 눈을 뜨며 묻는다.
뭐하긴.
“너도 봤잖아. 저기 구슬에서….”
말을 하다 말고 치용의 눈을 보니 소처럼 끔뻑거린다.
뒤로 고개를 돌린다.
김치용은 머저리라 못 봤을 수도 있다.
“인준아?”
“헛것이 보여?”
“유진?”
“네. 형님. 전 이해해요. 과도한 스트레스가 환각을 보이게도 하거든요. 저도 겪어 봤어요.”
-개인을 향한 지향성 통신이었어. 형의 뇌에 직접 영상을 보여준 거지. 이 새끼들 봐라.
‘별 게 다 되네.’
솔직히 놀랐다.
그리고 흥분한 프로비던스의 말이 들렸다.
-다 해부해주겠어. 엄청나게 진화한 종족이라 이거지? 그래 한 번 해보자 이거야. 살결 하나, 세포 하나까지 전부 분해해서 파악해 주마.
미친 사이코패스 과학자 같다.
“형님?”
“아냐? 잠깐 꿈꿨어.”
“그사이에 자다니, 역시 형님!”
치용이 엄지를 올린다.
아니, 그게 감탄할 일은 아니지 않냐?
“잠시 대기 후, 통신이 닿는 곳으로 움직인다.”
“네!”
셋과 떨어지고 구슬을 올려다봤다.
‘나한테만 말을 걸었다.’
그 말은.
상대방도 자신을 알고 있다는 거다.
두근.
긴장감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형.
‘왜?’
-나 여기 접속해본다.
‘그냥 하면 되지 왜 물어?’
-리스크가 있어.
‘무슨 리스크?’
-내 시스템이 오염될 수 있어.
좋은 소식은 아니다.
말리려고 했다.
지금의 프로비던스도 그에게 정말 꼭 필요한 동료다.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근데 하고 싶어. 남자는 못 먹어도 고지? 그럼 허락한 거로 알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대형로봇을 받은 초등학생 같은 기세였다.
말릴 새도 없이.
위이이잉!
프로비던스와 쇠구슬의 렌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