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 아저씨 아냐, 오빠 해 봐.
이마를 맞고 드러누운 자식이 더 엉겨 붙는 일은 없었다.
“내가 처리한다.”
한숨을 내 쉰 광안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들었다.
탁 치니 턱하고 쓰러졌다.
외에 쓸 내용이 딱히 없었다.
죽진 않았고,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5개월 차가 되었을 때, 더는 조교로 김해에 가지 않아도 됐다.
에너지를 계속 소모해서 트레이닝 센터에 살다시피 했다.
이때까지도 침공은 없었다.
*
2만.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남은 에너지 수치다.
몽땅 썼다.
남은 에너지를.
초인프로젝트 써드.
레어 모드 오픈.
때때로 트레이닝 센터 현실 구현.
거기에 남은 에너지로 ‘무기고’를 열었다.
인벤토리가 아니라 무기와 아머를 모아두는 곳이다.
“아들?”
“네.”
휴가 24일 차였다.
남은 휴가 몽땅 몰아서 나온 참이고.
30일짜리 휴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왕십리 엔터식스, 돈 번 만큼 돈 지랄하러 온 참이다.
돈 걱정 없는 쇼핑이다.
“이거 산다?”
“사세요.”
군에서 받은 돈으로 이사도 갔고, 쉘터도 하나 샀다.
요새 유행한단다.
배리어 시스템이 들어간 지하실이다.
실 평수 스무 평에 있을 거 다 있고, 에너지 발전소를 갖추고 있어서 반영구적인 거주지다.
하하하. 그게 50억이다.
물론 비쌌지만.
나라에서 제공해줬다.
안 해주면 알파 팀 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지금도 돈 지랄 중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10점 만점에 6점 주지. 옷은 괜찮으나, 중년 나이에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네. 차라리 회색 계열에 원피스를 추천해.
오, 우리 프로비던스 능력의 한계가 없으니.
그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는 날 위해서 미적 감각을 발휘했다.
“어머니, 차라리 이쪽 원피스는 어때요?”
회색 계열에 자수가 돼 있는, 고급스러운 형태다.
단순하지만 기품 있는.
“아드님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옷을 파는 직원이 생긋 웃는다.
‘브로, 전쟁터만큼이나 유용하구나.’
-나야. 나한테 불가능은 없지.
“이 옷은요….”
주저리주저리 직원의 설명을 듣고, 옷을 갈아입고.
입에 발린 칭찬에 방긋 웃는 어머니를 보며.
“너도 하나 사.”
“그럴까요?”
덕분에 같은 매장에서 꽤 고가의 얇은 점퍼를 샀다.
“이걸로.”
국군 장교 카드를 내민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직원이었다.
얼굴이 꽤 예쁘게 생겼다.
그녀가 카드를 받고 생긋 웃으며 물었다.
“군인이에요?”
“그렇게 안 보이죠?”
추파 아니다. 그냥 가벼운 농담이다.
“아뇨. 군인 같아요.”
직원이 생긋 웃으며 말한다.
거참, 센스가 없네, 센스가.
-풉. 넘볼 걸 넘봐야지. 강도 심보야. 아주.
‘아냐, 새끼야.’
“예쁘게 입으세요.”
여자가 웃으며 배웅했다.
두 손이 묵직하다.
이미 한 바퀴 돌고 난 참이다.
그리고 정장코너로 향했다.
아버지가 몇 가지 옷을 보고 넥타이를 고르신다.
오기 전에 신신당부했다.
오늘 자신의 마인드는 졸부라고.
돈은 정말 벌 만큼 번다고, 그니까 마음껏 사시라고.
“응. 걱정 마라. 네 엄마 돈 쓸 줄 안다.”
“나도다.”
네. 두 분 다 잘도 쓰시네요.
옷값만 750만 원이 나왔어요.
50억짜리 쉘터를 선물하는 아들이다.
이 정도 재력이 당연하다 생각하시나 보다.
짐을 주차장에 있는 트렁크에 넣고 1층 매장 안에 있는 카페에 앉았다.
브런치 집인지, 음식도 파는 곳이다.
“근데 아들, 뭘 해야 중령이 되고 돈을 이렇게 받아?”
전쟁영웅이요.
“제가 중요한 장교 교육도 하고 그래서요.”
적당히 얼버무려준다.
“그런다고 중령이 돼?”
“생각보다 군대가 저랑 잘 맞네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워서 받은 거다.
하지만 부모에게 그런 걱정을 끼쳐드릴 순 없는 거 아닌가.
-알려서 좋을 거 없어.
‘당연하지.’
오랜만에 프로비던스와 의견이 맞았다.
주차장에 돌아가 운전석에 앉으려고 하자.
“내가 하마.”
“제가 할게요.”
“아니다. 내가 하마. 내 차, 남이 운전하는 거 별로다.”
외제다. 마크가 예쁜 외국 세단이다.
고오오오오급 세단.
자신이 사드린 차고.
“저 아들인데요.”
“아들도 남이야.”
아, 네.
수긍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피곤하니까, 쉬라고 그러는 거야.”
어머니가 소곤소곤 얘기하신다.
귀여우시다.
압니다.
휴가 나온 아들 편히 쉬라고 하고 싶은 거.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밥상도 받았고.
같이 영화도 봤다.
쇼핑도 했고, 사드릴 것도 사드렸다.
새벽까지 얘기를 나누고 같이 예능을 보며 웃었다.
부둥켜안고 우는 거 빼고는 다했다.
“언제 복귀하니?”
차가 막 주차장을 빠져나왔을 때다.
휴가 24일 째다.
어머니가 물었다.
그리고 슈우우우웅. 밖에서 굉음이 들린다.
위이잉.
“잠시만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비행체 감지.
번쩍.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유성처럼 붉은 빛을 발하며 날아온다.
긴 장대 모양이었다.
-여기 떨어지겠는데.
순간 계산을 마친 프로비던스가 말하고.
떨어질 위치를 보여준다.
왕십리역 위 광장 쪽이다.
세주와 부모님을 태운 차가 막 그곳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저거 하나야?’
-없어. 근방에는 저거 외에 떨어지는 거 없어.
“아버지.”
“오냐.”
“엑셀 밟고, 바로 쉘터로 가세요.”
“무슨 일이냐?”
아버지도 떨어지는 유성을 봤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설명해 드릴 시간이 없네요. 저 지금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꼭 가야 하니?”
“네.”
꼭 가야죠.
지금 저게 여기 떨어지면 여긴 몰살입니다.
무기는 전부 부대에 두고 왔다.
‘지금 꺼내 쓸 수 있는 무기 있어?’
-아니, 아직 전부 개발 중이야.
얼마 전 연 무기고, 그곳에서 무기와 방어구 개발도 가능했다.
가진 게 없다는 소리다.
‘저거 멈출 방법 없냐?’
-없어. 포탄이 쏟아져도 내려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순 없지.
딸깍.
차 문을 열었다.
“아버지.”
“네 말 대로 하마.”
“아들.”
나가려는 찰나 어머니가 부른다.
“제발, 몸조심해라.”
제발이란 두 글자가 이렇게 가슴 저리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그 두 글자에 담긴 건 진심이라는 무기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손을 강하게 잡아 준 후 일어났다.
텅!
차 문을 닫고, 광장으로 뛰었다.
가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주어진 비상 통신망 번호를 누르고.
“코드명 브라이트 아이즈, 상공에서 비행체 발견. 위치 왕십리역, 엔터식스 광장.”
전할 말만 전하고 뛰었다.
그 사이 장대가 일반 사람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대피하십시오! 대피하세요!”
광장 위를 최대한 비워둬야 한다.
-궤도 바꾼다.
어라?
장대가 날아오는 속도가 빨라진다.
“어? 어?”
“으아아아아!”
발견한 이들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멍하니 보던 사람들도 뛰기 시작한다.
꽝!
엔터식스 건물 옆, 비스듬히 장대가 박혔다.
위치로 봐서는 영화관 쪽이다.
콰드드드.
건물 외벽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진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빌어먹을.’
사망자가 없을 수 없다.
냅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기가 없어도, 두고 볼 순 없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수야.”
바로 옆 매장 언니다.
“여기요. 주희 언니. 저 여기 있어요.”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주변이 연기로 가득 찼다.
불이 난 걸까? 하지만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연기가 자욱하지만 맵지는 않았다.
‘일산화탄소는 마시면 엄청 콜록거리는 거 아냐?’
하지만 연기는 시야만 가렸다.
불은 아니다. 그런데 불이 아니라면 무슨 일일까?
“지수야.”
옆 매장 언니가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언니, 언니, 불 난 걸까요?”
이성적으로는 아닌 걸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묻는다.
“그런가? 잘 모르겠어.”
둘이 손을 부둥켜 잡았다.
내려가야 하나?
하지만 한 치 앞도 보기 힘든데.
“테러 아닐까?”
옆에서 주희가 입을 연다.
“테러요?”
왕십리 엔터식스에서 테러? 왜?
이 건물이 그토록 상징적인 건물이었나?
꺄아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위다.
얼마나 섬뜩한지 듣자마자 소름이 후두둑 돋았다.
둘이 서로를 더 부둥켜안았다.
“언니.”
“그냥 놀라서 지른 걸 거야.”
아니다. 비명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건 겁에 질려 지른 소리다.
아아악!
꽝!
폭음과 비명이 간간이 들려오고,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겁이 났다.
몸을 뒤로 당겼다.
“우리 숨어요.”
매장 안에 계산대 밑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 뒤를 따라오던 언니가 몸을 멈췄다.
“난 가야 돼.”
“네?”
“우리 서준이.”
주희는 싱글맘이었다.
아이가 근처 유치원에 있었다.
바깥이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가야 한다.
“그, 외계기술이 들어와서 우리 경찰도 막 이상한 힘쓰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무슨 배리어니, 이상한 봉이니 에너지가 어쩌고저쩌고했었다.
그러니까.
당장 우리 걱정이나 좀 하라고 하고 싶었다.
나가자니.
싫다. 절대로 싫다.
무섭다. 손발이 바들바들 떨린다.
“언니, 그러다 죽어요.”
“지수야. 나 진짜 가야 해.”
주희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안 돼, 언니, 언니.”
다급하게 놓친 손을 붙들었다.
여기에 혼자 남으라고?
그건 더 싫다.
“같이 가요.”
차라리 내려가자.
“…그래.”
언니는 대단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런 내색 한 번 안 했다.
자기 매장을 찾은 진상 손님을 상대해도 눈물 한 번 흘린 적 없다.
아니, 오히려 진상 부리는 손님과 육탄전을 하는 사람이다.
대단한 여장부다.
‘그래. 나가자. 나가면 괜찮을 거야.’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마음이 요동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손발은 계속 떨렸다.
“꺄아아아아악!”
퍽!
흠칫.
놀라서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연기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아까 들렸던 비명은 멀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 같았다.
그런데 방금은 아니다.
바로 뒤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깝다.
타닥.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들었어요?”
목소리를 죽이고 묻자.
주희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말을 하면 안 돼.’
말귀를 금세 알아들었다.
‘죽고 싶지 않아. 아빠, 엄마.’
보고 싶었다. 하물며 오빠까지 보고 싶었다.
집에서 나오며 엄마랑 싸웠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꽤 고가의 백bag을 사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왜! 내 돈 갖고 내가 살 건데!”
“에효, 이것아. 사지 마라면 사지 마라. 등짝 다 작살낸다.”
무섭다.
그래도 사야겠다.
까짓것 등짝 나가떨어지라지.
누가 내 것 산데.
엄마 것 산다고, 엄마 것.
단 한 번도 명품 백 따위 구경하지 못한 엄마한테 줄 선물이다.
이미 샀다.
그걸 전해주고 싶다.
갑자기 가슴이 가라앉았다.
살고 싶다.
하지만, 이 언니만큼은 아닐 거다.
아들을 키우며 억척같이 산 언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면 되게 이기적이 될 것 같았는데.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구나.
“언니.”
“쉿.”
투둑.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제 라커에 가방 좀 엄마한테 갖다 줘요.”
“지수야.”
아이를 키우는 엄마한테 죽으라고 할 순 없다.
“가요!”
비상등 불빛이 보였다.
주희를 거기로 밀고 몸을 일으켰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오빠 놈이랑 싸울 때보다 열 배는 더 큰 소리다.
투두둑.
다가오는 발걸음이 더 빨라진다.
“우우욱.”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역시 죽고 싶지 않다.
“엄마, 아빠. 오빠.”
입안에서 말을 굴리고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감싼다.
드르륵.
“너 두고 혼자 갈 것 같니?”
바닥에 무언가 긁히는 소리다.
하하하.
마네킹 손이다.
그걸 끌고 온 주희다.
“오라고 해. 이 언니가 다 때려 눕혀준다.”
언니, 눈에 눈물 고였어요.
이 언니도 무섭구나.
“그래요.”
연기 사이로 무언가 훅하고 다가온다.
“꺄악!”
마네킹 손을 휘두른다.
턱.
너무도 쉽게 막혔다.
놀라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응?”
근데 너무 익숙한 소매가 보인다.
낮에 판 옷이다.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군인 아저씨?”
“아, 진짜. 아저씨 아냐. 오빠지. 오빠 해 봐.”
“에?”
낮에 봤던 그 남자였다.
“갑자기 비명은 왜 질러? 놀랐잖아.”
“뒤요!”
주희가 외쳤다.
녹색 빛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연기 사이로 실루엣이 보인다.
인간처럼 보이고 손에 뭘 들고 있다.
웅.
진동소리 같은 게 울리고.
꽝!
폭음이 울렸다.
지수와 주희가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소리였다.
이번에는 바로 옆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만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