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착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 첫 번째였다.
D는 외계인의 피를 정제한 약이고.
이건 부작용을 불러온다.
개중에는 죽는 이들도 있고 미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 훈련소에서 이 약의 부작용을 견디는 자들이 모이기에.
이곳에서 그런 비극은 볼 수 없지만.
‘단순하네. 독에 관련된 부분을 완화하는 거야.’
부작용을 대비해 먹는 약이다.
군대에서 보급해주는 보급품 중 하나.
프로비던스가 그걸 연구했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다.
그 결과 전과는 다른 부작용 완화, 아니 장복하면 부작용을 제거하는 약을 만들었다.
‘넌 못 하는 게 뭐냐?’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 불세출의….
화학 공식까지 따로 받은 세주는 약을 만들어 셋에게 먹였다.
“이게 뭔데?”
인준이 물었다.
“머리카락 나는 약.”
그가 주저하지 않고 먹었다.
치용은 덥석 약을 받자마자 먹었다.
“무슨 약인지 안 궁금하냐?”
“그냥 먹으면 되지. 뭘 따집니까? 저 치용입니다. 김치용.”
여기서 김치용이란 이름 석 자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남자한테 좋은 거다.”
“…고맙습니다.”
목숨을 살려줬을 때도 듣지 못한 진심 어린 감사 인사다.
유진에게 약을 내밀자.
“형은 참, 신기한 거 같아요.”
“응. 나도 내가 신기해. 이렇게 잘생기고 멋지고, 성격까지 좋을 수 있나 싶거든.”
-강남에 유명한 신경정신과 의사 소개해 줄까?
“아니, 음. 하여간 좋은 거겠죠?”
유진한테만은 말해줘야 했다.
“D의 부작용을 완화하는 약이다.”
애초에 이 약을 만든 이유가 이 녀석 때문이다.
“눈치 빠르네요. 형.”
노블 에너지에 민감할수록, D에 대한 부작용이 크다.
세주도 그랬다.
그래서 겨우 1년 밖에 못 산다고 한 거다.
유진도 마찬가지.
D를 복용한 이들 중 민감하게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일수록 몸이 쉬이 망가졌다.
유진은 자주 피를 토했다.
간간이 전신이 떨려, 뭘 쥘 수조차 없었다.
처음 생긴 부작용이 피부가 우윳빛으로 변하는 거였기에.
전혀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먹어. 그럼 괜찮을 거다.”
“믿어요.”
눈웃음을 짓는다.
가슴이 뛸 뻔했다.
남잔데, 유진이 웃으면 누구라도 반하게 할 마력이 느껴진다.
꿀꺽.
그가 약을 삼켰고.
세주가 메모지를 꺼내 건넸다.
“뭔데요?”
“그 약에 대한 화학 공식. 믿을 만한 의사한테 넘겨.”
눈치는 유진도 빠르다.
“형한테 얻었다는 말은 빼고 누군가 개발했다고 해야겠네요. 아예 그 의사가 발표하는 거로 잘 엮어 볼게요.”
“그래 주면 편하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D에 대한 부작용을 완화하는 약이다.
아니,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독이 사라지는 약이다.
“후. 큰일 했네.”
큰일이다.
지금 세주가 한 일은.
이곳에서 싸우는 이들, 그들의 삶의 판도를 바꿀 일이었다.
*
에에에에에에에엥!
이곳에 배치받은 후.
아침에 눈을 뜨면서 좋았던 점 하나는.
그 지랄 같은 기상나팔을 듣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모닝콜로 울렸다.
“귀 따갑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나머지 셋도 일어났다.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간 유진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습격입니다.”
말 한마디에 모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렇게 갑자기?
파인딩 모드에 맵을 보자.
끄트머리에 빛이 점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브로?’
-감지 범위 밖이었어.
밖으로 나갔다.
“무기고 먼저 가자.”
무기를 찾고 나선 길이다.
“왔나?”
고명수가 먼저 나와 있었다.
“배는 멀쩡합니까?”
치용이 묻는다.
딴에는 걱정하는 거지만.
“이 미친 새끼가.”
김후경이 눈을 부라리게 만든다.
“관둬.”
고명수가 둘을 말린다.
“위에서 임의로 정했다.”
뭘?
“규모 5다.”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고 봐야 하나.
‘생각보다 빠른데.’
저격탑으로 향했다.
셋이 앞으로 나서려던 걸.
“따라와.”
데리고 움직였다.
알파 팀과 눈인사를 하고 탑으로 올라갔다.
“안 싸웁니까?
치용이 물었다.
“확인부터.”
규모가 달라졌다면.
-나오는 놈들이 달라졌을 거다.
당연한 소리다.
당장 지금 상황부터 달랐다.
현재 상황 파악이 가장 우선이다.
고요하다.
레이퍼의 포효가 들리지 않는다.
탑으로 올라가 망원경을 꺼냈다.
고효율의 망원경은 먼 곳의 상황을 마치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보게 해줬다.
적군의 규모가 보였다.
여기저기 적을 관찰하는 이들이 많았다.
셋도 망원경을 들었다.
“저 새끼들.”
치용의 목소리다.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놈들이 있다.
하얀 눈이라 이름 붙인 네임드.
-네임드라니, 이제는 양산형 괴물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얼핏 봐도 50마리가 넘는다.
하늘에 뜬 데몬 플라이.
‘무슨 용기사냐?’
데몬 플라이 위다. 하얀 눈 놈들이 하나씩 위에 올라타 있다.
그리고 그 밑.
레이퍼 놈들이 바글바글하다.
-5만 이상, 그 뒤로도 계속 나오네.
전체를 스캔한 프로비던스의 말이다.
그 사이사이 브레인 레이퍼도 있다.
-저것들도 천은 넘네.
상대가 보여주며 묻고 있다.
우리랑 싸울 자신 있냐?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랄 맞네.”
인준의 한 마디로 표현된다.
정찰을 위해 나선 이들, 그들의 표정이 까맣게 죽는다.
저런 병력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무엇보다.
그 뒤.
육중한 몸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보랏빛 괴물.
골이다.
“말도 안 나오네.”
속을 표현하지 않는 유진이 혀를 내둘렀다.
촉수를 늘어뜨린 채, 모습을 드러낸 놈이다.
-은신 풀었어.
저 큰놈이 안 보일 리 없겠지?
뒤를 돌아봤다.
술렁인다.
파도처럼 절망이 퍼져 나간다.
-이대로 저것들이 쳐들어오면 그냥 끝나겠다.
“저것들이랑 싸워야 하는 건가.”
인준이다.
“약한 소리 하고 있네. 그냥 개불알 같이 생긴 놈이 늘었을 뿐이다. 거기에 큰 불알 하나가 더 있는 거고.”
“맞는 말이지.”
알파 팀 대장도.
최고 지휘관도 나서지 않는다.
모두 저 보랏빛 괴물을 보고 있는데도.
하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죽어도 좋으니까 싸워라?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휘관은 그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였다.
슈우우우웅!
전투기 여섯 대가 날았다.
그리고 동시에 미사일을 쏜다.
불꽃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이 골을 향한다.
그리고 뻐버버버버벙!
허공에서 속절없이 터졌다.
배리어다.
골이 가까이 왔다는 건, 이제부터 저놈 영역 안에서는 대공포도, 미사일도 소용없다는 말이었다.
고로, 지금 지휘관의 선택은 최악이었다.
“미사일이 안 통해?”
인준의 동공이 흔들린다.
강단이 꽤 있다는 이들도 같은 상태이리라.
웅성웅성.
조용하던 이들 사이에서 암울한 목소리가 퍼진다.
웅성거림이 절망이라는 파도가 돼서 모두를 덮치기 전.
우우우웅.
에너지를 모으고 모은다.
그리고.
꽝!
허공에 벼락이 쳤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귀를 억지로 잡아 꽂는 굉음이다.
꽝!
두 번.
방아쇠를 두 번 당긴 세주가 저격탑을 타고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오른 채다.
동쪽을 등졌다.
세주의 뒤로 해가 떠오르며 빛을 뿌린다.
“아직 싸움은 시작도 안 했어.”
중얼거림.
들리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수호신!”
“반세주 개자식!”
절망에 빠진 이들이 눈을 뜬다.
그리고 앞을 본다.
그래. 아직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수호신!”
밑에서 함성이 천둥소리만큼이나 울렸다.
이제까지 전장의 판도를 바꾼 남자다.
덕분에 살아남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랬으니까.
그가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벼락으로 탄을 쏘아 올린 것만으로.
사기가 오른다.
-오.
‘감탄은.’
남들 앞에 나서는 기질은 없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 믿고 따라와! 형이 엉! 소싯적에 엉!’
-미쳤군.
밑에서 그런 세주를 보는 셋, 모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형님 하나는 잘 뒀지.”
“폼은.”
“후, 한바탕 해야겠네요.”
각자 한 마디씩을 던진다.
훌쩍하고 위에서 내려오고, 다시 전투태세다.
‘근데 왜 저것들 안 쳐들어오냐?’
-나도 몰라.
프로비던스도 완벽하게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뒤에서 함성이 잦아들 때쯤이었다.
그사이 포탄이 몇 개 더 날아갔다.
배리어에 막힌 건 당연지사였다.
장님이 아닌 이상 허공에 육각형 모양의 패널이 생겨나는 게 보이니.
무언가 막는다는 것도 알 테고.
거리는 꽤 멀었다.
놈들이 날아오고 뛰어온다 해도 충분히 대비할 만큼.
-형.
프로비던스가 부른다.
그의 렌즈가 빛을 뿜어 골을 가리켰다.
골의 한 가운데다.
동그란 모양의 정중앙.
꾸드드드득.
양옆으로 앞이 쩍하고 열린다.
크진 않다. 사람 서넛이 드나들 정도다.
열린 부위로 진득한 액체가 점점이 남아 묻어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꾸드드득.
촉수와 혈관 같은 것에 둘러싸인 괴물이 보였다.
보랏빛 혈관에 묶인 몸은 흰색이었다.
팔다리가 있고, 머리가 있었다.
바이크 헬멧 같은 걸 뒤집어쓴 놈이다.
흰색의 유리가 앞면을 덮어서 빛을 반사한다.
양팔이 붙들린 채, 놈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그리고 혈관이 천천히 그의 몸을 푼다.
등에 두꺼운 혈관 다발이 연결되어 있다.
툭.
옆으로 열린 골의 껍질이 밑으로 움직여 발판을 만든다.
그리고 혈관이 뭉치더니, 의자를 만든다.
아니, 그냥 의자가 아니라 화려한 왕좌를 연상케 한다.
터벅터벅.
놈이 걸어 그 의자에 앉는다.
망원경으로 그걸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끼이이이이이이이익!
기성이 터진다.
놈이었다.
전신을 파르르 떨며 괴성을 지른다.
“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다.
-언어의 일종이야. 해석은 불가능해.
‘욕이겠지. 아니면 뭐, 항복해라?’
저놈이 뭐라고 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냥 저 새끼는 죽여야 할 놈이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저격하면 적중률은?’
-배리어를 못 뚫어. 시도하지 마. 괜히 놈에게 형의 위치를 알리지 마.
안 그래도 하얀 눈을 보낸 걸 보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단 거다.
누가 봐도 지휘관이다.
-저놈이야. 저거였어.
프로비던스가 스캐닝하다 말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골이 안에 숨겨두던 것. 저놈을 위해서 골이 움직이지 않은 거야. 에너지를 충당해서 놈에게 공급한 거야.
‘쉽게 말해.’
-하얀 눈은 일종의 실험이었어. 저걸 만들기 위한.
‘저게 인간이란 거냐?’
-그래. 골은 저걸 보호하고 만들어 내는 게 일이었던 거야.
끼이이이이이익!
두 번째 기성이 터진다.
잠시 뒤.
[아아]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테스트하는 것 같은 목소리.
그리고.
[잘 들리나?]
같은 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내가 똑바로 들은 거 맞지?’
한국어다.
외국인이 어설프게 발음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
딸깍.
망원경 너머다.
놈이 가면을 벗는다.
굵은 보랏빛 혈관이 얼굴을 가로지르지만.
사람이다.
검은 머리칼의 한국 남자.
“어, 시발?”
치용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세주의 정신은 모두 앞쪽에 쏠려 있었다.
[언어 선택을 잘못했다]
오연한 자세로 왕좌에 앉은 채.
골을 통해 놈의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렸다.
[딱 두 마디만 하겠다]
들어서 좋을 건 없다.
하지만 막을 방도가 없다.
[항복해라]
프로비던스가 반사적으로 스캐닝 모드를 돌린다.
-파악이 안 돼. 배리어가 방해한다.
[아니면 다 죽인다.]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망원경에 눈을 붙인 치용이다.
“니가 왜 거기서 나오냐?”
황당함을 넘어서 넋이 빠진 목소리다.
아는 놈이냐?
“누군데?”
인준이 물었다.
“마상길, 마상길인데, 왜 저기서 나와?”
인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치용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다.
그런 치용을 향해 인준이 손을 들었다.
딱!
뒤통수를 맞은 치용이 인준을 돌아봤다.
“너 저런 새끼랑 나랑 비교한 거냐?”
인준의 손가락이 괴물, 골 앞에 있는 놈을 가리킨다.
“시발, 내가 아는 마상길은 인간인데! 잘못 봤나?”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망원경을 들고 다시 본다.
“맞는데. 그 새끼.”
자신을 찌른 놈이다.
길러 준 이들을 패대기친 놈이다.
그 얼굴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정신 차려.”
세주가 둘 사이를 벌렸다.
“힘 빼지 마라. 싸움 힘들 거다.”
[딱 하루, 지금부터 24시간 준다]
동시에 프로비던스가 영특하게도 카운트다운 타이머를 켰다.
23:59.
저 병력이 쳐들어오기까지 24시간.
꽤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