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김치용 상병입니다.
세주는 다시 막사에서 잠을 자며 전과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그는 전과 같았지만, 변한 건 많았다.
일단 대우가 달라졌다.
그는 총기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거치하는 총기를 지키는 병사 배치해.”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세주의 개입으로 전장의 상황이 변했다.
첫날은 두 자리, 그 이후 전사자 숫자가 한 자리다.
규모 4에 대한민국 최악의 악몽이라 불리는 것임에도.
브레인 레이퍼만 처리했다면 모를까.
세주의 총격은 적군 자체를 박살 낸다.
물론 매번 커버링 탄환을 쓴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몬 플라이가 한계선 근처에 오지도 못했으며.
브레인 레이퍼는 나타나는 순간 죽었다.
위기에 쌓인 부대 옆에는 저격 포라 부르기 마땅한 벼락이 떨어져 레이퍼 부대를 부순다.
“하나만 묻지.”
대장의 물음에 장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파 팀에서 한다면 가능한가?”
단춧구멍 같은 작은 눈이 반짝였다.
반세주 덕분이다.
자신의 옆에 함께 한 박태희까지.
알파와 베타, 두 팀이 실업자가 됐다.
브레인 레이퍼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두 부대다.
장광안은 자신이 아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봤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알파와 베타를 만든 이에게 연락도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가 박태희를 바라봤다.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고 광안이 답했다.
“불가능합니다. 현재 저희 전력으로는.”
“그럼 저 밖에서 지금도 벼락이라 부르는 총을 쏘는, 수호신이라는 작자는 뭔가?”
벼락, 세주가 쏘는 총의 별칭이었다.
장광안도 박태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들도 어떻게 해서 저런 게 가능한지 몰랐다.
*
영웅은 만들어지기도 하며,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누가 만들어주지 않아도.
실제로 눈앞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본, 이들은 그걸 일으킨 이를 영웅이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법이다.
7일.
세주는 적군을 괴멸시키는 영웅이 되었고.
예외적으로 전장 수행 중 소위로 진급했다.
-이 정도로 유명해져 버리면, 아무도 함부로 못 하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해도 세주를 잡아갈 수 없다.
이게 바로 명성의 힘이다.
‘더는 실험실의 쥐가 될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단 거지?’
-잡아간다고 얌전히 잡혀갈 위인도 아니잖아?
‘당연한 말을.’
이 전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금광을 캐는 광부와 다름없다.
에너지가 실시간으로 차오른다.
그 사이 세주도 충실히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그의 배럿은 벼락이라 불렸다.
만일 적이 인간이었다면 그를 죽이려고 특공대를 수백 번쯤 보냈을 것이다.
‘좋아.’
그는 막사에 누워 테크룸으로 들어갔다.
사악.
주변 풍경이 변한다.
모드 테크 트리가 보인다.
에임 모드, 스킬 트레이싱.
그 밑.
작은 네모 칸 두 개가 빛을 반짝인다.
현재 보유 에너지가 한쪽에 수줍게 숫자를 내민다.
291,245.
-연구실에 데몬 플라이 조각 연구 중 (28%)
-기술실에 소형화기, 데저트 이글 개량 작업 중(48%)
-현재 오픈 가능한 모드 둘. 오픈 시 필요한 에너지 각각 100,000.
“농담하지 마.”
보유한 에너지를 보고 그동안 성과를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미친 로봇이 헛소리를 해댄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정직한 오버 테크놀로지 로봇이야.
“개소리하네.”
작게 읊조린다고 했지만.
-들으라고 한 소리지?
“아, 들렸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십만이라니? 씹만아. 너무 하잖아.”
-내가 정했어? 번번이 나한테 불만을 토로하는데, 의미 없습니다.
“에너지 타령을 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데몬 플라이와 권총 개량하는데 몇만씩 에너지가 소모된다.
하여간 비효율적이다.
“넌 에너지 소비효율 등급이 최저일 거야.”
-무슨 헛소리야.
“오픈해.”
-둘 중 어느 거?
미리 알 수는 없는 거냐?
빛나는 두 개의 상자를 보며 세주가 손가락을 들었다.
양손 중지를.
“둘 다.”
-…꼭 그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해?
“버릇이라.”
-승인 완료. 모드 오픈.
모든 오픈은 시간 소요가 안 돼서 다행이다.
곧 눈앞에 팍 터지며 눈앞의 환경이 변한다.
-모드 가상 체험, 오픈 기념 튜토리얼 같은 거야. 놀라지 말고. 새가슴이라 미리 말해주는 거다.
‘누가 새가슴이냐?’
놀라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집중하자.
모드 이름이 보인다.
밀리 모드.
곧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상대는 레이퍼 두 마리.
웅!
세주의 몸이 커버링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앞으로 튀어나간다.
모드의 특징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근접전을 위한 모드.’
-설명 필요해?
‘아니.’
보고 느끼게 해주는 시뮬레이션 중이다.
설명 따위 필요 없었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고.
‘당분간은 쓸 일이 없겠어.’
-너무 단정하지는 마.
‘다음 거나 틀어 봐.’
치직.
바로 눈앞이 까매졌다가 밝아진다.
다음 시뮬레이션이었다.
적은 없었다.
그저 언덕과 울퉁불퉁한 황무지뿐인 곳이다.
-모드 이름은 오버 페이스. 익숙해지지 않으면 곤란할걸?
프로비던스의 말과 같았다.
스스로 경험하면서도 좀체 익숙해지기 힘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오버 페이스 모드는 딱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속도.
평소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해주는 것.
대신 커버링 에너지의 몇 배나 되는 힘을 소모했다.
시뮬레이션에서 나온 후.
두 가지 모드를 꼼꼼하게 살핀 세주가 말했다.
“오버 페이스는 너무 비효율적인데?”
-다 그게 형이 가진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래. 아, 지금 말한 에너지는 노블 패스에 흐르는 생체 에너지를 말하는 거다.
“커버링 풀 업 상태보다 몇 배나 소모가 빠르잖아.”
-그래서 물려?
“미친 기계 새끼. 뭘 물려.”
가끔 프로비던스의 뇌를 뜯어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다.
저 또라이 같은 기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나흘.
세주는 두 가지 모드를 붙잡고 시뮬레이션 모드를 돌렸다.
전장에 나가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선행해서 익혀야 할 것들이었다.
천막에서 나오다 아는 얼굴이 보였다.
김택동이었다.
“택동아.”
같은 계급이다.
그가 우뚝 서서 세주를 바라본다.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그가 말했다.
“같은 소위라도 내가 선배 아냐?”
“아, 미안. 선배란 말이 빠졌네. 택동 선배. 잘 지내지?”
“내가 아는 한, 너 같은 미친놈은 처음 본다.”
-남 말 하네.
김택동도 정상으로는 안 보인다.
“반가워서 인사 한 번 했어. 죽지 말고 열심히 싸우고.”
“누구 덕에 요새 전선에서 사상자 숫자가 현저하게 줄었지.”
“아, 귀 간지럽네.”
세주가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미친놈.”
김택동 소위가 픽 웃고는 그를 지나쳐 갔다.
등에 맨 두 자루 칼이 덜그럭 소리를 냈다.
‘브레인 레이퍼 나오려면 한참 남았지?’
-계산상으로는 앞으로 열두 시간은 출현 안 해.
프로비던스라는 로봇이 노는 꼴을 볼 수 없어서, 적이 나오는 시간을 파악하게 했다.
생각보다 꽤 주기적인 움직임이었기에 시간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골 구경하러 가자.’
-…뭘 구경해?
‘저거 바깥에서 죽이기는 글렀잖아. 그러니까 뭐 하는 놈이지 보러 가자고.’
일단 봐야, 어떻게 죽일지 가늠이라도 할 거 아닌가.
위잉.
프로비던스가 홀로그램으로 소년의 모습을 구현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전장 너머를 가리켰다.
-저거?
‘응.’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 형상이 손가락을 들고 귀 옆을 빙글빙글 돌린다.
-Are you crazy?
‘이 자식이 형한테.’
-열은 없는데.
‘까분다. 일단 보고나 오자.’
-레이퍼는 어쩌고?
골과 그들 사이에 깔린 것들.
차라리 지뢰밭이라면 프로비던스가 감지해서 피하면 그만이다.
무식한 짓이지만, 인간과 전쟁 중이라면 힘으로 밀어붙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대략 8,000마리쯤 되려나.
프로비던스도 단숨에 숫자를 파악할 수 없는 대규모의 레이퍼 부대다.
지금도 끊임없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고.
‘형이 다 생각한 게 있어요.’
-그 생각을 못 믿어서 그래.
‘보고 말해.’
30분 뒤.
전방 근처에서 세주가 몸을 푼다.
“후우우우.”
호흡을 뱉고.
팔다리를 턴다.
번쩍.
외곽에 있지만, 병사 하나가 순찰을 돌며 세주를 발견했다.
저 멀리서 총성이 울리는, 전장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다.
혹시나 전장이 확장될까 싶어 주변 경계는 철저한 그들이다.
“누구십니까?”
라이트 빛을 손으로 가리며 세주가 말했다.
“김치용 상병입니다.”
상대 계급이 보였다.
병장이었다.
이럴 때 팔라고 이름이 있는 거다.
현재 세주는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특별 보호 감시 대상이다.
그가 있기에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으니까.
위에서 취한 조치는 당연했다.
“뭐 하는 거야?”
라이트를 쥔 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부대 내에 미친놈은 많다.
그렇다고 묻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조깅.”
세주가 답하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전장 중에 목각 인형에 기도를 올리는 병사도 본 적 있는 그였다.
조깅 정도면 양호하게 미쳤다.
“너무 멀리 가지 마라. 외곽 경계선 넘으면 탈영이다.”
“네.”
그는 그 말과 함께 떠났다.
-다행이네. 외곽 경계선은 안 넘을 테니.
‘당연하지.’
세주는 그 경계선의 반대쪽, 저지선을 넘을 작정이니까.
-돌아와서 휴식 시간까지 포함해서 제한시간 3시간.
‘타이머 띄워.’
홀로그램으로 눈앞에 타이머가 나타나고.
‘좀 크다 작게, 오른쪽 위로.’
익숙한 자리로 이동시킨 뒤.
‘모드 온.’
그가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오버페이스.’
시뮬레이션 모드에서 세주의 오버페이스 모드 유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최고 기록이 15분 42초였다.
-오버페이스라도 골이 있는 곳까지 15분 주파는 어려워.
‘걱정 말라고 했지.’
세주가 밤마다 하는 훈련을 프로비던스라도 다 알 순 없었다.
그가 자는 시간에 주변을 돌며, 이상을 감지해야 했고.
혹시나 브레인 레이퍼가 나타나면 세주를 깨워야 했다.
그래서 몰랐다.
지금 그가 하는 짓이 뭔지.
-염병, 이게 말이 돼?
우우우웅.
오버페이스 모드는 전신에 속도를 배가시켜주는 종류의 힘이었다.
에너지를 바깥으로 뿜어내는 종류의 모드인데.
세주는 그 형태를 일그러뜨렸다.
‘조금만 더.’
허벅지 밑으로 그 에너지를 모은다.
소모되는 에너지가 줄고.
발바닥에 그 힘이 모인다.
이렇게 컨트롤해도 유지되는 시간이 길지 않다.
길어야 한 시간이다.
-모드를 만든 이가 봤으면 뒷목 잡았을 듯.
프로비던스도 감탄할 정도의 컨트롤 능력이다.
지금 보여준 건 커버링 에너지를 컨트롤 하는 것과 다르다.
커버링 에너지를 컨트롤 하는 게 바늘구멍에 실을 넣는 종류라면.
지금 하는 짓은 저글링을 하며 바늘구멍에 실을 넣는 짓이다.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손이 세 개, 네 개가 아니라면.
-아.
세주가 한 짓을 본 프로비던스는 곧 깨달았다.
-에너지를 마치 손처럼 다루는구나.
‘오, 똑똑한데 브로.’
커버링 에너지로 찍어 눌러 컨트롤 한다.
세 번째 네 번째 손은 에너지가 대신한다.
“출발한다.”
말과 함께 세주가 땅을 박찼다.
타-앙!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울리고 곧 잔상이 남으며 세주가 사라졌다.
한 발자국에 몇 m씩 뛴다.
앞으로 내달리다 저지선을 이루는 담장이 보였다.
투두두두두!
“죽여!”
저 멀리, 전장의 소리가 들린다.
세주는 담장을 보며 그대로 돌진했다.
부딪치기 직전.
툭.
점프하고 담을 밟는다.
퉁!
그대로 땅과 수평으로 담을 땅 삼아 달린다.
한순간 잔영을 남기며 담을 넘는다.
정상에서 밑으로 뛰어내리며 커버링 에너지를 뿜어 쿠션을 대신했다.
쿵!
그대로 앞으로 구르며, 몸을 일으키고.
다시 또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끼에엑!
중간에 레이퍼가 그를 발견했지만, 따라올 수 없는 속도다.
쌔애액!
무섭게 달리는 스포츠카를 연상시킨다.
아무리 세주라도 전장 한복판을 통과하지는 않았다.
레이퍼 무리 외곽으로 빙 돈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끼엑!
가끔 정면이나 측면에서 치고 나오는 놈은.
-3초 뒤, 왼쪽에서 레이퍼 다리.
프로비던스가 칼큘레이팅 모드로 알려준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괴물의 숫자가 현저히 적어졌다.
쫓는 레이퍼 무리도 없었다.
‘모드 오프.’
모드를 끄고 멈춘 세주의 눈에 기가 막힌 광경이 보였다.
“이러니 끝이 안 나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들.
수백 개가 넘는 보랏빛 애벌레다.
모두 항문에서 알을 싸지르고 있다.
세주가 도착한 곳, 놈들의 부화장이었다.